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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0)화 (50/242)
  • 혼술사 도로테아 50화

    “이게 전부구나.”

    “그럼 여기서 진수성찬을 바랐습니까?”

    딱딱한 검은 빵을 만지작거리는 도로테아를 본 레번이 퉁명스레 답했다.

    어딘가 묘하게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소녀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그때도 간신히 얻었던 빵을 쥐새끼한테 줬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년은 악연에 가까웠던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 냈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인생의 첫 감옥살이였으니까.’

    비록 그전에도 몇 번 거리에서 도둑질을 하거나, 소란을 일으켜 경고를 먹은 적이 있긴 했지만 아이에게만큼은 관대한 사람들 덕에 경고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스스로도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선’을 지키기도 했었고.

    ‘그런데 저 새끼는 고작 여자애를 빵으로 꾀려 했다는 죄목으로 나를 가차 없이 치안대에 넘겼고.’

    기껏 베풀었던 빵은 도로테아의 곁에 있던 쥐새끼가 파먹었고, 소년은 귀한 빵을 잃은 상황에서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열불이…….’

    확실히 도로테아를 제 패거리로 끼워 넣으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때 그가 대단히 나쁜 짓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소녀가 보호자도 없이 거리를 헤매고 다니니 그와 비슷한 처지겠거니 어림짐작했던 것이 죄라면 죄일까.

    ‘그렇게 형편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애한테 대단한 뒷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어떻게 하겠냐고.’

    아무리 그래도 귀족가의 계집이었을 줄이야.

    어느새 딱딱한 빵을 절반이나 갉아먹은 다람쥐를 착잡한 표정으로 보던 레번은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녀의 귀에 달린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온몸에 두른 것들 하나하나가 그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값비싼 물건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후작가의 영애셨다는 거지요?”

    “응, 맞아. 그리고 이쪽이 그때 널 집어넣었던 황자.”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마주하기도 겁나는 살벌한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인 그가 한숨을 삼켰다.

    ‘다시는 얽힐 일 따위 없을 줄 알았건만.’

    왜 또 그가 있는 곳까지 와서 얼쩡거린단 말인가.

    평생을 가도 말 한 번 섞을 일 없던 인간들과 엮인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최악이었던 첫 만남만큼이나 이번에도 그리 좋은 만남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찾은 이유는 뭡니까? 분명히 말해 두지만, 우리는 나쁜 짓 같은 건 안 했습니다. 싸구려 공연을 하면서 벌어먹고 사는 것이 전부라고요.”

    그 과정에서 아주 자잘한 불법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살아가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곤 하는 일들이었다.

    그가 찔린 듯 눈을 내리깔든 말든 루크의 관심사는 하나뿐이었다.

    “파티마는 어디 있지?”

    이미 여러 번 답을 들었음에도 확인하듯 묻는 말에 레번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 황자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본새가 거침이 없었다.

    “모릅니다. 그깟 계집이 어디를 갔는지 알게 뭡니까. 게다가…….”

    레번이 나직하게 욕을 뱉었다.

    “나 몰래 딴 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요. 망할 년 같으니.”

    이를 빠드득 가는 그를 바라보며 루크는 담담하게 추궁을 이어 나갔다.

    “혹시 다른 말을 들은 것은 없나? 그녀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라든가, 아니면 자주 접촉하던 외부인이라도.”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까. 여기 있는 애들이 수십인데 하나하나 다 챙길 수도 없고요.”

    연이은 질문들이 쏟아지자,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레번이 퉁명스레 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이곳을 찾은 불청객들을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나리들도 좀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당장 몇 분 뒤에 공연이 있단 말입니다.”

    “공연이라. 거리 공연에 시간이 정해져 있진 않을 텐데?”

    “거리 공연이 아니니까요.”

    레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돈 많은 노친네가 오늘 극단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오후부터 밤까지. 외부 관객을 들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

    “어이가 없으시단 거 압니다. 저도 믿기 힘들었으니까.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의 공연을 보겠다고 시간을 통째로 사는 인간이 있다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레번이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볍게 말을 뱉었다.

    “뭐, 저희야 돈만 받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이미 절반을 선불로 받았으니 지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잖습니까.”

    줄곧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던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레번은 이상할 정도로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뒤흔들어 놓은 듯한 느낌.

    황자의 눈빛과는 다른 불쾌감이었다.

    그녀가 어느새 지나치게 조용해진 문밖을 비스듬히 곁눈질했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 단원들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일이 없다는 의미겠네.”

    “예?”

    “약속했던 손님들은 왔니?”

    그녀의 물음에 레번이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먼저 빠르게 자리를 뜬 것은 루크였다.

    문밖으로 사라진 그의 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번은, 그제야 지나칠 정도로 주변이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식사를 마친 이들이 건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텐데.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도로테아를 지나쳐 식사가 루어져야 할 식당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좁고 긴 복도에는 쥐새끼 한 마리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서둘러 식당으로 달려간 그의 눈앞에 쥐죽은 듯 쓰러져 있는 단원들이 보였다.

    누구 하나라고 할 것 없이 손에 빵을 들고 있거나 바닥에 떨어뜨린 이들 모두 축 늘어진 채 미동이 없었다.

    “잠들었다. 누군가 약을 썼군.”

    이들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확인한 루크의 말에 레번이 멍하니 말을 잃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식사는 누가 준비했지?”

    “다들 돌아가면서 합니다. 어린애들을 제외하면 그날 외출하지 않거나 실적이 좋지 않은 사람 위주로…….”

    “실적이라.”

    황자의 중얼거림에 뜨끔한 듯 레번의 입이 다시금 꾹 닫혔다.

    고아들이 모여 있는, 조잡하고 영세한 극단이라면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는 뻔했다.

    루크는 관계없는 일을 추궁하는 대신 찔끔하는 레번을 모른 척했다.

    그는 몹시 초조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리기 바빴다.

    “돌겠네. 벌써 돈을 그만큼이나 받았는데 그 손님이 오면…….”

    “돈을 건네고 이곳을 빌린 게 누구든 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야.”

    차분하고 나지막한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레번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짙은 속눈썹 아래에 자리한 남색 눈이 서늘한 시선으로 쓰러져 있는 이들을 훑었다.

    레번은 그의 말을 끊어 내며 들어선 도로테아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처음부터 거금을 내고 공연을 보겠다는 말이 거짓말이었을 거란 이야기야.”

    처음에는 그저 죽은 이들의 신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겠지 싶어서 쫓아온 것일 뿐인데.

    생각보다 일의 규모가 작지 않음이 분명했다.

    웃는 듯 아닌 듯 모호한 표정을 한 그녀가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무슨 소리냐고요!”

    답답한 듯 절로 소리가 높아진 레번의 외침에도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식당 구석에 숨어 있던 ‘미네’를 찾아내어 손을 뻗었다.

    아이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끌려 나왔다.

    “먹을 것에 약을 탄 건 저 아이로군.”

    루크의 말에 성큼성큼 다가간 레번이 도로테아의 품에 안긴 아이를 향해 손을 올렸다.

    “너!”

    벼락같은 외침에 움츠러든 아이가 도로테아의 품을 파고들자, 존재감을 죽인 채 뒤에 서 있던 프리드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뒤로 물러서라.”

    “그…….”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 레번과 도로테아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프리드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저 애가 일의 원인이라지 않습니까……!”

    어색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 채 꺼낸 레번의 말을 못 들은 척, 도로테아는 제 품에 파고든 아이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파티마가 부탁한 일이지?”

    “…….”

    소녀는 질문을 이해한 눈빛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저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을 한 채 도로테아의 품을 필사적으로 파고들었을 뿐이다.

    이 많은 이들을 재울 만한 약이 어떻게 아이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맑은 눈으로 루크를 응시했다.

    그 눈빛을 읽어 낸 황자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기겁하는 레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거나 말거나, 황자의 눈은 집요할 정도로 건물의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곳으로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여유롭게 건물 입구를 통과하는 그림자와, 천천히 이곳과 가까워지듯 점점 커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노란 눈을 가진 빼빼 마른 체형의 남자가 스윽 식당을 훑었다.

    약에 취해 쓰러진 자들을 보고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던 그는, 오히려 꼿꼿하게 서 있는 일행들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야. 왜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이 많지?”

    그의 샛노란 눈이 도로테아의 품을 파고든 채 얼굴을 묻고 있는 미네에게 고정되었다.

    눈을 가늘게 뜬 남자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린 채 탐탁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꼬맹이, 맡은 역할은 제대로 했어야지. 네 언니를 찾고 싶다면.”

    조그마한 몸이 움찔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가 이 모종의 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파티마를 데리고 있는 게 당신이야?”

    “음?”

    그의 눈이 그제야 미네를 끌어안고 있는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피고서야 그녀의 신분이 심상찮으리라는 걸 눈치챈 남자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런 곳을 드나드는 귀족 영애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파티마가 당신과 함께 있어?”

    그의 중얼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묻는 말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레빈의 얼굴이 구겨졌다.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사내놈이랑 정분이 나서 떠난다 이거지?”

    분기가 어린 목소리에 낯선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그녀가? 설마.”

    “아니면 걜 당장 여기로 데려오란 말입니다! 아니, 애초에 이 일을 어떻게 보상할 겁니까. 약은 왜 먹인 거야?!”

    “약을 왜 먹였냐니.”

    레번의 말에 남자의 눈이 곱게 호선을 그렸다.

    줄곧 미소가 가시지 않았던 얼굴에 웃음기가 좀 더 짙어졌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 만찬을 먹고 고통 한 점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니까? 내 나름의 배려였다고나 할까.”

    그의 말에 씨근덕거리던 레번의 눈이 커졌다.

    여유로운 남자의 얼굴을 보는 도로테아의 표정이 한층 냉랭해졌다.

    “안타깝군. 다 같이 식사를 나눠 먹었더라면 잠에 빠진 채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저세상으로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연민 가득한 눈이 아쉽다는 듯 사람들을 훑었다.

    얼어붙은 레번이나 차분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루크와 달리 도로테아는 한층 서늘해진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러 남자에게 닿았다.

    “당신은 만찬으로 이런 걸 먹어?”

    “음?”

    피피가 갉아먹고 절반 정도 남은 빵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웃음 한 점 없는 물음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왜? 맛이 없나?”

    남자가 낄낄거리자 도로테아가 쥐고 있던 빵을 그에게로 집어 던졌다.

    단단한 빵이 남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특별히 나쁜 걸 넣은 건 아니라구. 잠에 빠지는 성분 외에는 별다른 게 없으니까. 맛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남자를 노려보던 도로테아가 반박했다.

    “만찬이라고 하기에는 성의가 부족해 보이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스며든 분노는 ‘왜 약을 탔냐.’가 아니라 ‘왜 이런 걸 갖다줬냐.’에 맞춰져 있었다.

    “…….”

    가만히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레번이 고개를 돌려 루크를 바라보았다.

    “쟤, 분명 귀족 영애 중에서도 꽤 높은 신분을 가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갖추긴 했지만 그의 말은 결국 이런 뜻이었다.

    ‘귀족이라던 애가 왜 저렇게 먹는 것에 목숨을 거냐.’

    그녀를 흘끔거리는 레번의 눈에 의혹이 깃들거나 말거나 도로테아는 형편없는 식사의 질에 대해 연신 상대를 질타했다.

    “약의 맛을 줄이려면 향신료라도 넣든가, 아니면 정말 맛있게라도 만들든가.”

    그녀에게 기댄 피피가 동의하듯 끽끽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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