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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47)화 (47/242)
  • 혼술사 도로테아 47화

    착잡한 얼굴의 황제를 앞에 두고도 후작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제가 없는 사이 저택으로 쳐들어와 멋대로 손녀를 빼내어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살해 현장이자, 한참 영업 중인 환락 업소를 방문한 황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도로테아는 결국 들고 있던 카드를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손녀의 부름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후작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사이 황제가 나지막하게 간수를 향해 지시했다.

    “황자를 풀어 주거라.”

    감금되어 있던 황자는 황제의 곁에, 도로테아는 후작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각자 보호해야 할 이들을 데리고 서로를 외면한 채 인사도 없이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야 그렇겠지. 둘 다 언성 높여 봤자 서로 얼굴에 침 뱉기일 텐데.”

    그도 그럴 것이, 몰래 후작 영애를 끌어들여 한밤중에 살해 현장으로 데려간 황자나, 그런 황자를 쫓아 환락 업소까지 찾아 들어간 후작 영애나.

    둘 다 규율을 지키기는커녕 사회적 체면과 평판조차 개나 주라고 내던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끗발이 있으니 다행이지.”

    제국에서 검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가와 황실이 힘을 합치니, 어마어마한 추문도 말 한마디 나오지 않게 덮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누가 됐건 이 사건을 입에 올리는 순간 후작은 물론이요, 황실과도 척을 지게 될 텐데.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매번 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높은 신분을 지니신 귀족 자제님들을 연행해야 했던 치안대의 병사가 지친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분 모두, 제발…… 더 이상 이곳에 안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절절한 진심에 주변에 있던 동료들의 분위기까지 숙연해졌다.

    그 시각, 하나뿐인 딸아이의 일탈을 몹시 염려하고 있는 벤의 바람 또한 그들과 비슷했다.

    “테아야, 이 아버지는 정말이지…….”

    너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구나.

    몹시 곤란한 얼굴로, 근심 가득한 눈을 한 아버지를 보는 도로테아는 모호한 미소를 띤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먹고 있던 과일 한 조각을 벤의 입에 쏙 넣어 주었을 뿐이다.

    “음, 고맙구나.”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얼굴에 가득 쓰여 있었다.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도로테아는 굳이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든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맹세로 상대를 실망하게 하느니,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기대가 허물어지는 순간 무너지는 것은 그 기대뿐만이 아니라 상대를 향해 주었던 자신의 마음 전부이므로.

    “요즘 들어 부쩍 외출이 잦아진 이유가 달리 있는 거니?”

    머뭇거리며 꺼낸 물음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5년 전, 이 저택으로 스며들었던 누군가의 치밀한 악의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독을 쓴 이들은 자결했고, 독을 취급한 상단은 자멸했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꼬리를 감췄다.

    그러나 상대는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몸을 낮추었을 뿐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가문을 노려 온 거야.’

    콜린의 기억을 뒤적여, 엘렌의 죽음에서조차 수상한 자들의 손길이 닿아 있을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

    그녀의 상대는 몹시도 인내심이 뛰어나고, 흔적을 지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며, 대낮부터 살인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태연히 덮을 수 있을 만큼의 뒷배를 지닌 자들이었다.

    그리고 더하여 금술에 손을 댄 자들이고.

    검은 불꽃 아래 영혼이 타들어 가던 헤르티아의 최후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로지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그녀만을 위한 그들의 경고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이매망량이 얽혀 있다고 말한들 믿어 줄 리 없지.’

    설령 믿는다 하여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차피 자신과 같은 풍경을 볼 수도 없을진대.

    “자, 이것도 먹으련?”

    그녀에게 과일 조각을 내미는 손이 몹시도 거칠었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죽은 아내의 가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한 남자는 뒤늦게 잡은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이곳에 녹아들기까지 그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그런 사랑을 처음으로 받아 보았다.

    받고서야 비로소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당신도, 그리고 당신과 나를 받아 준 이곳도.’

    누군가의 손에 망가지도록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아빠.”

    도로테아의 입에서 어린아이나 쓸 법한 유치한 호칭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딸아이의 부름에 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서렸다.

    입꼬리에 잔잔한 미소를 매단 도로테아는 언제나처럼 맥락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문제없이.”

    한 치의 불안도 보이지 않는 딸아이의 눈을 들여다본 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고말고.”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한들 그녀가 위험해지도록 둘 생각도 없었고.

    벤은 늘 그러했듯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   *   *

    “싫습니다. 우리 테아는 안 됩니다.”

    “…….”

    딱 잘라 이야기하는 후작을 노려보던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황제는 만백성의 어버이라 했던가.

    제가 낳은 자식새끼만 웬수인 줄 알았더니, 평생 속 한 번 썩일 일 없으리라 믿고 아꼈던 충신이자 친우 또한 웬수가 따로 없었다.

    “잘 듣게. 스승도 없는 데다, 따로 정령석을 구해 의식을 치른 적도 없는데 자연적으로 발현한 능력일세. 그 아이는 제국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꼽을 만한 인재야.”

    “제 손녀가 잘난 것은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압니다.”

    “경도 알지 않나. 제국의 인재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를 위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걸세. 심지어 그 아이는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귀족의 영애야.”

    마냥 하고 싶은 것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황제의 명에도, 노후작은 꿋꿋했다.

    착 가라앉은 눈이 진심을 담아 한평생 충성해 온 주군을 향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제국을 위해. 그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방식이라 믿었기에.

    “폐하, 지금껏 제 평생을 오로지 제국의 평화와 안정만을 위해 바쳐 왔습니다.”

    “…….”

    “그렇게 살아오느라 제 새끼들을 한 번 보듬어 주지도 못했고, 또 원칙을 지키려 벼랑 끝에 선 새끼를 밀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제 막내딸의 끝이 어땠는지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회한 가득한 목소리가 고요한 회랑을 울렸다.

    후회와 죄책감이 켜켜이 쌓인 주름진 얼굴을 마주한 황제가 침묵했다.

    두 사람 모두, 지난날의 공공연한 혼담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대로 충성을 맹세한 후작 가문의 막내딸과 언젠가 옥좌에 오르게 될 황태자의 결합.

    황제는 당시 어린 후계자에게 강력한 뒷배를 쥐여 주려 했고,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검가인 하이클레어 후작가는 그 상대로 안성맞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담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기 전에 후작 영애가 자취를 감추었다.

    후작이 그때 그 남루한 상인을, 지금의 벤을 그녀의 짝으로 인정했더라면.

    굳건하던 황실과 후작가의 관계에 틈이 생겼을 테고, 그들을 따르던 가신과 휘하의 황족파 귀족들마저도 흔들렸겠지.

    제국의 중추를 받치는 후작가의 가주로서, 황제의 노여움을 피하고 가문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아끼던 딸을 냉정하게 내쳐야만 했다.

    행여 연락을 지속했다가 더 큰 불벼락을 맞을까 고집스럽게도 끝끝내 외면한 끝에 남은 것이라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자식을 향한 그리움뿐이었다.

    주름진 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툭, 물음을 던졌다.

    “짐을…… 아니, 나를 원망하나?”

    “제 선택을 후회한 적은 있으나, 폐하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는 후작의 눈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다만 이 제국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황실의 체면을 위해 딸아이를 저버린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

    “다시 후회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애가 원하지 않으면, 저는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단단히 결심한 듯 굳은 얼굴의 후작을 본 황제가 한숨을 삼켰다.

    명분으로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최소한 인정에 매달려 보기라도 해야 할 텐데.

    아들놈이 친 사고 때문에 그조차도 어렵게 되었다.

    한때 도로테아를 구해 주었던 황자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그녀를 데리고 매춘이 벌어지는 장소로 데려갔을 뿐 아니라, 현장을 덮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까지 받았다 들었다.

    ‘몰래 데려갈 거면 차라리 좋은 데를 갈 것이지.’

    뭐 좋은 꼴이라고 가서 잡아낸 것도 하필 불법 매춘 영업이라니.

    ‘게다가…….’

    황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방적으로 7황자를 수사에서 제외했던 또 다른 사정도 그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두통을 가라앉히려 고개를 가볍게 흔든 황제가 협상을 시도했다.

    “그 애가 원한다면 되도록 대외적인 곳에 내보낼 생각은 없네. 그러나 이번 사절단은…….”

    “로헨 왕국 따위가 뭐라고 감히 우리 테아를 만나겠답시고 치근거린다는 겁니까. 폐하, 저는 우리 아가를 외국으로 시집은커녕 유학도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천년만년 품에 끼고 살다 알아서 좋은 혼처 찾아 주리라는 후작의 굳은 얼굴을 보는 황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 꼴통 같은 인간이.

    “아, 그럼 들키질 않았어야지 않은가!”

    점잖게 내리깔았던 황제의 목소리가 빽, 하고 올라갔다.

    “수많은 귀족이 모인 무도회가 한창일 무렵, 영애가 뛰쳐나가 시체를 발견한 것도 문제지만, 영애가 사교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다들 주목하기 시작했네!”

    이제까지야 건강을 핑계 삼아 줄곧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괜찮았을지 몰라도, 이미 도로테아가 멀쩡하다는 것을 만인이 목격한 상태였다.

    “거기다 치안대가 어디 놀이터라도 되는 양, 왜 밥 먹듯 거기를 들락날락하느냔 말일세!”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숨을 고른 황제가 말을 이었다.

    “로헨 왕국에서는 이미 후작 영애의 건강 상태가 진즉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네.”

    대외적으로는 황태후의 안부를 핑계로 대고 있지만 노골적으로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속내를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쪽에서 그러더군. 후작 영애와 같은 인재를 숨기는 것은 동맹국과의 ‘협정’에 어긋난다고 말이오.”

    로헨 왕국은 결코 녹록한 국가가 아니었다.

    황태후의 외가일 뿐만 아니라 우방국들 가운데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아무리 제국이어도 명분 없이 무턱대고 묵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하…….”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공방이 이어지던 그때,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우렁차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가 테아를 노리는 무도한 것들을 전부 싹 정리하겠습니다!”

    시야를 꽉 채우는 거대한 덩치의 등장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들어나 보자는 듯 심드렁하니 물었다.

    “경이 어떻게 정리를 한단 말인가?”

    에이든 하이클레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과 함께 말했다.

    “대가리를 잘라 오겠습니다.”

    황제가 후작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주 훌륭하군. 제국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천하의 악당을 길러 냈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하겠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에이든이 위협적으로 길고 커다란 창을 붕붕 휘두르며 덧붙였다.

    “사절단이건 뭐든, 우리 테아를 향해 시비 거는 놈들의 눈을 파내고 입을 찢어 버릴 겁니다.”

    “고맙군. 아무래도 제국의 평화와 안녕은 내 대에서 끝나려는 모양이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작의 장남이자, 에이든의 형인 펠릭스가 그를 후려치고 질질 끌고 나갔다.

    “폐하, 가족회의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랜 설득 끝에 후작은 마지못해 그 말을 남기고 궁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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