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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45)화 (45/242)

혼술사 도로테아 45화

“아무래도 이상해.”

데인이 불쑥 말을 꺼내자, 옆에서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에드윈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물었다.

“뭐가?”

“테아 말이야. 갑자기 너무 얌전하잖아.”

그는 창밖에서 아버지와 도란도란 나무를 심고 있는 도로테아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힐끔 쳐다본 에드윈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얌전하면 좋은 거지. 전에 임시로 치안대에 구금되었던 일 때문에 고모부가 꽤 걱정하셨던 모양이야.”

“걔가 그런 거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잖아?”

데인의 말에 에드윈이 결국 펜을 멈췄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응?”

“설령 테아가 지금 얌전해 보이는 것이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들, 네가 그걸 알아내거나 혹은 막을 수 있겠어?”

“…….”

언제나 가장 먼저 휘말리고 또 가장 자주 희생양이 되곤 하는 데인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에드윈의 말이 옳았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는 결국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말 터였다.

심각한 얼굴로 뜰을 내려다보고 있던 데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을 열고 나갔다.

모처럼 시간을 내 오붓하게 정원 가꾸기에 한참인 부녀를 만날 생각으로.

*   *   *

벤 에버리는 모처럼 저택을 찾아온 평온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변덕이 심하고 장난기가 많은 탓에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던 딸아이는, 최근 저택 밖의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가졌다가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등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의 성격상 일을 더 깊이 파고들면 어쩌나, 걱정이 깊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요 며칠 저택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게 행복이지.’

딸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취미 생활을 함께하는 이런 순간들이.

벤은 모처럼 갖게 된 부녀만의 시간이 몹시 소중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길고 아름답게 뻗은 손으로 흙을 두드리며 물었다.

“체리는 언제 열려요?”

“글쎄, 아직은 좀 더 자라야 하니 열매가 열리는 것은 몇 년 후가 아닐까?”

물음에 다정하게 답을 해 주던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두 사람이 있는 뜰을 향해 가까워졌다.

“야! 테아!”

익숙한 목소리에 거들떠보지도 않는 도로테아를 대신해 벤이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을 한 채 조카를 맞았다.

“데인, 너도 여기 와서 거들련?”

“아뇨, 됐어요. 그것보다 테아.”

“…….”

“너 왜 요즘 조용하냐? 아직 그때 그 사건 제대로 안 끝났잖아. 거기서 들고 온…….”

현장에서 몰래 증거를 들고 온 것은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 뻔한 데인이 당황해 말을 멈추자, 되레 벤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 사건이라니. 설마 아직도 그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어…….”

“테아, 그건 너무 위험해 보이는구나.”

아버지의 앞에서만큼은 순한 양의 눈을 하는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벤이 거듭 당부했다.

“무엇을 해도 괜찮지만, 그런 위험한 일에는 엮여선 안 돼. 그 일은 책임자가 잘 마무리할 게다.”

당부를 듣는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자식을 둔 아비가 다 이렇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다만 욕망 앞에서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는 아비가 있는가 하면, 눈앞의 남자처럼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감당하려 드는 헌신적인 아비 또한 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걱정하는 남자를 향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적어도 ‘제가 먼저’ 뛰어들지는 않을게요.”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딸아이를 아는 벤이 그녀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데인의 뒤로 헐레벌떡 달려온 저택의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화, 황자님께서 아가씨를 찾고 계십니다!”

그녀의 곁에서 두 남자가 굳은 사이 도로테아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형식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나.”

높낮이도 없이 무미건조한 감탄사의 뒤로 역시 전혀 놀람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 이어졌다.

“뜻밖에도 황자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네. 나는 정말 그 어떤 일에도 연관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황족이 직접 저택을 방문해서 부탁하는 일이라면…….”

거절할 수 없겠지?

말을 흐렸지만 그 뒷말이 이미 귀에 선했다.

태연한 사촌의 얼굴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고모부를 보고서야 데인은 깨달았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구만.’

합법적으로 아버지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제대로 밖을 돌아다니며 들쑤시고 다닐 수 있도록.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후작이라 하더라도 도로테아의 행동을 제어하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   *

황자의 기습 방문은 몹시 적절한 시간에 이루어졌다.

후작가에서는 초대장을 받거나 미리 방문하겠다는 예고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들이닥친 황자를 쫓아낼 수도, 그렇다고 융숭한 대접을 할 수도 없었다.

하필 황자를 상대할 만한 노후작은 입궁했고, 펠릭스는 공무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를 마중하러 나온 후작 부인이 난감한 듯 웃었다.

“황자 전하께서 저희 가문을 위해 애써 주신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사사로운 교류가 괜한 말이 오를까 걱정됩니다.”

“고작 방문 한 번 했다고 그리되진 않을 겁니다. 나는 애초에 정치적으로 입지가 있는 인물이 아니니까.”

찻잔을 내려다본 루크가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후작 부인을 향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하이클레어 가문이 황자의 눈치를 볼 정도로 형편없는 가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어 보인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는 황자 전하의 용맹함을 따라가기 버겁습니다.”

루크는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며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저는 하이클레어 영애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도로테아는…….”

“요 며칠 저택에서 칩거 중이라 들었습니다. 외출할 만한 모임도 없을 테고, 요양을 갔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상대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녀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을 일부러 맞춰 찾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후작 부인이 애써 웃으며 둘러댔다.

“아닙니다. 그 애는 지금 늦잠을 자고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오던 길에 뜰에서 나무를 심고 있던 것은 그럼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가 봅니다.”

“…….”

후작 부인이 짧은 한숨과 함께 애써 유지하고 있던 평정을 깨고 심란한 눈으로 황자를 봤다.

그녀는 결국 옆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을 시켜, 자신의 손녀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   *   *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선 도로테아의 뒤로 프리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지난번의 재회에서 잠시 움찔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는 전 주인을 향해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황자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꿀을 넣은 우유와 오믈렛을 가져다줘.”

“예.”

황자를 두고 예를 갖춰 인사하기는커녕 음식을 부탁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루크는 침묵했다.

“여기까지 들이닥친 것을 보니 아무것도 못 찾았구나?”

“네가 발견했던 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지워 버린 것처럼.”

그 흔적의 일부분을 가지고 온 도로테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꾸했다.

“그래? 안됐네.”

루크의 시선이 그의 앞에서 여유롭게 등을 기댄 채 미소 짓고 있는 소녀를 향했다.

어두운 잿빛을 띠는 그의 눈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짐승처럼 상대를 집요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의 흉포함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어떻게 그런 장치가 있다는 걸 알았지?”

“…….”

“뭘 더 알고 있나.”

아무 답 없이 눈을 내리깐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가 이내 도착한 오믈렛을 보고 기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이프가 노란 오믈렛의 가운데를 가르자, 황금빛에 가까운 오믈렛이 부드럽게 갈라지며 보들보들한 내용물이 겉으로 드러났다.

한입 가득 오믈렛을 입에 머금고 우물거리는 순간, 루크의 뒤에 시립해 있던 친위기사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흡족한 얼굴로 다음 조각을 잘라 낸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알아낸 게 전혀 없나 봐? 시체에서도 신분을 특정할 만한 뭔가가 나오지 않은 거겠지?”

“그래.”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나를 찾았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사건을 덮기 전에 단서를 찾아야 해.”

사건을 덮기 전에 단서를 찾는다, 라.

‘누군가가’ 사건을 덮기 전에 ‘자신이’ 단서를 찾아야만 이 사건을 계속 수사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또독또독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다니 빨리 움직여야겠네.”

그 말과 함께 우아한 손놀림으로 남은 오믈렛을 입에 넣자, 그녀의 조그만 입에 가득 찬 오믈렛 탓에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단서를 찾을 방법이 있나?”

꿀꺽.

입에 든 것들을 삼킨 그녀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곳으로 가면 알게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일갈하는 목소리가 문 너머로부터 날아들었다.

날카롭게 반박한 데인이 성큼성큼 들어와 도로테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호기롭게 나선 것치고는 황자와 마주한 순간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제법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는 어떻게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하이클레어 가문에서 애지중지하는 귀족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함께 동행하시는 것만으로도 반나절 만에 소문이 자자할 텐데, 심지어 살해 현장에 가시다니요?!”

“…….”

“추문이 일면 이 아이는 어찌 됩니까!”

땍땍거리는 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크가 앞에 있던 찻잔을 들었다.

이미 다 식어 빠진 차를 한번에 들이켠 그가 담담하게 뱉었다.

“살해 현장으로 소문이 났으니, 적어도 귀족들이 그 일대에 드나드는 일은 없을 거다.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치 또한 취할 생각이고.”

미리 준비해 온 듯한 어두운 계열의 후드가 그들의 앞에 놓였다.

“일반 마차를 대여했으니 주목받을 일도 없을 테고, 만일을 대비해 조사를 나갈 현장 또한 비워 두었다.”

“그건 꽤 사려 깊은 배려이시긴 합니다만…….”

데인이 떨떠름하게 황자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상식적인 데다 나름대로는 도로테아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있었던 건가.

게다가 미제로 남을지도 모르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망설임 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황자라는 지위로 찍어 누를 수도 있었을 텐데 먼저 굽히고 부탁한 걸로도 모자라, 이런 물건까지 세심하게 미리 준비해 오다니.

주춤거리며 말문을 잇지 못하는 데인을 흘끔 올려다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황자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정식으로 수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니, 불법이다.”

담담하게 말한 루크의 말에 굳어 있던 데인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도로테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놀란 기색 없이 초연했다.

“아니…… 불법이라면 발각되었을 때 도로테아만 문책당하지 않습니까?”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더듬더듬 꺼낸 데인의 말에 루크가 들고 있던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참고로 나 또한 어제부로 수사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단서를 찾아 사건을 종결하기 전에 범인을 잡아야 해. 그럼 괜찮겠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만.”

다 같이 불법을 저지르자는 말을 태연하게 하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아.

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후작가를 방문한 황자의 차림새가 유독 수수하고 뒤에 선 호위들도 무언가를 감추듯 평소와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의 말에 뒤를 돌아본 데인이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오믈렛과 우유까지 모두 다 비운 도로테아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저런 눈을 하고 있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한 번도 제대로 막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언제나 그래 왔듯 그녀의 기행에 휩쓸리게 될 것이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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