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4화
드넓은 서재에 도착한 도로테아는 조그마한 몸으로 책장 사이를 넘나들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을 맴도는 물의 정령이 심심한 듯 도로테아의 등에 가볍게 형체를 부딪쳤다.
“별거 아냐.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서.”
자신을 괴롭힌 것은 원래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병마였을지 모르나, 그 병마가 쉽게 물러가지 않고 그녀를 꽤 성가시게 괴롭힌 것이 마음에 걸렸다.
들뜬 열에 반응이라도 하듯 떨리던 몸.
쥐어짜이고 부서지는 듯한, 감당하기 힘든 통증에서 그녀는 ‘액’의 편린을 들여다봤다.
“액을 맞은 건 맞지만, 술사의 ‘살’은 아니야.”
누군가가 날린 저주였다면 그녀가 본 것은 액의 편린이 아니라 술사의 일부였을 것이다.
엉엉 우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어째서 그런 울음소리가 나를 찾았나. 그 울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어쩌면 그것이 정령을 받아들인 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헤르티아의 과거이거나 혹은 그녀와 얽힌 악연일 수도 있었다.
정령의 모든 것, 정령사의 전설, 태초의 기록, 정령사 : 자연의 벗……
서재에 있는 기록들은 모두 두루뭉술했다.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정령사 개인의 쓸모없는 정보들이나, 신빙성 없는 정령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
“이걸로는 부족해.”
정령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정령들은 어떤 존재인가.
지금은 그런 구체적인 자료들이 필요했다.
“정령사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어?”
뜬금없는 물음에 우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도로테아를 흘겼다.
“넌 이미 정령사야. 되는 방법 따위를 알아서 뭐 하게.”
“필요해서.”
간단명료한 말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은 왜소하고 마른 가지처럼 말랐지만 얼굴에 혈색이 제법 돌기 시작한 소녀의 태도는 여전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을 툭툭 뱉다가 별안간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령사가 되는 방법을 왜 알고 싶은 거냐? 넌 이미 정령사가 되었는데!”
우드가 환장한다는 듯 덧붙였다.
“네가 정령사가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되잖아. 그때처럼 하면 되지!”
“그건 곤란해.”
정령사가 되긴 했지만, 남의 것을 강탈해 온지라 정식으로 방법을 익힌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귀한 것이 정령사라 했거늘, 또 어디 가서 누군가의 곁에 있는 정령을 뺏어 온단 말인가.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네가?! 네가 양심이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별의별 심부름을 도맡으면서 걸핏하면 못난 다리라는 둥, 부족한 다리라는 둥 하는 깎아내림까지 들어왔던 우드가 펄쩍 뛰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다리를 내려다볼 때마다 하체가 부실하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 정작 그 트라우마를 선사한 본인은 뻔뻔하게도 자신에게 양심이 존재한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정보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까 외부에서 찾아봐야겠네.”
“뭘 어찌하려고?”
“콜린에게 부탁해 보려고. 우드, 콜린에게 가서 정령사와 관련된 정보들을 모아 달라고 전해 줘. 정령사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들은 모조리 다 내게로 보내 달라고.”
삼촌의 이름을 밥 먹듯 불러 대는 도로테아의 말에 우드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에는 좀 더 공손해야지. 그리고 그런 물건들을 모두 수집하려면 돈이 들 텐데, 그건 어찌하고.”
“괜찮아.”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그 저택에 갔을 때 봤는데 재물이 꽤 있더라.”
“그러니까, 그건 네 삼촌의 재물 아니냐.”
“그게 그거지.”
“…….”
콜린이 내 것이니 콜린의 재물도 당연히 내 것이 아닌가.
내 거는 내 거, 네 거도 내 거를 시전하는 도로테아를 보며 우드가 할 말을 잃었다.
“삼촌의 재산을 강탈하는 조카라니…….”
후작가가 아이를 잘못 교육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우드의 전갈을 받은 콜린은 하이클레어 저택으로 직접 방문했다.
며칠 잠을 설친 듯 눈 밑이 거뭇한 전직 사신은 그녀의 앞에 두꺼운 책 몇 권을 내려놓았다.
“정령과 관련된 이론서다. 그러나 대부분이 가설일 뿐, 정확한 정보는 없어.”
“정령사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령사가 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스승에게 정령사가 되는 ‘자격’을 얻는 방법. 두 번째는 정령석을 통해 정령사가 되는 법.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자연계의 정령과 접촉하여 정령사가 되는 길이다.”
그의 담담한 눈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물론, 네 번째 방법이 있다는 걸 네가 직접 알려 줬지.”
대외적으로 그녀는 세 번째 방법으로 정령사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다른 정령사의 정령을 강탈해 온 것이니까.
“사신들은 정령을 잘 모르는 거야?”
“정령은 자연에서 탄생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영체’다. 유한함을 가지는 생명과는 달라. 우리와 마주칠 일이 드물지.”
“사신의 낫이 정령을 베면 어떻게 돼?”
“글쎄, 그런 미친 짓을 시도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어이없다는 듯 대꾸한 콜린이지만 이내 생각에 잠겼다.
정령을 구성하는 영력이 자연에서 탄생한 별개의 존재임을 감안했을 때, 생명을 베어 가는 사신의 낫은…….
“정령은 ‘혼’이 아닌 ‘영’이니까 베이지 않겠지.”
“그것마저도 가정이네. 확신은 못 해?”
“나는 성실한 사신이었다.”
세상에 죽어 가는 생명체는 많고 사신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쉴 틈 없이 일만 해도 늘 손이 모자란데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있을 리가.
“내가 인간의 육체를 가졌다면 진작 과로로 죽었을 거다. 그런 쓰잘머리 없는 일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었어.”
하데스는 권속을 함부로 부려 먹기로 유명했다.
신계에서도 그처럼 고되게 권속을 부려 먹는 이들이 드물 정도로.
콜린은 아련한 눈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일은 끝이 없고 어쩌다 잘못 혼을 끌고 오기라도 하면 인과가 일그러졌다는 이유로 하데스의 주먹에 얻어터지는 괴로운 나날들.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도로테아가 짐짓 편을 들어 주었다.
가끔씩은 불만을 받아 줘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법이니까.
“전 주인이 좀 힘들게 했나 봐?”
“다른 신들이 중매 서 준다고 할 때 그냥 적당히 봐서 결혼할 것이지, 조카한테 반해서 납치혼을 강행하더니 이젠 공처가가 되어서는…….”
노총각일 때에는 노총각 히스테리.
결혼하고 공처가가 되고부터는 유부남 히스테리.
“그래 놓고 근엄한 척은 어찌나 하시는지.”
원래 전 상사 욕하는 것이 가장 신나는 일이라 했던가.
그동안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던 콜린이 열을 올리며 폭력으로 점철된 채 쥐어짜이던 과거를 토로했다.
스멀스멀 그의 주위로 살기가 올라온 순간, 복도에서 무언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세상에. 이걸 어째! 화분이 깨졌네!”
당황한 하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민 도로테아의 눈에 복도 너머로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하던 말을 이어 물었다.
“정령석을 구하는 건 어려울까?”
“황궁의 보물 창고에나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다. 아무리 하이클레어 후작가가 대단하다 한들, 한 나라의 국보에 버금가는 것을 구하긴 어려워.”
“일단 최선을 다해서 구해 줘. 도저히 안 되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지.”
“……최후의 방법이라니?”
도로테아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정령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얘의 전 주인을 찾아가서 족쳐 보는 수밖에.”
넋을 놓았다고는 하나 ‘혼’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면 물어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배부른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는 도로테아를 보던 콜린이 한숨을 삼켰다.
* * *
며칠 내내 도로테아는 몹시 바빴다.
“야.”
쌩하니 지나치는 도로테아 덕에 머쓱해진 데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는 친하게 지내라 하셨지만, 아무리 해도 여자아이와는 맞질 않는다니까.’
일단, 여자아이는 시시하다.
조그마한 일에도 호들갑을 떨고 겁을 먹으면서 쓸데없이 체면을 차리고 고상한 척 사람을 깔아뭉개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한들 데인은 전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만 편하지.”
“그래? 그런 것치고는 꽤 짜증이 난 것 같은데?”
“누가! 간만에 에이든 삼촌과 대련이나 할 거야.”
책을 읽는 에드윈 옆에서 투덜대던 데인이 벌떡 일어나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여유롭게 동생을 놀리던 에드윈은, 복도를 지나치는 도로테아를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여전히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몸집에 비쩍 마른 몸이지만, 한두 걸음만 걷고도 힘에 부친 듯 지쳐 보이던 전과는 달리 저택 이곳저곳을 편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지나간 지 한참 뒤에야 누군가가 느릿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
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미소년이 도로테아가 머물렀던 자리를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필립.’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신관과의 첫 대면에서 신이 빚은 조각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년은 좀처럼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후작의 생일에조차 짧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전부인,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소년.
분명 여전히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고 있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필립은 도로테아를 몹시 신경 쓰고 있었다.
* * *
한밤중이었다.
깊이 잠든 도로테아의 침실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졌다.
끼이이…….
기묘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자, 서늘한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훌쩍 넘어 들어왔다.
재빠르게 창문을 닫은 그림자의 주인은 도로테아의 상태를 잠깐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테이블과 서랍에 놓여 있던 정령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조리 품에 안은 그림자가 화장대를 향해 나아간 순간이었다.
“거긴 안 돼.”
“…….”
“다른 곳은 몰라도 화장대는 제인이 매일 정리해 주거든. 물건 위치가 아주 조금만 바뀌어도 금세 알아챌 거야. 영민한 애라서.”
멈칫한 그림자가 경계하듯 뒷걸음질 쳤다.
도로테아는 어두운 방구석에서 벽을 등지고 선 그림자의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창 너머로 스며든 달빛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들 모두 별 쓸모없는 것들이야.”
하나하나 확인해 봤지만 정령과 관련이 있는 미신들이거나 아주 미약한 수준의 영력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쓰레기들일 뿐이라 며칠 뒤면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내가 가져갈게.”
꾹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그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나지막한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듯 공허했다.
텅 비어 있는 메마른 은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콜린이 가져다준 것이라서?”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요 한 점 비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던 필립은 침묵 속에서 불쑥 예고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믿지 마.”
“…….”
“그가 주는 것이든, 그가 행하는 것이든, 너를 향한 것은 전부 다 거부해.”
무뚝뚝한 어조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뱉은 필립은 샛별처럼 빛나는 분홍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를 바라보는 도로테아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에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그래야 해?”
“전부 다 거짓말이니까.”
물음에 짓씹듯 답을 내뱉은 필립이 창문 가까이 선 순간이었다.
“글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줄곧 도로테아의 주변을 맴돌던 정령이 빠르게 필립에게 달려들더니 이내 그를 창문 밖으로 밀어냈다.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필립이 뒤로 넘어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풍덩, 하는 커다란 물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