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2화
하이클레어 가문에서 주최하는 무도회 장소가 갑작스럽게 원래 예정되어 있던 별관이 아닌 야외로 바뀌었다.
참석을 요청하는 귀족들이 늘어나면서, 그 규모가 별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고된 무도회 당일, 운 좋게 초대를 받았거나 참석할 기회를 얻은 귀족들은 넓은 야외 무도회장으로 들어서며 감탄을 연발했다.
“과연 대귀족다운 면모로군요.”
“이토록 화려한 무도회는 과거에도 찾기 드물 거예요.”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후작가가 그동안 연회나 무도회를 주최하지 않은 것이 재물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분수를 중심으로 빙 둘러져 있는 테이블들 위에는 각각 다른 음식들이 색색의 조화를 뽐내며 달콤하고 고소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고, 정원에 늘어진 조경수 위로 은은한 조명이 하늘에 뜬 달처럼 발아래를 밝게 비춰 주고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훈풍이 잘 손질된 정원의 나무들로 하여금 상쾌한 공기를 뿌려 사람들의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윈 군이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직계 장손이었지요.”
“이번 무도회를 통해 대략적으로 혼담이 오갈 상대를 좁힐 거라고 들었네만. 그래서인지 후작가에서도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모양이군.”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위세가 여전하다고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요.”
달빛에 요요히 빛나는 아름다운 장식들과, 바닥에 깔린 실크 카펫. 황궁 요리사를 초청하여 만든 음식들까지.
어느 하나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긴, 후작님께서도 이제 슬슬 작위를 승계할 준비를 하셔야겠죠.”
“펠릭스 경은 사교 활동이 잦으신 편은 아니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눈이 연신 무도회장 구석구석을 훑었다.
모두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하이클레어 가문의 유일한 금지옥엽.
전쟁광이라는 7황자가 아끼고 도는 유일한 귀족 영애.
그 어떤 스승이나 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적으로 발현했다는, 희대의 천재 정령사.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은근한 눈치 싸움 속에서 삼킨 이름이 사람들의 입안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무도회를 주최한 후작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정하고 위엄 있는 차림새를 한 후작의 팔짱을 낀 채 옆을 차지한 낯선 얼굴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소녀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독특했다.
조명 덕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액세서리를 얹은 덕인지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발의 소녀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반쯤 얼굴을 덮긴 했지만, 드러난 가냘픈 몸매는 군살 없이 늘씬하면서도 보기 싫을 정도로 마르지 않았다.
그윽한 남색 눈동자는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밤바다처럼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첫선을 보이는 자리에서, 까다로운 귀족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화려하면 이목을 끄는 것을 좋아하며 허영이 있고 사치스럽다 할 테고, 단조로우면 체면과 지위를 신경 쓰지 않는 철없는 인물로 비쳤겠지.
그러나 소녀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조화롭다’라는 말이 지금 그녀에게 어울리는 절묘한 표현이었다.
그 어느 쪽에도 무게가 치우치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또래에 비해 진중한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흐뭇한 미소를 지은 후작이 팔짱을 낀 도로테아의 손을 토닥여 주며 그녀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내 손녀딸, 도로테아라고 하오.”
“그간 격조했습니다. 지난번 사냥터에서 뵈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분이 바로 소문의 아가씨로군요.”
“참으로 어여쁜 영애가 아닙니까.”
“꽁꽁 숨겨 두실 만합니다. 저라도 그러했겠습니다.”
당황한 것은 잠시였다.
저마다 옛 인연이나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현 직책 따위를 들먹이며 후작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 틈을 타 입장한 데인과 에드윈은 귀족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서 빗겨나 구석에 섰다.
도로테아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할아버지의 소개대로 필요한 말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콕스 경. 경의 사업적 수완에 대해서는 할아버님께서 여러 번 말씀 주셔서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콕스 백작을 본 데인이 질린 얼굴을 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싱긋 웃고 있는 에드윈에게 속삭였다.
“살다 보니 쟤가 다른 사람 비위를 맞추는 걸 다 보게 되네.”
“그러게.”
몰려드는 귀족들을 향해 난색을 표할 만도 하지만, 도로테아는 몇 시간이나 자리에 서서 웃는 얼굴로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소개받았다.
“잠시 쉬어도 될까요? 다리가 아파서요.”
“오냐, 오냐. 그렇게 하거라.”
후작은 내심 그녀의 체력이 걱정스러웠던지 선뜻 도로테아를 보내 주고 귀족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녀의 빈자리를 채우듯 후작 부인이 다가와 그의 옆을 지켰다.
영민한 눈을 빛내며 완벽하고 아름답게 주어진 바를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다 간단한 주전부리가 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주변에서 한창 화기애애하던 영애들은 자신들에게 빠르게 접근해 오는 도로테아의 존재를 눈치챘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눈을 반짝이며 정확히 그녀들을 향해 다가오는 백금발의 소녀를 본 영애들 중 하나가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어서 와요, 하이클레…… “
복숭아 빛 홍조가 도는 발그레한 볼을 가진 백금발의 소녀는 곧장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
그녀가 집어 든 것은 테이블 가장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체리 케이크가 올라간 접시였다.
‘저걸 혼자서?’
‘홀 케이크인데?’
혼란스러운 침묵 속에서 도로테아의 포크가 정확하게 케이크의 한가운데를 갈랐다.
‘아니, 보통은 가장 바깥쪽부터 먹지 않아?’
‘가운데를 정확하게 갈랐어.’
그녀의 포크 위로 케이크 시트와 크림, 체리까지 모두 적절한 비율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영애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체리 케이크 조각은 크림 한 점 묻는 일 없이 깔끔하게 도로테아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케이크를 한입 가득 머금은 입이 호선을 그렸다.
누군가가 꿀꺽, 소리를 냈다.
‘뭔가…….’
‘홀린 듯 보게 돼.’
신속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체리 케이크가 가진 맛을 음미하는 소녀를 홀린 듯 바라보는 영애들 사이에서 누군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소문으로만 들어 왔던 영애가 참석하셔서 진심으로 기쁘네요. 저는 발레리 제르망이라고 해요.”
“저도, 저도 너무 기뻐요. 영애를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서둘러 덧붙여 말했다.
어색한 웃음들이 각자의 얼굴에 재빠르게 걸쳐졌다.
도로테아는 눈을 내리깔고 떨떠름한 호의를 묵묵하게 받아 냈다.
그녀가 은둔해 있는 동안 저택 밖에서 어떤 말들이 나돌았을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또래의 소녀들에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그녀는 씹기 좋은 먹잇감이었겠지.
말더듬이. 머저리. 추녀.
원래 사람들의 뇌리에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오래 남는 법이다.
다들 상상 속의 그녀와 눈앞의 그녀가 달라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윽고 몇몇 영애가 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어느 한 영애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던 영애께서 오늘 이렇게 자리에 나서신 건 사촌 형제를 위해서인가요?”
반짝이는 눈빛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눈을 끔뻑이던 도로테아는 그제야 이 무도회의 목적이 ‘에드윈의 신부 찾기’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가장 주목받으며 등장했어야 할 무도회의 주인공은 도로테아에게 밀려 적당히 틈을 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드윈 영식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인가요?”
어느 한 영애가 제법 용감한 질문을 끄집어냈다.
아직 어린 치기가 불러온, 반쯤은 장난에 가까운 질문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도로테아는 제법 진지하게 질문의 답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비슷한 주제로 말이 나왔던 것도 같네.’
설령 도로테아가 이대로 계속해서 또래의 영애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외롭지 않게,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을 자신의 아내로 들이고 싶다고 했던가.
사려 깊고, 현명하며, 다정하기까지 한 자신의 외사촌.
그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은 살아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테고.”
저야 죽은 자든 산 자든 크게 상관없지만 에드윈은 살아 있는 사람을 반려로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저와 잘 맞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영애와 잘 맞는 사람이요?”
예컨대, 에드윈과 데인처럼 새벽달이 뜬 후원의 높은 바위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올릴 때 함께 나와 준다든가.
정화수를 뜨기 위해 깜깜한 밤, 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물을 얕게 떠 온다거나.
“그러려면 좋은 다리가 있어야겠지요.”
“…….”
알 수 없는 대화의 끝에 언급된 ‘다리’에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드레스에 가려진 본인들의 다리가 보일 리 없었지만 몹시도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임이 분명했다.
영애들이 모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사이, 케이크를 완파한 도로테아는 저 멀리 타르트가 놓인 곳을 향해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모여 있던 영애들이 반색을 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
그 와중에 체리 케이크가 담겨 있던 빈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애 하나가, 옆에 있던 다른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쩐지 케이크가 먹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 탓이었다.
* * *
두 번째. 세 번째.
도로테아는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한 접시씩 깔끔하게 음식을 독파했고 그때마다 에드윈의 이상형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접시를 비우면 깔끔하게 영애들을 떠나 새로운 접시를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네 번째 테이블에서 막 빠져나오던 찰나, 데인이 그녀를 붙잡았다.
“너 뭐 하고 다니냐?”
“응?”
“뭘 하길래 에드윈을 보는 영애들의 시선이 묘하냐고.”
저마다 입술에 음식 부스러기나 음료를 살짝 묻히고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에드윈과 마주한 순간 움찔하며 묘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닌가.
“에드윈과 결혼하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냐고 묻길래.”
“그래서?”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지.”
“…….”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결국 꺼낸 거냐.
“방금 전까지, 할아버지 옆에서는 그렇게 상식적으로 굴더니…….”
사람을 가려 가면서 상식과 비상식을 넘나드는 것도 놀라운 능력이었다.
덕분에 무도회장에 있는 참석자들의 분위기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후작의 소개로 도로테아를 만난 나이 지긋하고 작위 있는 귀족들은 그녀를 참하고 훌륭한 데다 능력까지 뛰어난 인물이라 여기며 흐뭇해하고, 에드윈을 보려 모여든 미혼의 영애들은 하나같이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공략하기 바빴다.
“튼튼하면 좋기야 하지.”
뭐가 잘못됐냐는 듯 태연한 사촌의 얼굴을 보던 데인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에서 발붙이고 살려면 무엇보다 도로테아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야 하는 건 확실했다.
이제까지 저택에서 도로테아를 해하려 했거나, 음험한 마음을 가졌거나,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이들 모두 ‘자연스럽게’ 후작가와 멀어졌다.
불의의 사고나 혹은 개인 사정, 또는 뜻밖의 문제로.
“그…….”
데인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무도회의 본식을 알리는 음악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무도회장 가운데에서 첫 춤을 추게 될 주인공들에게 조명이 쏟아졌다.
미소 짓고 있는 에드윈이 그 자리에 서서 도로테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데인이 에스코트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얹은 도로테아가 사뿐사뿐 사촌을 향해 다가섰다.
딱 세 걸음. 에드윈의 손을 잡기까지 딱 세 걸음 남았을 때였다.
별안간 우뚝 멈춰 선 도로테아에 데인이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이 무도회장의 입구를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테아?”
에드윈의 부드러운 부름에 성큼 앞으로 다가선 도로테아는, 제 손을 잡고 있던 데인의 손을 에드윈의 손바닥 위에 겹쳐 주었다.
그러고는 외사촌을 잡아당겨 서로 마주 보고 데인의 남은 손으로 형의 허리를 감싸 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테아?”
“미안해. 첫 춤은 두 사람이 함께해 줘.”
내 몫까지.
웃음기 한 점 없이 말한 도로테아가 홱 돌아서서 빠르게 무도회장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등 뒤로 악단이 화려한 유혹의 탱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