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1화
5년.
5년의 시간 동안 7황자는 거칠고 잔인하다는 분쟁 지역의 야만인들에게 7번의 투항을 받아 냈다.
‘전장의 악귀’라는 별명과 달리, 군을 이끌고 성문으로 들어서는 개선장군을 본 이들 모두가 숨을 삼켰다.
원래도 멀끔한 외모를 가지고 있던 소년은 이제 수려한 얼굴을 갖춘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특유의 날카롭고 예기 어린 눈이 주변에 닿을 때마다 나와 있던 여인들이 얼굴을 붉혔다.
사내들은 저 멀끔한 얼굴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가차 없이 적을 처단하는 ‘전장의 악귀’라는 사실에 놀란 얼굴이었다.
“예전 생각이 나네. 당시 성년도 되지 않으셨던 7황자 전하께서, 무도한 이들이 빼앗아 간 성을 되찾고 돌아오셨을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했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나도. 나도.”
“용맹하고 잘 싸우면 뭐 하니. 잔인하기 짝이 없고 손속이 포악한 사람이라던데.”
누군가의 투덜거림에 은근슬쩍 황자를 향해 얼굴을 붉히던 여인이 반박했다.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녀가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황자님이 개선장군으로 들어오던 자리에 마침 길을 잃은 하이클레어가의 어린 손녀가 있었거든. 황자 전하께서 그 아이를 직접 거두어 보호하셨던 것이 기억나.”
게다가 그는 어린 소녀가 혹시 출신이나 과거 어머니의 일로 피해를 입을까 하여 직접 폐하께 아이의 존재에 대해 말씀을 올리는 섬세한 배려까지 보였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네.”
“그러고 보니, 그 천재 정령사라던 후작 영애는?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불쑥 묻자 다들 시선을 교환했다.
어느 누구 하나 그녀의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
지난 5년간,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그 시각, 루크의 귀환으로 밖이 소란스럽거나 말거나 후작가의 저택은 평화로웠다.
평소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던 도로테아는 우당탕 들려오는 소리에 느릿하게 뒤를 돌아봤다.
동갑내기 사촌인 데인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황자의 개가!”
분노한 외침에 상황을 대강 짐작한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올해 열여섯이 된 소녀는 복숭아처럼 살짝 붉은 뺨에 보기 좋게 올라간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었다.
원래의 도로테아가 가진 분홍빛 눈과 전생의 재신이 가졌던 검은 눈이 섞인 듯, 남색을 띠게 된 눈동자는 밝은 소녀의 분위기에 적당한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그만.”
도로테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리드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동시에 막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던 데인 또한 멈칫했다.
“프리드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아. 네가 또 뒤에서 날 놀래 키려 든 거겠지.”
“그냥 인사하려고 한 거거든?”
투덜거리는 데인의 말에는 신뢰할 만한 요소가 없었다.
그의 장난기를 익히 알고 있는 도로테아는 그나마 말이 통할 법한 프리드를 타일렀다.
“내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건 안 된다고 했잖아.”
“…….”
“여긴 나무로 되어 있어서 충격에 취약해. 바닥이 내려앉기라도 하면, 서재의 책들이 손상될 거야.”
반성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인 프리드와는 달리, 데인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앓는 소리를 내며 엄살을 부렸다.
“나 좀 걱정해 주면 안 되냐?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뼈가 부러지면 못 일어나.”
냉정하게 사촌의 상태를 진단한 도로테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손에 든 제인이 서재로 들어섰다.
그녀는 데인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듯 혀를 찼다.
“또 장난을 치다 프리드 경에게 걸리셨어요? 이제 열여섯이나 되셨는데 철 좀 드세요.”
평민 출신의 하녀가 후작가의 영식에게 하는 말치고는 몹시 무례하고 건방진 말이었지만, 소년은 그녀의 하극상을 지적하는 대신 잔뜩 기분이 상한 얼굴을 홱 돌렸다.
“맛있겠다.”
도로테아의 손이 제인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한 입 베어 물자 부드러운 식감의 빵과 그 사이에 끼워 넣은 에그 스크램블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느껴졌다.
데인은 재료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느릿하지만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씹고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 봐도 참 맛있게 먹는단 말이지.”
입에 듬뿍 넣고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걸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까지 마음이 동했다.
입맛을 다시는 사촌의 말에 남은 샌드위치를 한번에 꿀꺽 삼킨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먹고 싶어?”
“오, 나눠 주게?”
“아니, 주방에 가서 얻어 오라고. 주방에 남은 샌드위치가 있을 테니까.”
남은 조각은 줄곧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던 프리드의 몫이었다.
그는 오늘도 도로테아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생명체를 경계하고 그녀를 지키라는 ‘주군’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냈으니 이 샌드위치를 먹을 자격이 있었다.
“허…….”
호위에게 넘어가는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데인이 기가 막힌 듯 얼굴을 구겼다.
결국 도로테아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그는 더 말을 보태는 대신 잼 바른 쿠키를 베어 무는 외사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그녀와 마주했을 당시, 소년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그녀의 외모에 내심 실망했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미녀로 불리던 엘렌의 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형편없이 말라비틀어지고 초라한 몰골의 아이.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그녀는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움푹 패여 있던 볼에 조금씩 살이 돋고, 부스스한 머릿결에 윤기가 흐르고, 깡말랐던 몸에 적당히 살이 오르며 ‘어머니를 닮아 제국을 빛낼 미녀’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기까지, 장장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그 누가 보아도 결코 ‘거렁뱅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세련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먹는 건 좀 게걸스럽긴 하지만.’
속말을 삼킨 그가 퉁명스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장난이나 치겠다고 사촌 누이를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7황자가 막 황도로 귀환했어.”
“그래?”
소식을 들은 도로테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은 없었다.
데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덧붙였다.
“전장에서 세운 공 덕분에 이번에 새 영지를 하사받을 것 같다던데.”
“잘됐네.”
재산을 잔뜩 불리면 나한테도 좀 주려나.
건조하게 답을 건네자 어쩐지 살짝 긴장을 더한 물음이 돌아왔다.
“만날 거야?”
그의 물음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글쎄, 어쩔까.”
“그, 너 그 황자랑 제법 친하지 않았어?”
데인의 시선이 프리드를 흘끗거렸다.
아름다운 기사는 전 주인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언제나 그렇듯 메마른 눈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자가 도로테아에게 보인 관심과 호의는 남달랐다.
황궁과 거리에서, 또 불온한 소문이 돌았을 때조차 그는 한결같이 도로테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야만인을 상대하는 짐승.
그렇게 불리는 황자가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도, 그것이 어린 소녀였다는 사실도 제법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가 전장으로 떠나고, 도로테아는 저택에 칩거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가 황도에 등장했지.’
7황자는 도로테아가 은둔하기 전에 만난 유일한 외부 인물이었다.
가족들을 제외한다면 줄곧 완벽하게 세상과는 단절된 일상을 유지한 도로테아에게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반응을 살피듯 떠보는 데인의 말에 도로테아는 언제나 그렇듯 알 수 없는 미소로 답했다.
“볼일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필요하다면 그쪽에서 찾아올 거고.”
“흐음…….”
호기심 많은 사촌을 적당히 상대해 준 도로테아는 남은 쿠키 조각을 입에 털어 넣고 아쉬운 눈으로 빈 쟁반을 살폈다.
조그마한 조각 한 톨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매의 눈으로 살피는 도로테아에게 데인이 다시금 물음을 던졌다.
“너 말이다. 이제 슬슬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는 거냐? 무도회나 연회, 살롱에서 열리는 티 파티 같은 것들 말이야.”
“글쎄.”
아리송한 답이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가지 않는 거겠지.
덮어 놓았던 책을 읽기 위해 다시 손을 뻗은 그녀가 별안간 멈칫하고 반쯤 열린 창밖을 바라봤다.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새까만 몸체를 가진 커다란 새와 한참을 마주하던 그녀가 옅은 웃음을 띤 채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가, 에드윈을 위한 것이었던가?”
“아, 그렇지 뭐. 형은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긴 한데. 아버지는 이제 슬슬 혼담을 굳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일단 작위를 받고 나면 분가를 해야 하니까.”
“…….”
“왜?”
들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꽂은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제인을 봤다.
“제인.”
“네?”
“나한테 무도회용 드레스가 있을까?”
“……!”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작스런 말에 놀란 것은 데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벌린 채 변덕스러운 외사촌을 응시했다.
도로테아가 눈이 깊게 휘도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무도회에서 나랑 함께 춤춰 줄 거지?”
그녀와 함께 사교댄스를 배우다 발등에 시퍼런 멍이 든 전적이 있는 데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 * *
“이번에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하이클레어가의 식사 자리에 파란이 일었다.
무도회에 얼굴을 내밀었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던 후작 내외나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도로테아는 기뻐하거나 떨떠름한, 혹은 신기해하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 짧은 한마디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식사를 재개했다.
육즙을 머금은 질 좋은 소고기가 그녀의 나이프에 썰려 나갔다.
잘게 썬 조각을 콕 집어 고소한 콩과 함께 오물거리는 사이 놀라 멈춰 있던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들뜨고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옷부터 새로 맞춰야겠어요.”
“지난번 방문했던 재봉사의 솜씨가 괜찮던데.”
“장신구도 따로 구입해야지요. 경매에 참석해 볼까요?”
“일단 무도회 분위기는 너무 어둡지 않게 합시다. 또래들이 편하게 어울릴 수 있도록 최대한 밝고 가볍게 꾸미는 거요.”
분명 무도회는 에드윈의 신붓감을 찾으려고 개최되는 것이었는데, 도로테아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손바닥 뒤집듯 바뀐 셈이었다.
당사자인 에드윈조차도 기꺼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사촌 누이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말 잘 생각했어, 테아.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첫 춤은 오빠랑 출게.”
그를 위한 무도회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주목을 자신이 받게 될 것임을 인지하고 미리 건네는 사과 아닌 사과에 에드윈이 웃었다.
이 상냥한 누이는 아닌 척 모든 것을 세심하게 신경 쓰곤 했다.
“그래, 영광이네. 나도 열심히 춤을 연습해야겠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데인이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춤 연습을 해야 하는 건 형이 아니라 쟤라고. 쟤.”
그 와중에도 후작과 벤, 그리고 에이든이 몹시 부러운 눈길로 무도회의 주인공이 될 손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고모부로부터 시기와 질투,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게 된 에드윈은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빠르게 자리를 뜬 에드윈의 뒤에서 아옹다옹하던 어른들은 결국 ‘춤은 한 번만, 에드윈과 출 것’이라는 도로테아의 말에 시무룩해져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들뜬 마음을 가득 안고서, 처음으로 ‘사교 활동’에 나서겠다는 은둔형 아가씨를 지지할 최선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로테아의 참석이 알려지자, 저택 밖의 외부인들도 들뜬 마음으로 저마다 후작가를 향해 방문 의사를 밝혔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에드윈의 혼담에서 한순간에 도로테아의 사교 활동으로 옮겨 간, 바로 ‘그’ 무도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