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4화
데인은 이틀이 지나고서야 겨우 치안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라 혈기가 넘치는 모양인데, 영식이 한 일은 아주 중대한 범죄로도 볼 수 있네.”
후문을 때려 부순 것이야 가산을 훼손한 것에 불과하지만, 보초들을 때려눕힌 것이나 마차에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 길 가던 아이를 붙잡고 공갈 협박을 한 건 빼도 박도 못 했다.
“알겠나?!”
깐깐한 치안 대장이 피를 토하듯 늘어놓은 잔소리를,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부터 석양이 질 무렵까지 듣고 나온 그의 피부에 닿는 바깥 공기는 서늘했다.
어두운 지하에서 나왔으니 햇살 정도는 밝게 내리쬐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오늘따라 밤하늘에는 별조차 드물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데인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왜 별 하나 안 뜨냐. 안 그래도 막 나온 사람 기분 잡치게.”
터벅터벅 걷는 그의 앞으로 불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코를 쥐게 만들 만큼 강한 구린내를 풍기는 하얀 덩어리를 본 그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원래 저런 데 들어갔다 나오면 먹는 거야. 과거를 하얗게 비우고 새사람이 되라고.”
“…….”
치즈 한 덩어리를 내민 도로테아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는 한숨과 함께 진지하게 치즈 덩어리를 내밀고 있는 사촌에게서 치즈를 받아 한 입 와앙, 베어 물었다. 혀끝을 강타하는 짠맛과 구릿한 냄새가 뒤섞였다.
그가 올라탄 마차에는 이미 우드와 프리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뭡니까. 우드 경도 절 마중 나왔어요?”
착잡한 얼굴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그의 말에 눈을 끔뻑이던 데인이 고개를 홱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의뭉스런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살짝 아래로 깐 채 얌전히 요조숙녀 흉내를 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그가 창밖을 확인하고 조용히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전에 다녀온 살해 현장.”
“…….”
막 지하의 임시 구금장에서 나온 데인이 뻣뻣한 목을 애써 도로테아에게로 돌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듯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사촌을 보니 울컥하고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야, 마차 세워.”
그러나 그녀가 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가 섰다.
어느새 일행은 술집에 도착해 있었다.
* * *
이러니저러니 투덜거리면서도 데인은 결국 도로테아의 뒤를 따라 다시 한번 익숙한 문 앞에 섰다.
닫힌 문 너머의 풍경을 떠올린 그가 진저리쳤다.
“여긴 대체 왜 다시 온 거냐고?!”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위해서.”
평온하고 침착한 얼굴로 답한 도로테아가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그녀 곁에서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던 호위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 긴장을 늦췄다.
“…….”
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구의 사체는 물론이고, 피에 물든 카펫과 방을 채우고 있던 가구들, 자잘한 물건들, 심지어는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 한 조각도 남은 것이 없었다.
“도, 도둑이 들었나?”
데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자 우드가 차분한 얼굴로 비교적 상식적인 말을 건넸다.
“조사를 위해 가져갔을 게다. 이 방에서는 살인이 두 건이나 일어나지 않았더냐.”
“아…….”
멍청한 표정의 데인을 지나친 도로테아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들었냐? 아무것도 없다잖아. 허탕이야. 그냥 돌아가자.”
글쎄, 저들이 가져간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이 이 방 안에 남아 있다.
사신이 다녀간 흔적이 사라질 즈음, 누군가 죽은 현장을 채우는 것은 죽음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부유령들이다.
끊임없이 혼의 허기에 시달리는 실체 없는 이들은 죽음을 쫓아 승냥이처럼 사신이 지나간 자리로 이리저리 모여드는데, 때로는 괜찮은 기록자가 되어 주기도 했다.
새하얀 방을 분주히 돌아다니던 도로테아의 걸음이 어느 순간 멈춰 섰다.
푸른빛에 짙은 어둠을 더한 남색 눈동자가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살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얼룩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분절된 신음 소리가 연이어 귀를 울렸다.
“…….”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과 쓰러진 남자.
죽은 남자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눈에는 애틋함이나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 보였다.
겁에 잔뜩 질린 여인이 바닥을 두드려 숨어 있던 장치를 건드리고는 열린 틈으로 물건을 꺼내어 달아나기까지.
코를 마비시킬 만큼 지독한 꽃향기와 함께 ‘기록된’ 장면은 끝났다.
“테아?”
“쉿.”
몸을 굽힌 그녀가 멀쩡한 나무 바닥 위를 더듬더니 이내 한 군데를 꾸욱 눌렀다.
놀랍게도 그 순간 바닥을 이루고 있던 널빤지 하나가 툭, 위로 올라왔다.
“숨겨진 비밀 장소 같은 건가.”
우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로테아의 품에서 쪼르르 나온 피피가 조그마한 틈으로 들어가 바닥 안쪽을 누볐다.
털에 먼지를 잔뜩 묻히고 나온 다람쥐는 그녀의 손 위에 어디선가 찢겨 나온 듯한 종이의 모서리 부분을 건네고는, 우드에게로 다가가 털을 비볐다.
“너, 이 녀석…….”
“우드, 여기 있는 판자를 완전히 들어내.”
그녀는 신기가 물어다 준 증거를 소매로 숨긴 채 반쯤 열린 틈을 가리켰다.
다가서는 우드를 보던 데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는 여기에 이런 장치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
“묻지 마라. 묻는 순간 네 무덤을 파게 될 게다.”
몹시도 회한이 깃든 목소리와 함께 그가 판자를 들어내려고 힘을 준 순간이었다.
“살해 현장을 훼손하는 건 중죄다.”
“…….”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지?”
나직한 목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줄곧 미동 없이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프리드가 멈칫했다.
허리를 굽혔던 우드가 그 자세 그대로 굳고, 데인이 슬금슬금 도로테아의 뒤로 숨었다.
좁은 문가에 서 있는 남자는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가게끔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심연의 어둠을 담은 듯한, 무심한 잿빛 눈동자가 도로테아를 담았다.
앳된 티가 남아 있었던 얼굴은 이제 완연히 성숙해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갑옷으로 가려야만 했던 왜소하고 날렵한 체구 또한 제법 건장해져서 문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오랜만의 재회임에도 두 사람 모두 마주 보는 시선에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덤덤했다.
꼭 어제도 만난 사람들처럼.
다들 얼어붙어 있는 사이 루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다.”
“내가 첫 번째 목격자인걸.”
“목격자라고 살해 현장에 멋대로 들어올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이미 청소까지 끝난 방이야. 누가 들어오든 훼손할 만한 것이 있긴 해?”
루크가 말없이 튀어나온 바닥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막 이 방의 비밀 공간을 들여다볼 예정이었다.
한밤중 몰래 살해 현장에 들어와 멋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던 도로테아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니면 찾아내지도 못 했을 거 아냐.”
“……나가.”
증거를 이미 소매 속에 감추어 둔 도로테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미련 없이 사뿐사뿐 그를 지나치는 도로테아의 뒤로 굳어 있던 프리드가 습관처럼 따라붙었다.
루크는 아무 말 없이 한때 그의 밑에 있었던 기사가 그를 지나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있지.”
문가에 선 도로테아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을 꺼냈다.
“이번 사건을 조사해야 하는 거라면, 내가 널 도와줄 수도 있어.”
“…….”
“네가 알아내기 힘들 테니까.”
무려 황자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말에 데인이 질색하며 손으로 재앙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형한 눈과 마주한 소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얘가 이래 봬도 우리 집에서는 금지옥엽이라서…… 요.”
“그래서.”
“또 철창신세를 지면 제가 연대로 혼나거든…… 요.”
“나와 무슨 상관이지?”
“건강해지긴 했는데, 아직도 가끔은 골골거리니까 그런 데서 재울 수는 없거든…… 요.”
마지막 말에 루크의 무심한 눈동자가 도로테아를 빠르게 훑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괴롭혔던 병치레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사내들에 비하면 가냘프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누가 힘자랑이라도 걸어오면 별 반격도 하지 못하고 꺾일 만큼.
입을 틀어막힌 도로테아의 말똥말똥한 눈을 보던 루크가 침묵 끝에 문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지금 나가면, 신고는 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데인이 재빠르게 답하고는 나갈 생각 없어 보이는 사촌을 어깨에 둘러멨다.
순식간에 포대 자루처럼 어깨에 걸쳐진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그와 동시에, 루크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얼어붙어 있는 거구의 남자를 향했다.
“너도 꺼져라.”
냉랭한 목소리가 그렇게 명한 순간, 데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드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우드를 두 팔로 번쩍 들었다.
체격 좋은 남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미형의 기사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성큼성큼 문을 넘어 이미 사라진 도로테아를 뒤따랐다.
마치 썰물처럼, 모두가 조용하고 신속하게 방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루크가 천천히 걸음을 떼 도로테아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선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로서는 그녀가 어떻게 숨겨진 공간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 * *
투덜거리는 데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저택으로 돌아온 저녁. 그녀의 방으로 손님이 날아들었다.
익숙하게 창을 넘어 들어온 인영의 은빛 눈동자가 촛불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7황자와 만났다면서.”
조각칼로 다듬은 듯 아름다운 소년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래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경계심 가득한 눈을 하고 말없이 스스로의 주변에 벽을 쳤던 인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빛을 담은 눈이 소녀를 향했다.
“데인이 투덜거리던데. 네가 그의 앞에서 말실수했다고.”
“괜찮아. 그 정도는 이해하는 사이야.”
이미 처음 만났을 때 7황자를 향해 개새끼라 욕한 전적이 있었던 도로테아가 태연히 대꾸했다.
소년, 필립은 눈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품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힌 종이를 내어놓았다.
“우선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그리고 ‘아버지’로부터의 전언.”
“…….”
“최근 잔류한 채 떠도는 영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들쑤시고 다니더라도 사신과 마주치는 건 지양하도록.”
필립의 목소리를 타고 든 잔소리가 귀에 익숙하게 박혔다.
도로테아는 언제나 그렇듯 의뭉스러운 얼굴로 잔잔하게 웃을 뿐, 전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며 받은 종이를 머리맡에 숨기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 필립이 불쑥 입을 열었다.
“테아.”
그는 자신의 부름에 고개를 든 기이한 외사촌을 바라보다 웃었다.
걱정이 된다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라든가.
그런 말들이 그녀에게는 소용없으리라는 걸 진작 알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소녀는 소년에게 구원이자 맹목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눈부신 빛이었다.
“불러 줘서 고마워.”
필요하게 여겨 줘서.
그의 말에 도로테아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테이블에 놓인 부스러진 과자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마치 심부름값이라는 듯 선심 쓰는 태도에 필립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