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9화
도로테아는 몹시 심기 불편한 티를 내면서 달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물끄러미 그녀의 옆얼굴만을 바라보던 루크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리 평판에 신경을 쓰는 줄 몰랐군. 걱정 마라. 오늘 일이 사교계에 추문으로 번지지 않도록 내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아직 메인 디시를 먹지 못했다고.”
처음 나온 다과들을 봤을 때 메인으로 나올 음식도 분명 기대해 볼 만했는데.
보통 티타임은 짧게는 1시간에서 2시간, 길게는 4시간까지도 이루어지는 터라,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해서 저녁 식사 전까지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든든한 간식이 메인으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냄새로 봐서는 정성껏 구워 낸 미트파이가 그녀의 앞에 놓일 차례였다.
그런데 하필, 음식이 도착하기도 전에 황자가 들이닥친 것이다.
“…….”
잠시 입을 다문 채 심통 난 소녀를 바라보던 그가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네가 필요해서 온 거다.”
“필요하다니, 어디에?”
등을 뒤로 기댄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느릿하게 묻는 목소리에 루크가 담담하게 답했다.
“시체가 발견된 방은 오래전부터 한 사람이 장기간 대여 중이었다더군.”
“…….”
“그 방을 빌린 건 화류계에서 일하던 여인이 아니야.”
그가 품에서 부스럭거리는 포스터를 꺼내어 내밀었다.
“극단 소속의 배우였더군.”
구겨지고 색이 바랜 포스터 위로, 사람이 직접 그린 듯한 조잡한 그림과 몇 마디 홍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서툰 글을 보거나 겨우 형태나 알아볼 법한 그림 실력을 보니, 전문적인 극단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거리에서 서민들을 상대로 길거리 공연을 하는 극단이다.”
“…….”
“특이한 점이 있다면, 원래부터 극단이었던 것이 아니라 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더군.”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서툰 포스터를 훑던 도로테아가 그제야 루크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왜 필요한데?”
“단원들의 입이 무거워서 단서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실마리를 잡아야 그들을 제대로 심문할 수 있을 테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뚝뚝한 황자를 바라보는 도로테아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합법적인 수사야?”
“조건부다.”
“어떤 조건?”
“폐하께서는 내가 널 로헨 왕국의 사절단 응대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면, 조사를 계속하라고 허락하셨다.”
로헨 왕국이라.
티파티에서 언급된 것까지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는 이야기다.
아마 며칠째 저택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것도 다 로헨 왕국 때문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도로테아는 줄곧 바쁘게 황궁으로 불려 다닌 가문의 어른들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끝끝내 거절하면, 이번 수사도 불법이 되는 거겠네?”
“…….”
“별문제 없다면 나도 같이 노는 게 싫진 않아. 그렇지만 아빠가 지난번 외출 이후로 걱정이 많아지셨거든. 그리고 누굴 응대하고 접대하는 일은 나하고 맞질 않아서.”
“최대한 귀찮은 일 없도록 배려하지. 황자인 내게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일 거다.”
루크의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한 도로테아가 흠, 하고 가볍게 뜸을 들였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지난날 그가 주었던 도움과는 별개로, 이번 일에는 대가를 비싸게 지불하겠다는 의미였다.
도로테아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이 오고 가는 사이 마차는 ‘극단’이라 부르기 초라할 정도로 남루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 * *
경계하는 눈초리로 일행들을 맞이한 여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파티마의 방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보여 드릴 수는 있지만, 별건 없는데요.”
극단의 단원 중 하나라는 여인은 쭈뼛거리며 일행들을 안내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도로테아는 주변을 훑었다.
좁은 복도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단원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헌 옷을 기워 입은 아이들이 주눅 든 채 건물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낯선 이의 방문이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곳이에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그 애는 벌써 2주째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문이 열리자 마찬가지로 좁고 단출한 방이 나타났다.
딱딱한 바닥에 깔려 있는 모포 두 개가 전부인 좁은 방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물었다.
부러진 펜촉. 굳은 기름 덩어리. 이미 녹슨 지 오래인 촛대까지.
다른 이들에게는 쓰레기로 보일 법한 것들이 방에 있는 전부였다.
루크는 방을 훑는 와중에 그나마 눈에 띄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두꺼운 교리본은 누군가 자주 들춰 본 듯 새까만 손때와 함께 색이 바래고 겉가죽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교리본이라. 이 방의 주인이 신실한 신도였던가?”
“그건 아마 글을 익히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걸 거예요. 유일하게 이곳에서 글자가 쓰여 있는 물건이니까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제법 긴장을 놓은 것인지 그녀는 묻는 말 외의 정보 또한 술술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하는 태도가 살가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도 족했다.
“이곳이 원래 보육원이었다는 말은 들으셨을 거예요. 여긴 오래전 가뭄과 역병이 한꺼번에 돌아 집집마다 생겨난 고아들을 거두었던 곳이었죠.”
그녀가 회상하듯 말을 꺼냈다.
거리마다 쏟아지는 고아들에게 이 초라하고 낡은 건물은 열악할지언정 추운 바람을 막아 주고 위협 없이 잠에 들게 해 주는 고마운 장소였겠지.
“후원해 주던 어른들은 가뭄이 길어지자 하나둘씩 손을 뗐고, 이윽고 이곳을 운영하던 남자가 도망가면서 아이들만 남게 되었지요. 그리고 남은 아이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나와 구걸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하던 행동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이윽고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공연이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비웃음과 동정, 연민 속에서 꿋꿋이 버텨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극단이었다.
마치 동화를 들려주듯 잔혹한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뒤로 호기심 많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극단에 속한 아이들의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아주 어린 아이부터, 완연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인물까지.
줄곧 아무 말이 없던 도로테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없나요?”
“네?”
“이 건물에서 세상을 떠나거나, 혹은 이 근처에서 죽은 사람은 없냐고요.”
엉뚱한 질문에 안내해 준 여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훑었다.
아름다운 귀족 영애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닌데.
하긴, 애초에 고급스런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가 이곳의 문턱을 넘은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귀족들은 이곳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경멸하고 혐오의 시선을 보내기에도 바빠야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분’을 제외한다면…….
“어째서일까. 죽은 자가 많은 장소라면 대개 있기 마련인 ‘원귀’가 보이질 않는 것은.”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토록 깨끗한데 묘하게 흐르는 기운은 탁하고 말이지.”
안내해 준 여자의 얼굴에 꺼림칙한 기색이 나타난 순간 루크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쩔그렁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반색하고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 교리본은 내가 가져가지. 이 방은 파티마라는 여인이 홀로 써 왔던 건가?”
“아뇨, 미네가 함께 써요. 아마 교리본도 그 때문에 가져갔을 거예요. 어린 미네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고요.”
이름을 불린 아이가 문가를 맴돌다 후다닥 달아났다.
루크의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재빠르게 아이를 달랑 들어 올렸다.
놀라 굳은 아이의 얼굴은 제법 귀여웠다.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뺨을 본 루크가 손수건으로 거칠게 아이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 방의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고 있나?”
아이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닫아 버렸다.
“그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해요.”
조심스러운 여인의 설명이 뒤따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올 때부터 그랬어요. 말을 알아듣긴 하는 것 같은데 목을 다친 탓인지…….”
아이의 영민한 눈동자가 도로테아를 담았다.
눈동자에 거울처럼 비친 자신을 보며 도로테아가 미소 지었다.
교리본을 손에 든 채 훑어본 루크가 이제 자신의 질문은 모두 끝났다는 듯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 방 주인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나, 그게 아니더라도 사건과 관련 있을 법한 것들을 찾을 수 있겠나.”
“우선…….”
도로테아는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무려 황자가 ‘빚’을 언급하면서까지 데려왔으니 나름대로 활약을 하면 좋겠지만 상황이 난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기척도’ 없는 건물이라니.
이들의 얽힌 사연과 건물의 역사만 보더라도 귀가 득시글거려야 옳은데.
루크뿐만 아니라 안내인과 숨어서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까지 모조리 도로테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숨죽여 기다렸다.
그 순간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영롱한 종소리가 들리자 기사들의 손에서 발버둥 쳐 빠져나온 미네가 재빠르게 어딘가로 향했다.
“그,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예요. 하루 한 끼 배식되는 것이 전부라, 놓치면 안 되기에 다들…….”
“아.”
도로테아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뱉었다.
오늘따라 음영이 짙은 남색 눈동자가 루크를 향했다.
“식당에 단서가 있는 것 같아.”
눈썹이 꿈틀, 위로 올라간 루크가 식당으로 향하는 도로테아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곳에 진짜 단서가 있기를 빌어야 할 거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던데. 먹고 나면 무엇이든 생각나겠지.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태평했다.
* * *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간 순간, 도로테아와 일행들은 ‘극단’에 속한 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
“대자앙―.”
개중에서도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아이들이 누군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이라 불린 청년은 저를 향해 반가워 달려드는 아이들을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았지만, 매의 눈을 하고서 새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골라냈다.
능숙하게 지시를 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곳의 책임자임이 틀림없었다.
“이건 뭐…….”
기계적으로 배식을 이어 나가던 그의 눈이 어디서 났는지 다른 이들의 배는 될 법한 커다란 그릇을 들고 온 도로테아 와 마주쳤다.
백금발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는 고급스런 드레스를 입고서 이곳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손에 든 무식하게 커다란 그릇을 제외한다면, 누가 봐도 완벽한 귀족 영애의 모습을 갖춘 채로.
멍하니 그녀를 마주한 남자의 갈색 눈동자에 조금씩 적의가 들어찼다.
쪼르르 달려 온 미네가, 그녀의 그릇에 딱딱한 검은색 빵을 넣어 주었다. 익숙한 냄새와 형태를 갖춘 음식을 내려다본 도로테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오랜만이네, 우리.”
“……나를 압니까?
퉁명스런 남자의 얼굴로 몇 년 전 그녀에게 똑같은 빵을 건네던 거리의 소년이 겹쳐졌다.
자신을 ‘레번’이라 소개하며 제 패거리가 되길 종용하던 소년은 어느새 이 구역의 대장이 되어 수많은 극단원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봐. 식당으로 가면 단서가 있다고 했지.”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루크를 바라보았다.
“저기 봐. 네 손으로 치안대에 잡아 넘겼던 아이가 저렇게 컸어.”
마치 제 손으로 키운 아이라도 되는 양 뿌듯함을 담은 말에 루크의 무심한 시선이 청년을 훑었다. 그는 과거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상대 또한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눈썹을 위로 올리고는 주춤했다.
“뭐, 뭡니까?”
“잘 컸다 싶어서.”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청년을 보는 도로테아의 눈에 흐뭇함이 깃들었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골목에서 칼 맞고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살아남았구나. 목숨 줄이 질긴 것을 보아하니 전생에 공덕을 쌓은 모양이야.”
“…….”
미친년인가.
당황한 레번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렸다.
도로테아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식사는?”
옛정이 있으니 맛있는 것으로 엄선하여 듬뿍 먹을 수 있겠다는 계산속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