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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36)화 (36/242)

혼술사 도로테아 36화

하녀는 도로테아의 말을 제법 충실하게 따랐다.

달콤한 간식들로 가득 찬 트레이와 곱게 접힌 흰 셔츠, 매끄러운 질감의 밧줄까지.

그녀가 가져다 준 물건들을 재차 확인한 도로테아가 흡족한 얼굴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우드는 밧줄로 손과 발이 묶인 필립과, 방금 전 아들에게 살해당할 뻔한 콜린이 나란히 테이블 앞에 둘러앉은 것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정말 이 상태로 티타임을 갖자는 거냐?”

“‘힘’을 써야 하니 든든하게 먹어 둬야지. 그렇다고 집주인을 두고 나만 먹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애초에 집주인과 그 아들을 묶어 자리에 앉혀 놓았다는 점에서 이미 예의와는 멀어진 지 오래건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타박을 하기도 전에 콜린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도로테아의 헛소리에 동의한다는 듯 집어 든 흰 빵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필립은 손이 불편하니 네가 먹여 주면 되겠다.”

네가 묶었잖아.

이제까지의 일들만 봐도 소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이미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결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여태껏 그렇게 생각해 왔던 우드 데버는 생각을 바꿨다.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피가 흐르는 인간들은 상식으로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해치려던 아들의 옆에서 빵을 먹는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를 향해 흉기를 들이미는 아들이나.’

패륜을 저지른 주인공을 묶어 둔 채 그 누구보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케이크를 들여다보는 도로테아도 마찬가지였다.

“씁쓸한 맛이 강한 차와 함께 먹기에는 치즈케이크가 어울릴까, 아니면 초콜릿으로 뒤덮은 시폰케이크가 더 어울릴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드의 시선이 날갯죽지가 불거져 나온 필립의 등으로 향했다.

셔츠로 가려져 있던 상처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생겨난 것이 아닐뿐더러, 흔적 하나하나가 모두 깊고 처참했다.

오랜 시간을, 최소 몇 년에 걸쳐 소년이 학대받아 왔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그리고 소년의 지독한 원한과 살기를 볼 때, 어쩌면 그 상처를 낸 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콜린 하이클레어일지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묘하게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은 있었지만 누군가를 향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주변의 일들에 전혀 반응이 없는, 비인간적인 면모가 더 눈에 띄는 사람이었는데.

‘……후작님께 알려야 하나.’

그제야 우드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언제나 긴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던 필립의 새하얀 목덜미에 숨겨진 날카로운 흉터.

또래에 비해 그리 발육이 좋지 않은 신체.

어린아이답지 않게 메마른 표정, 사람들과 어울리기는커녕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모습까지.

생각을 짚어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줄곧 침묵하고 있던 콜린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었다.

술에 취해 잠시 이성을 잃었다든가, 분노로 인해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했다든가.

그렇게 변명해 봤자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잠시 스스로를 잃었던 그 순간의 행동조차도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임을.

콜린의 형편없는 변명을 듣고 있던 우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분노에 질끈 눈을 감았다.

필립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와 새삼 이따위 성의 없는 변명 따위가 소년에게 먹힐 리 없을 텐데도, 콜린은 고집스럽게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우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일에서 부외자이긴 하지만 한마디 하겠소.”

“…….”

“과거를 인정하지도 않고 용서받을 생각일랑 해서는 안 되는 거요.”

진정 달라지려 한다면 과거의 나도 나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상대에게 과거는 모두 잊으라고, 제 잘못을 덮고 어떻게 나아지리라 약속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콜린은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과거의 잘못은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이 몸이 저지른 것이다.”

우드가 조용히 제 주먹을 쥐었다.

머리통을 있는 대로 갈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것은, 옆에 있는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에 못 볼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 단 하나였다.

‘당장 치안대에 넘겨도 모자랄 판에.’

짧은 생이지만 이런저런 경험이 많은 덕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 왔다.

어머니가 잘못 가르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며 원망하는 미친놈도 있었고, 친구를 잘못 만나 나쁜 길로 빠졌다는 비겁한 놈도 있었고, 술이나 마약 같은 것을 탓하는 나약한 놈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 신종 개새끼인가.

전부 다 과거의 몸이 잘못했지만, 새로 마음을 고쳐먹은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본인의 몸으로 저지른 잘못을 모두 인정하지만 현재 자신은 잘못이 없어?

‘이런 신선한 쌍놈을 봤나.’

참다못한 우드가 소년과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 두 사람 모두 밖에 나가 있거라. 밧줄에 묶여야 할 건 이 남자다. 후작님께 내 직접 말씀을 드리면…… “

“그건 좀 곤란한데.”

도로테아가 우드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그가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눈동자에 기이한 빛을 내며 우드를 향해 명했다.

멈춰.

사고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다.

순간 이지를 잃은 듯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진 우드 데버가 그대로 자리에 축 늘어졌다.

필립은 눈앞에서 도로테아가 보여 준 잡기를 보고도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손가락의 움찔거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우리, 아무래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은 재웠어.”

“…….”

줄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필립이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을 열어 나지막이 말했다.

“……저자는 너를 해하려 했어.”

“알아.”

“네가 이 저택에 오기 훨씬 이전에, 황궁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것도 알아.”

“아직도 네 존재 자체를 몹시 싫어해.”

“그것도 맞아.”

이전의 콜린은 물론이고 지금의 콜린 또한 도로테아의 존재가 그리 기껍지는 않겠지.

도로테아가 생글거리며 모든 말을 긍정한 뒤로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주저하던 소년의 입에서 다른 이가 언급되었다.

“저자가 네 어머니를, 엘렌 하이클레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콜린, 네가 대답해 봐. 저 말이 맞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침묵이 방에 내려앉았다.

결국 치즈케이크에 이어 초콜릿을 덧입힌 시폰케이크까지 싹싹 긁어먹은 도로테아가 변명에 소질 없는 전직 사신을 대신해 말을 꺼냈다.

“틀렸어. 엘렌을 죽인 것은 ‘지금’의 콜린이 아니야.”

“…….”

말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것이 더 빠르겠지.

결정을 내린 도로테아가 외사촌을 향해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필립, 오늘 밤 우드를 대신해서 내가 할 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필립이 침묵하자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오늘 밤이 지나고도 여전히 저 몸을 차지한 존재를 죽이고 싶다면 그때에는 내가 널 도와줄게.”

눈앞에서 저를 향한 살해 모의가 오고 가는 것을 듣고 있던 콜린이 바닥에 축 늘어진 우드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세상근심 하나 없이 새근거리는 그와 달리, 다른 이들에게는 이제 막 기나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를 납치, 살해 모의, 그 외에도 불순한 소문을 뿌리는 데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헤르티아 텐은 여느 귀족들과는 달리 지하 감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독방에 갇혀 있었다.

사방이 틀어막히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으스스한 분위기 탓에 며칠만 있어도 정신을 놓게 된다는 악명 높은 장소.

그 안에서 헤르티아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 드러누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거였어. 내 거인데…….”

그녀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엉뚱하게 벽을 향해 몸을 부딪치는 등의 기행을 연이어 보이고 있었다.

일행을 안내해 준 간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상태가 워낙 나쁜 터라 제대로 된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실 겁니다.”

원래도 정신이 그리 온전치 못한 듯 보였건만, 강도 높은 심문까지 겪게 되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모양이었다.

때때로 내뱉는 단어들도 조합하여 해석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뭐. 아무튼 망상이 대단하긴 합니다.”

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종일관 제 것이었다느니, 뺏어 갔다느니…… “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뻔했다.

헤르티아가 갇힌 독방 앞에 선 간수는 어딘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세 사람을 흘끗거리다 이내 자리를 비워 주었다.

이미 대귀족의 분노를 산 데다, 뒷배조차 사라진 헤르티아가 어떻게 되든 간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저 안내비로 받은 두둑한 용돈을 기쁘게 집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간수가 멀리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도로테아는 창살 너머에 있는 헤르티아를 불렀다.

“헤르티아.”

침을 뚝뚝 흘리는 헤르티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혼의 균열이 상당하군.”

“괜찮아. 아직은 ‘수복’할 수 있으니까.”

이미 엉망으로 조각난 혼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면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문제가 될 테지만, 그런 것까지 도로테아가 신경써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 헤르티아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필립은 도로테아가 품에서 묘한 문양이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를 꺼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수상한 종이가 무엇인지, 어째서 헤르티아를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인지 궁금할 법도 하건만 소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 모든 상황을 눈에 담고 있을 뿐.

도로테아의 손을 떠난 부적이 마치 바람이라도 탄 듯 빠르게 날아가 헤르티아의 몸에 들러붙었다.

내내 바닥을 기던 헤르티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온 그녀의 눈이 도로테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악마 같은 소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반갑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우리?”

헤르티아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   *   *

“저택에 독을 뿌린 자들에 대해서는 몰라. 콜린 님과 손을 잡은 자들의 정체도.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널 해치려 들지 않을게. 잘못했어. 정말이야.”

겁에 질려 벌벌 기는 헤르티아를 내려다본 도로테아가 심드렁하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게 아니야. 너더러 반성하라거나 잘못을 빌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어차피 겁에 질려 하는 반성이야 처지가 뒤바뀌고 나면 금세 또 손바닥 뒤집듯 바뀔 테니.

게다가 도로테아는 궁금증을 푸는 데에 쓰기도 바쁜 시간을, 타인을 반성시키는 일 따위에 쏟으며 비효율적으로 행동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헤르티아는 제 허리춤을 겨우 넘는 어린아이의 발치에 엎드린 채 벌벌 떨며 헐떡였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네가 정령사가 될 수 있었던 방법을 알고 싶어.”

뜻밖의 말에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정령사가 될 수 있었던 방법이라고?”

“귀하디귀한 정령석을 네가 손에 넣었을 리도 없고, 너처럼 불완전한 계약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힘들잖아.”

도로테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속으로 무언가를 가늠하듯 망설이던 헤르티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콜린을 흘끗 보고는 입술을 뗐다.

“……그 사람들이 내가 정령을 다룰 수 있도록 의식을 해 줬어.”

“의식이라는 게 어떤 거야?”

“…….”

그 사람들이라는 건 아마도 저택에 쥐새끼를 들이고 소문을 퍼뜨린 자들일 터.

애초에 그녀를 정령사로 만든 것부터가 그들의 짓이었다면, 헤르티아를 콜린에게 보내 후작의 양손녀로 들이도록 종용한 것 전부 계획의 일부였다는 뜻일까.

곰곰이 그림을 그려 본 도로테아가 다시금 물었다.

“의식이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야?”

그녀의 뒤로 물의 정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맴돌던 영체가 함께했던 계약 대상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그녀를 스쳐 지났다.

헤르티아의 표정이 멍해지더니 이제는 더 이상 저를 찾지 않는 정령을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몽롱한 눈을 한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 사람들은 내게 정령을 이식해 줬어.”

“이식이라. 어디에 있던 정령을 네게 이식하는 거야?”

“그건…….”

입술 너머로 나오려던 말이 갑자기 멈췄다.

헤르티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제 목을 손으로 잡고 숨이 막힌 듯 뒹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의 발끝을 시작으로 타고 올라 온몸을 뒤덮은 검은빛의 얼룩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금제를 걸어 놓았군.”

“아, 이런.”

콜린이 담담하게 말하기가 무섭게 도로테아의 입에서 한숨을 새어 나왔다.

입을 열면 안 될 만한 정보가 존재한다는 거겠지.

이토록 잔인한 술법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른 검은 불꽃이 소녀의 혼을 태우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헤르티아의 비명 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귀엽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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