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5화
도로테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 너머로 연못에 빠진 사촌을 바라보았다.
“그럼 못 쓰지.”
그녀의 곁에 돌아온 정령이 키득거리는 것처럼 온몸을 퍼덕였다.
“장난꾸러기 녀석.”
다정하게 정령을 쓰다듬어 준 도로테아는 홀딱 젖은 채 연못에서 걸어 나오는 사촌을 향해 불쑥 수건을 내밀었다.
보송보송한 수건을 한참 바라보던 필립은 말없이 수건을 받아들어 젖은 머리카락을 닦기 시작했다.
도로테아의 몸이 오랜 병마로 인해 다들 안쓰럽게 여길 만큼 비쩍 곯았다면, 필립은 그녀만큼은 아니어도 같은 또래의 형제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발육이 느린 편이었다.
기본적인 체력 훈련을 병행하는 또래들과는 달리, 밖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는 필립의 몸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물에 쫄딱 젖은 탓에 옷이 달라붙자 근육 없는 마른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흰 셔츠 사이로 거뭇한 얼룩 같은 것이 달빛에 비쳤다.
도로테아의 시선이 제 몸을 향한 것을 알아챘는지 필립은 수건으로 상체를 가렸다.
“얘가 장난기가 많아서 그래. 미안해.”
“…….”
아무 말 없이 소녀를 스쳐 지나간 필립의 눈은 여전히 메마르고 텅 비어 있었다.
* * *
물에 빠진 이후로 필립은 도로테아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그만두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애초에 어째서 도로테아의 물건들을 가지고 달아나려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함구했다.
도로테아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결국 알아낸 게 없다는 거네.”
“정령석은 벌써 10년째 한 번도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더군. 황제 폐하께 진상된 것이 마지막이야.”
여기저기 길드를 수소문하며 얻어 낸 우드의 정보에 도로테아는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황궁이라…….”
“아서라, 거긴 네가 함부로 갈 만한 곳이 못 돼. 안 그래도 7황자랑 엮인 것 때문에 후작님께서 노심초사하고 계신데 쓸데없는 생각일랑 않는 게 좋다.”
“며칠이나 고생했는데 얻은 게 없네.”
도로테아가 애석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우드의 눈썹이 올라갔다.
“며칠 고생한 건 나와 콜린 님이지.”
“나도 고생했어.”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길드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판 것은 나! 정령과 관련된 물건들을 죄다 사 모으느라 숨겨 둔 비상금까지 털어야 했던 건 콜린 님! 그런데 네가 뭘 했다고 고생이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도로테아는 심드렁하니 귀를 막았다.
에이든과 훈련을 같이한다더니 실력보다도 목청이 먼저 닮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제까지의 고생을 피 토하듯 늘어놓는 권속을 보던 소녀는 한숨을 푹 쉬며 반박했다.
“너희가 부족한 탓에 원하는 걸 알아내지 못했잖아. 덕분에 가여운 내 마음이 고생했지.”
“……넌 진짜 어디 가서 입 열지 마라. 언젠가는 그 입이 재앙을 부를 테니까.”
부르르 떠는 우드를 보던 도로테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돌렸다.
“이 이상 더 노력한들 얻을 것은 없어 보이네. 어쩔 수 없지. 너희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내 방법’을 써 보는 수밖에.”
불길한 예감이 사내를 휘감았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봤을 때 소녀의 방법이라는 건 상식을 뛰어넘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대부분…….
‘내가 지금보다 더 개고생하며 구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하던데.’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난 도로테아가 생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콜린에게 가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우드가 힘없이 허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난을 함께할 사람이 생겨 마음의 위안이 되는 한편, 앞으로 해야 할 고생이 눈에 선하여 괴로웠다.
* * *
도로테아가 콜린의 저택에 놀러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다른 가족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선뜻 그녀의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적은 아이에게 그나마 잘 따르는 삼촌이라도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특히 벤은 폐 끼치지 말고 예의 바르게 놀다 돌아오라며 딸의 손에 선물을 쥐여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도로테아의 외출에 함께하게 된 보호자는 우드였다.
“어차피 마차를 타고 저택에 들렀다 돌아올 텐데, 굳이 나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나?”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우드를 향해 도로테아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불의의 사고나 사건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보통은 삼촌 집에 반나절 놀러 갔다고 그런 일이 생기진 않는다.”
“모르잖아. 멀쩡히 집에서 자다가 납치도 당하는 세상인걸.”
그건 덜떨어진 네 삼촌이 멋대로 널 데리고 튀어서 그런 거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우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콜린의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몇 번 드나들었지만 이 저택 특유의 고요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깔끔한 외관에 딱히 흠잡을 곳도 없는데 어째서 오싹한 기분이 드는지 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선물 이리 줘.”
도로테아가 손을 뻗자 우드는 뜻밖이라는 표정과 함께 들고 있던 선물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래도 제법 잘 따르는 삼촌이라 그런지 선물만큼은 제 손으로 건네고 싶어 하는 건가.
이럴 때에는 또 영락없는 어린아이로구나, 생각한 순간이었다.
“당신 손이 비어 있어야 빠르게 반응할 수 있을 테니까.”
“……뭘 반응한다는 거냐.”
수수께끼 같은 말을 건넨 소녀는 의뭉스럽게 웃으면서 끝끝내 말없이 저택으로 들어섰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최근 저택에 새로 고용된 집사가 공손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도로테아가 집사를 제지하고는 엉뚱한 요구를 건넸다.
“콜린의 방으로 가고 싶은데요.”
저택으로 찾아온 손님이 주인의 침실을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하이클레어 후작이 가장 아끼는 손녀이자, 이 저택의 주인인 콜린에게조차 경어를 쓰지 않는 ‘그’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
당황한 집사의 시선이 묵묵히 옆을 지키고 있던 우드를 향했다.
그는 또 시작이네, 하는 얼굴로 체념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마디 던졌다.
“애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 * *
콜린의 침실이 있는 층의 복도에는 보초가 없었다.
우중충한 색의 커튼에, 지나다니는 이들조차 거의 없으니 고요한 복도가 몹시 기괴하게 느껴졌다.
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대변하듯 화려한 장식품 한 점 놓이지 않은 복도 한가운데에서 안내인이 멈춰 섰다.
“이쪽입니다.”
“수고했어요.”
공손히 고개를 숙인 남자가 빠르게 복도를 벗어났다.
도로테아는 노크를 하려고 손을 뻗은 우드보다 한발 빠르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활짝 열린 순간 어두운 방 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우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에 기대 앉아 있는 콜린의 목을 향해 겨누어진 흉기였다.
“이런.”
“웬 놈이냐!”
어둠에 묻힌 그림자가 채 달아나기도 전에 우드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있는 힘껏 높게 쳐든 발이, 그림자가 쥐고 있던 것을 멀리 날려 보냈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우드의 손이 상대를 제압했다.
“그만.”
지친 듯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가 콜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로테아가 방을 가로질러 꽁꽁 닫혀 있던 커튼을 열자, 스며든 햇빛에 우드 아래에 깔린 흉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
콜린의 하나뿐인 아들인 필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우드의 몸에 짓눌려 있었다.
“이만 내 아들을 놓아주지.”
“아니, 방금…….”
당황한 우드를 내버려 둔 도로테아가 멀리 날아간 흉기를 손에 들었다.
은은한 빛을 뿜는 은으로 된 나이프는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예리해 보였다. 휘두르는 사람이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상대를 해할 수 있을 만큼.
우드가 누르고 있던 무릎에 힘을 뺀 순간, 필립이 재빠르게 발버둥 쳐 우드의 손에서 벗어나 도로테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의 눈은 그녀가 들고 있는 나이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을 굳힌 우드가 재빠르게 소년을 잡아챈 순간, 그의 셔츠가 후두둑 찢어지며 맨살이 드러났다.
“…….”
온통 멍과 상처 자국으로 가득한 성한 곳 없는 몸이.
할 말을 잃은 우드와는 달리 넘어진 소년의 등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나이프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외사촌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왜 한밤중에 내 방에 들어와서 물건을 뒤지고 책을 훔쳐 갔는지 알 것 같아.”
“…….”
“네가 건드린 건 콜린이 내게 준 물건들뿐이었지.”
고개를 들어 도로테아와 시선을 마주한 필립의 눈이 음울한 빛을 뿜어냈다.
당황한 우드와 달리 도로테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외사촌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이전의’ 콜린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그러니 자신에게 콜린을 믿지 말라는 말을 남겼고, 그가 준 모든 물건들을 제 손에서 처리하려 했던 거다.
혹여라도 콜린이 다시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끔, 주변을 맴돌면서.
필립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콜린 또한 상황을 이해했는지 창백하고 지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말이 없었다.
몹시 당황한 표정의 우드가 어색하게 콜린을 향해 물었다.
“그…… 아드님을 어떻게 할까요?”
“…….”
“풀어 주면 또 아까의 상황이 반복될 것 같은데.”
눈앞에서 패륜을 목격한 그의 머릿속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어.”
“허……?”
“티타임을 갖자.”
그녀의 말에 우드가 어이없다는 듯 내려다봤지만, 소녀는 총총 밖으로 걸어 나가 마침 복도를 지나던 하녀를 불러 차와 간식을 달라고 주문했다.
“특히 간식에 신경 써 주셨으면 해요.”
강조하는 소녀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하녀는 그러겠노라 공손히 대답하고는 이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괜찮아요. 본래 부자(父子)는 싸우면서 크는 법이죠.”
차분하고 침착한 도로테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 하녀가 이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가씨의 말이니 굳이 반박하거나 캐묻는 대신 적당히 맞장구치는 것 같았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실까요?”
“밧줄이 필요해요.”
애가 자꾸 발버둥을 치니 티타임을 갖는 동안 도망가서는 곤란했다.
여기서 오해를 제대로 풀지 않았다가는 곤란해질 테니.
“밧줄이요?”
“되도록이면 튼튼하면서 살을 파고들지 않는 것으로요.”
“밧줄이 왜…….”
하녀가 아연실색하며 묻자 도로테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의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티타임을 가지면서 부자가 진지한 대화를 좀 더 나누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돌아선 하녀에게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여분의 셔츠도 가져다주세요. 제 호위가 말리다가 그만 필립의 셔츠를 뜯어 버려서.”
“…….”
빠르게 복도를 벗어나는 하녀의 발걸음에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하녀와의 짧은 대화를 끝낸 도로테아가 다시 방으로 들어서자, 문밖의 수상하고도 기이한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우드가 몹시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내 또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쟤랑 얽혀서 멀쩡하게 끝나는 일이 없어.
그의 손에 제압되어 있는 필립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