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8화
로헨 왕국의 사절단이 당도를 하거나 말거나, 그들이 도로테아를 만나 보고 싶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보내거나 말거나.
그런 것들은 그녀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현재 도로테아가 가장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상태로 남은 살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여 또 외출하여 황자 놈의 꼬임에 넘어가 엉뚱한 곳을 방문하게 될까, 다들 연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숙모, 차가 비었어요.”
“그, 렇구나.”
벌써 차 세 잔, 케이크 두 조각, 스콘 세 조각에 주스 한 잔과 곡물을 갈아 만든 고소한 음료까지 섭취한 다이애나의 얼굴이 몹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배는 진즉 빵빵하게 찼지만, 다이애나보다도 더 열심히 간식을 공략했던 도로테아는 처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티타임을 끝내자는 말에 다이애나가 굳었다.
오전 내내 손녀를 상대한 후작 부인이 피로감에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아들들은 어제 내내 그녀를 상대하다 뻗은 상태였다.
집안 식구들의 감시에 하나하나 각개 격파를 시작한 도로테아는 사흘 만에 벌써 절반을 침대에 묶어 두었다.
여기서 저까지 더해지면 식구들의 과반수가 도로테아에게 항복하게 되는 셈.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이성과 달리 다이애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차가 이미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 단내가 입안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소리 없이 절규하는 그녀의 앞에 나타난 에이든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쭉 폈다.
“테아야, 이 막내 외숙부가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어떠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를 그에게 보냈지만 에이든이 도로테아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조카와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선 에이든은 반나절은커녕 몇 시간 만에 넓은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누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장렬하게 외쳤다.
“내 시야를 벗어나려거든, 나를 밟고 가야 할 것이다! 꾸억!”
사뿐하게 발을 올린 도로테아가 그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인 벤이었다.
“테아야.”
주춤한 소녀의 눈이 팔짱을 낀 채 벤의 옆에 서서 버티고 있는 우드에게로 향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가 그를 이곳에 데려와 도로테아의 앞을 막아서도록 종용했는지 뻔했다.
나름대로 기를 쓰고 생각해 낸 방법이, 고작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라니.
‘어리석기는.’
그녀가 벤에게 약한 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자신이 하고자 마음먹은 일을 관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 누구도 모르게 이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마찬가지로, 그녀가 진심으로 마음먹었더라면 치안대 따위에 붙잡히지 않고 조용히 돌아올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사람들에게 슬쩍 모습을 보인 건 이제 적절한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아빠.”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황자님을 밖에서 만나 뵙는 것은…….”
제법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벤의 앞에 도로테아가 내민 것은 분홍빛이 감도는 고급스런 문양의 초청장이었다.
“이것은……?”
“무도회장에서 만난 영애가 보내온 거예요. 티파티를 여는데 저를 초대하겠대요.”
“……!”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다들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야 당연히 그녀라면 살인 사건 현장이나 황자를 찾으러 갈 거라고 여겼으니까.
벙찐 표정의 벤이 여전히 경계심이 조금 남아 있는 눈으로 유심히 초청장을 살폈다.
가장 아래에 찍혀 있는 인장은 물론이고 고급스런 종이에 쓰인 정갈한 글씨는 아마 영애 본인이 적은 듯 단정하고 유려했다.
친애하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양에게
무도회 당일 그녀와 나누었던 짤막한 인사가 못내 아쉽다며, 괜찮다면 티파티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
‘우리 아이에게도 이런 날이.’
하필 저택의 또래가 사내아이들뿐이라 줄곧 또래 영애들과 어울리길 바랐던 아버지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옆에 있던 우드가 미심쩍은 눈으로 초청장을 받아 몇 번이고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결국 흠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는 못내 찜찜한 눈을 하고서 어딘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도로테아를 훑었다.
“제가 참석하겠단 답신을 보냈더니 고맙게도 제르망 자작께서 직접 마차를 보내 주시겠대요. 그리고 행사가 끝날 때 즈음에도 직접 배웅해 주실 거라고 하셨어요.”
덧붙인 도로테아의 말에 벤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의심을 털어 버렸다.
그러고는 딸아이의 첫 동성 친구가 생길 기회를 진실로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제르망 자작이라. 신의 있는 인물이지.”
대대로 유서 깊은 집안에 이번 대의 자작 또한 평이 나쁘지 않았다.
수완이 좋아 사업에도 두각을 드러낼 뿐 아니라, 영지민들에게도 제법 선망이 높다 들은 적 있던 후작은, 마차까지 직접 보내오겠다는 상대의 성의에 도로테아의 외출을 시원하게 허락했다.
* * *
티파티가 열리는 온실은 신경 써서 꾸민 티가 역력했다.
관리하기 까다로운 꽃과 나무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훌륭한 풍경을 자아냈다.
그 한구석에 놓인 고풍스런 테이블에 둘러앉은 소녀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기대 어린 눈길을 던졌다.
“이리 오세요, 영애. 환영해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는 소녀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고동빛 눈을 갖고 있어, 또래에 비해 묘하게 어른스럽고 다정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로테아는 체리 케이크가 맛있었던 테이블에서 말을 걸어왔던 소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상대의 인사에 화답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발레리의 우아한 응대에 도로테아가 미소 지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도로테아에게로 쏠렸다.
그녀의 옷부터 하고 있는 액세서리, 들고 있는 파우치와 머리 스타일, 안색까지 꼼꼼하고 예리한 시선들이 도로테아를 조각조각 해부했다.
그녀가 테이블로 더 가까이 다가서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렀다.
도로테아는 조금 전까지 제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제 뒤로 쏠리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프리드. 가서 쉬어도 좋아.”
인형같이 아름다운 기사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고집스레 그 자리를 지켰다.
짙은 속눈썹이 드리워진 푸른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청량한 동시에 겨울 호수처럼 쉬이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미안해요. 제 호위가 고집이 좀 센 편이라. 혹시 불편하지 않다면 이곳에 있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드물게도 예의에 어긋나게 상대를 빤히 보고 있던 발레리가 빠르게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러고는 기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것이 거짓인 것처럼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잠시 멈췄던 대화를 다시 열었다.
프리드에게 쏠려 있던 영애들의 관심은 발레리의 능숙한 진행에 다시 대화로 녹아들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들이 요즘 저택에서 무엇을 배우기 시작했는지, 황도에서 어떤 것이 유행하고 있는지, 그 외에도 귀족들 사이에 도는 가십들 몇 가지를 화제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곧 로헨 왕국의 사절단이 제국을 찾는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2황자께서 사절단을 접대하실 예정이래요. 황태후 폐하의 신임을 받으시는 분이니까요.”
“사절단에서 도로테아 양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던대요.”
당사자인 도로테아는 처음 듣는 소식이라는 듯 차를 마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들 가운데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듣자 하니 로헨 왕국 사람들은 거칠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던데요. 무례하고 막무가내라고요.”
“서신에 콕 집어 도로테아 양이 함께해 주시길 바란다고 언급했다면서요.”
시선들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몇몇은 슬쩍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몇몇은 걱정스러운 눈을, 또 몇몇은 그저 궁금한 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치가 없는 영애도 있었다.
“걱정하실 필요야 없죠! 도로테아 양에게는 7황자 전하가 계시잖아요.”
밝은 노란빛이 도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도로테아를 보고 있었다.
꼭 동화책 속에 나오는 공주를 동경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루크가 여기서 나올 줄이야.
통통한 볼을 가진 영애의 머릿속에서 루크는 공주님을 지키는 멋진 왕자 따위가 되는 거겠지.
그리고 그 눈치 없는 말에 심기가 상한 인물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대화에 줄곧 참여하던 영애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날카로운 눈매의 예쁘장한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몹시 신경 쓴 느낌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 7황자 전하가 언급되는 거죠?”
심기 불편한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한 노란 드레스의 영애가 슬쩍 눈을 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로테아 양이 곤란할 때마다, 전하께서 나서서 도와주셨으니까요.”
“눈앞의 부모 없이 길 잃은 아이를 돕는 것은 황자로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사절단의 앞에서 일개 귀족 영애를 감싸기 위해 황자께서 나서시는 건 다른 이야기죠.”
좌중이 조용해졌다.
도로테아가 후작가로 어떻게 찾아가게 되었는지, 7황자와 맺은 인연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아마 이곳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대놓고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적선을 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달랐다.
그건 도로테아의 ‘옛 과거와 출신’을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니까.
씨근거리던 영애가 잘못한 것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황자 전하를 향한 모독이에요. 제가 아는 그분이라면 제국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실 분이라고요.”
다들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보는 사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발레리가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네요. 7황자 전하의 애국심은 확실히 대단하시죠.”
줄곧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듣기만 하고 있던 도로테아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어느새 빈 접시를 슬쩍 앞으로 밀어내며 덧붙였다.
“그분이라면 제가 곤란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실 거예요.”
의기양양해진 영애가 어깨를 으쓱이며 애써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아닌 척 붙잡았다.
다들 대놓고 자신을 폄하한 말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넘기는 도로테아를 보고 놀란 듯했다.
“물론, 도로테아 양이 애초에 곤란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다 가정일 뿐이죠.”
도로테아는 마치 병 주고 약이라도 주는 양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뱉는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변의 영애들이 난처한 얼굴을 한 채 눈치를 보는 것으로 봐서는 위세 높은 가문의 영애인 듯했다.
그러나 저 얼굴을 에드윈의 무도회에서 본 기억은 없었다.
아마도 후작가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거나, 다른 파벌에 속하는 가문의 영애가 아닐까.
‘딱히 루크의 팬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전장의 악귀라 불리는 제국의 영웅을 향한 영애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갈래로 나뉜다.
충성스럽고 용맹한 황자를 흠모하는 부류와, 살인귀(殺人鬼)인 그의 위압감에 짓눌려 두려워하는 부류.
물론 사람을 베고 다닌 그를 두려워하고 야만인이라며 혐오하는 영애들이 더 많았다.
말투에 실린 어감을 봤을 때, 그녀는 딱히 루크를 위해 나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이 자리에서 도로테아가 지나치게 주목받는 상황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짐작한 바가 맞아떨어진 듯 한 번 열리기 시작한 입이 점차 가벼워졌다.
“그나저나 도로테아 양이 하고 계신 목걸이는 드레스와 좀 어울리지 않으신 것 같네요.”
도로테아는 제 목에 걸린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보아하니 목걸이 줄도 색이 바랜데다, 디자인 자체도 너무 단조롭고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산형…….”
“미안하지만 양산형은 아니야.”
우쭐한 여자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에 누군가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에 다들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실 땅을 밟는 군화의 묵직한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모습을 드러낸 7황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영애들을 훑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 목걸이는 어머니께서 내게 남겨 주신 것이다. 내가 하이클레어 영애와 만나게 된 인연으로 건넨 선물이지.”
“아…….”
좌중을 훑던 황자의 눈이 마지막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영애에게서 멈췄다.
짐승 같은 날것의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전장에서 머물다 보니 황도의 샌님들은 시시하다고 여겼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군.”
오만한 눈동자를 마주한 채 그녀는 질린 얼굴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
느릿한 목소리가 사형 선고를 내렸다.
“감히 신전과 황족을 동시에 모욕하고 후작가의 금지옥엽을 향해 침을 뱉을 수 있는 영애가 있었다니. 참 대단한 인물 아닌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로테아를 향해 시비를 걸었던 영애가 그대로 자리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어린 영애를 몰아붙이고도 황자의 냉랭한 눈에는 연민이나 죄책감 한 점 비치지 않았다.
‘저건 왜 또 여기까지 와서 깽판일까.’
입맛 떨어지게.
황자가 오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도로테아는 막 비운 두 번째 접시를 밀어낸 후 천천히 세 번째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