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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43)화 (43/242)

혼술사 도로테아 43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후작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무도회장을 벗어나는 그녀의 곁으로 프리드가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피.”

그녀의 입이 열리자 기사의 품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다람쥐가 쪼르르 튀어나왔다.

“우드에게 전해. 오늘 밤은 콜린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그녀의 눈이 진지하게 한 방향을 향했다.

누군가의 흔적을 쫓는 집요한 시선에 프리드의 눈이 도로테아가 보고 있는 허공을 향했다.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과묵한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발을 맞췄다.

‘성가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눈에 예기가 맴돌았다.

저택의 바깥에 기묘한 것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희한할 정도로 생기가 없는데도 기척을 가진 존재들.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서 그토록 생기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남긴 희미한 흔적은 그녀가 쫓기 애매한 만큼이나 교묘한 동시에 성가셨다.

‘당장은 나를 건드리지 않고 있지만.’

점차 그런 존재들이 자주 기척을 드러내는 것이 몹시 신경을 거슬렀다.

죽은 귀가 이승을 떠도는 것이라기엔, 흔히 인계를 부유하는 영들이 갖춰야 할 ‘미련’의 무게가 없었다.

미련 한 점 없이 가벼운 영이라면 진즉 성불했거나 사신의 눈에 띄어 가야 할 곳으로 끌려갔을 터. 지금 도로테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것들은 분명 다른 존재였다.

후문 옆 조그마한 쪽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녹슨 문첩이 떨어져 나가며 스르르 문이 열렸다.

프리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앞장서서 그녀의 앞을 가린 덩굴을 올려 주었다.

그를 도로테아에게 보낸 남자는 프리드로 하여금 그녀를 지키라 명했지, 막아서거나 방해하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마차를 부르자.”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즉시 밝은 빛깔의 드레스 위에 어두운 숄을 걸쳤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누런빛의 종이를 접어 프리드의 품에 넣어 주었다.

기사는 짙은 속눈썹 아래 가려진 보석 같은 눈을 내리깔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그 직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렸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행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무심한 얼굴로 한밤중 묘한 차림새를 한 남녀를 스쳐 지나갔다.

프리드가 마부에게 삯을 지불하는 사이, 옆에 서서 얌전히 기다리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기다.

그저 흔적을 쫓아왔을 뿐인데, ‘그 존재’가 여기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말을 꺼낼 새도 없이 호위를 지나쳐 눈앞에 보이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술집 특유의 시끌벅적한 풍경 속을 지나쳐 숙박객들이 머무르는 위층으로 곧장 올라갔다.

가까스로 그녀를 따라잡은 호위가 도로테아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의 등 뒤로 세웠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문 앞에 넘실거리는 사기를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 문을 밀었다.

열린 문 너머로부터 지독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그 어디에서도 맡지 못할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부패된 고깃덩이 위에 구더기가 가득했다.

그 바로 옆에,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남성의 시체가 또 한 구 남아 있었다.

각기 다른 날짜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두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호위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꼬리를 남긴 걸까, 아니면 내가 쫓는 것에 혼선을 주려는 걸까.”

또다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존재들 대신 남아 있는 시체들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를 성가시게 만들 목적으로 버려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신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체에 이끌려야 할 부유령들이 보이지 않았다.

감쪽같이 숨어 버린 존재들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던 도로테아가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집에 무사히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아.”

“……?”

뜬금없는 말에 프리드가 그녀를 바라본 순간, 뒤로 낯선 기척이 다가섰다.

영민한 기사는 재빠르게 검을 빼 들고 뒤돌아섰다.

문가에는 새파랗게 질린 데인이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보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피가 고인 웅덩이를 폴짝 뛰어넘어 그에게 다가간 도로테아가 물었다.

“날 쫓아온 거지?”

데인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애써 참아 가며 힘없이 대꾸했다.

“네가 수상하게 저택을 빠져나가니까.”

“음, 큰일 났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로테아의 얼굴에는 느긋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마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듯 여상한 얼굴과 마주한 데인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야, 지금 시체가 눈앞에 있다고!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 때가…….”

“네가 꼬리를 물고 왔어.”

도로테아와 프리드의 존재감은 숨겼다 하더라도 꼬리처럼 따라붙은 데인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고급스런 양복을 입고 돈도 지불하지 않은 채 숙박실로 향한 도련님이라니.

신고당하기 딱 좋지 않은가.

그녀의 예상이 딱 맞아떨어진 것처럼 가게 주인의 신고를 받은 치안대가 도착하여 우르르 세 사람을 둘러쌌다.

이윽고 방의 상태를 확인한 술집 주인의 높고 긴 비명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   *   *

“이곳으로 들어가시오.”

무뚝뚝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들을 낯선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좁은 철창 안에 갇히게 된 세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편의를 봐주긴 했군.”

그들의 차림새로 미루어 귀족이라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닥의 찬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딱딱하고 좁은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앉은 데인이 도로테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미간에 족히 십 년은 더 늙어 보이게 하는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대체 뭘 하느라 거기 있었던 거야?”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도로테아가 몹시도 곤란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에드윈의 첫 춤이었다고. 적어도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함께해 주었어야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그가 부정이라도 타면 어쩔 거야?”

심지어 오늘은 그의 새 신부를 물색하려던 날이 아니었던가.

“너 말 잘했다.”

데인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도로테아가 저지른 일로 당한 망신 탓에 이미 마음이 상한 상태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날더러 형과 탱고를 추라고? 차라리 지난번처럼 창고에 가서 물 떠 놓고 정체 모를 춤을 추라고 해.”

“액운을 씻는 단편제였어.”

“뭐가 됐든.”

데인이 심통이 나거나 말거나 도로테아는 진심으로 에드윈에게 미안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 삶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는데, 하필이면 신부를 물색하는 자리에서 가장 빛나야 할 사람을 두고 온 셈이 되었다.

“우리 둘 다 춤을 추지 않았으니, 에드윈 혼자 덩그러니 남았을 것 아냐.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께 부탁드렸을 거야.”

얼굴 가득 안타까움을 담아 꺼낸 도로테아의 말에 데인이 코웃음 쳤다.

“할아버지도 시커먼 손자와 함께 탱고를 추시고 싶지는 않을걸. 그리고 어차피 무도회는 망했을 거다. 지금쯤 식구들 모두 널 찾으러 난리가 났을 텐데 에드윈이라고 뭐 다를까.”

“속이 허해. 무엇이라도 좀 먹었으면 좋으련만.”

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케이크와 타르트 몇 조각뿐이었다.

식사가 될 만한 육류나, 하다못해 단단한 빵이라도 누가 좀 건네주면 좋을 텐데.

도로테아의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해 보였는지 데인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그러게 왜 밖에 나와서 이 고생이냐고.”

숄을 단단히 동여맨 도로테아를 보자 마음이 약해졌는지, 이내 위로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어차피 가족들이 곧 널 찾아서…….”

“테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세 사람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아주 익숙한 인영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테아, 네가 맞느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부름에 데인이 혀를 내둘렀다.

식구들의 유난을 고려했을 때, 그의 서신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출발했으리라 대강 예상은 했지만 이제 겨우 엉덩이를 붙인 지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할아버지.”

짧은 시간 만에 꼬질꼬질해진 손녀의 얼굴을 본 후작이 대노하여 옆에 있던 손자를 다그쳤다.

“네 이놈! 테아를 데리고 지금 뭐 하는 게야!”

“아니, 상식이 있으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얠 데리고 나왔을지, 얘가 멋대로 나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따라 나온 건지.”

데인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도로테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펠릭스가 손에 들고 있던 모포를 도로테아의 몸에 둘러 주었다.

“아버지, 당신 아들 여기 있는데요.”

그는 데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품에서 꺼낸 두툼한 장갑을 이어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손끝이 녹아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진 도로테아는 뒤이어 도착하는 외숙모와 할머니에게도 생글거리며 웃어 주었다.

더불어, 가장 늦게 도착한 에드윈에게는 선심 쓰듯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누구랑 춤춘 거야?”

“아무와도 추지 못했지, 이 사고뭉치 아가씨야.”

놀란 얼굴로 들어오던 에드윈은 도로테아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정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그렇게 갑자기 저택을 뛰쳐나가는 게 어디 있어.”

걱정스레 바라보던 다이애나가 아들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그렇게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나가면 안 되는 거야. 게다가 살해 현장이라니. 그런 끔찍한 곳을 왜 찾아갔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은 눈을 깜빡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데인에게 지그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 또한 말없이 데인에게 시선을 건넸다.

“난 얠 따라온 거라고. 다들 그렇게 쳐다보면 안 되지.”

데인이 정색했지만 이미 여러 번 도로테아를 곯리려 들었던 전적이 있는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쉽사리 거둬지지 않았다.

“우선 이것부터 먹자꾸나.”

시시비비야 어찌 되었건 다이애나는 갇힌 이들을 위해 준비해 온 요깃거리를 꺼냈다.

좁은 철창 너머로 먹음직스런 음식들을 건네받은 도로테아는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절반가량의 음식이 사라진 순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자.”

그녀가 남은 절반의 음식을 건네자 데인은 퍽 감동받은 눈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접시를 든 데인의 무릎 위로 다정하게 모포를 올려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네가 웬일이냐.”

늘 자기밖에 모르던 인간미 없던 사촌이 드디어 철이 든 건가. 내가 드디어 얠 인간으로 만든 건가.

데인이 가슴으로 묘한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던 찰나였다.

“자, 아가. 그럼 집으로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찰떡같은 대답과 함께 도로테아가 일어서자 꼭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모포를 끌어안고 음식을 먹던 데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나는?”

도로테아가 나오기 무섭게 냉정하게 닫힌 문 너머로 어머니인 다이애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짚어 주었다.

“후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을 기절할 때까지 팬 게 아들이지? 덕분에 후문이 아주 활짝 열려 있더구나. 게다가 한밤중에 마차를 타고 질주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삯을 지불하지 않아서 마부가 널 고발하기까지 했단다.”

“그건 다 테아, 쟤가!”

“테아는 후문의 보초병들이 갈비뼈가 나가도록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문을 열어 놓고 나오지도 않았어.”

개구멍을 이용할지언정.

그리고 그 구멍은 나오는 길에 꼭꼭 닫아 주었다.

“이곳까지 마차를 타고 온 정당한 값도 지불했고.”

프리드는 늘 도로테아의 기행에 끌려 다니며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준비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결정적으로, 저택으로 서신을 보낸답시고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 하나를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주먹으로 협박했다며? 그이는 네 주먹이 무서워 벌벌 떨던 아이에게 정신적 치료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단다.”

온갖 곳에 범죄의 흔적을 잔뜩 남기고 돌아다닌 아들을 자애로운 눈으로 내려다본 어머니가 생긋 웃었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건 죄가 아니지만, 네가 저지른 수많은 행동들은 범죄란다, 아들.”

“……정상 참작 안 되나요.”

이미 멀어져 가는 도로테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데인에게 에드윈이 선심 쓰듯 속삭였다.

“이따 사람을 보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

확실히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억울함이 몽글몽글 솟아난 데인이 모포로 몸을 돌돌 싸맨 뒤 우울하게 몸을 웅크렸다.

“쟨 왜 사고 치면서 쓸데없이 뒤처리가 깔끔하냐.”

늘 나만 혼나.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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