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3화
“쟤가 바위 꿀을 먹을 수 있게 뚜껑을 열어 줬다고요! 저만 뭐라 하실 게 아니에요!”
데인이 악을 썼다.
펠릭스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말로 타이르는 대신 강력한 처벌을 통해 교화시키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벌써 한 시간 넘게 연무장을 돌고 있는 데인의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소년의 고함 소리를 벗 삼아 사과를 해치운 도로테아는 느지막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소년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분위기의 새로운 소년들과 함께.
“자, 테아야.”
후작 부인이 다정하게 도로테아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 의젓한 아이가 에드윈, 너보다는 두 살이 더 많은 오빠란다. 펠릭스의 장남이지.”
“에드윈 오빠.”
다정한 미소를 띤 소년은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다음은 네가 만난 데인. 둘째란다.”
데인이 인사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아들의 어린아이 같은 태도에 펠릭스가 조용히 나이프를 들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였다.
“데인이다.”
“데인.”
그 옆에 눈에 띄게 고운 미색을 가진 단발의 소년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운 소년이었다.
복장이 아니었더라면 여자아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 아이는…….”
잠시 멈칫하던 후작 부인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아이는 콜린의 하나뿐인 아들이란다. 너와 동갑인 필립이라고 해.”
“필립.”
차분하게 앉아 있던 소년은 제 이름이 불린 순간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에이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들놈이 있으면 네게 주고 싶다만 아직 결혼을 못 했단다.”
“……아들을 준 적은 없다. 소개한 거지.”
“그게 그거 아니요.”
한숨을 삼킨 펠릭스는 눈을 반짝이며 소년들을 바라보는 도로테아에게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건넸다.
“네게 가까운 친인척 중에 또래 여자아이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이가 맞지 않아 소개하기가 어렵구나. 데인이 짓궂게 굴었던 것은 잊어버리거라. 내 단단히 혼내 놓았으니.”
“괜찮아요.”
그녀가 생긋 웃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의 넘치는 생명력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들뜨게 만드니까.
‘저 때가 제일 싱싱할 때지.’
마치 낚싯바늘에 걸려 뭍으로 올라오고도 연신 팔딱이는 거대한 가물치와 같은,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눈앞에서 보던 도로테아가 생글거리자 에이든이 다시금 웃었다.
“또래를 만나 꽤 즐거운 모양이로구나.”
“어린아이들은 팔팔해서 좋아요.”
“…….”
“특히 데인은 눈이 부시게 건강해서 좋은 것 같아요.”
“……고맙구나.”
뜻밖의 칭찬에 멈칫했던 펠릭스가 차분하게 당황을 수습하고는 칭찬 아닌 칭찬에 빠르게 답했다.
딸아이의 칭찬을 들은 벤이 어쩔 줄 모르고 말을 얹으려던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건강해서 보기 좋네요.”
그 순간,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잘못된 진단 탓에 수년 동안 약하디약한 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팔팔한 사내아이들을 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테아…….”
펠릭스의 아내이자, 그녀의 외숙모인 다이애나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다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덧붙였다.
“콜린 삼촌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콜린은 ‘아프다’라는 핑계로 저택에서 요양 중이었지만, 실은 헤르티아의 뒤를 쫓아 지하에 있는 세력의 정체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콜린 삼촌에게 건강에 좋은 음식들을 많이 가져다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야 다음에 만났을 때에도 그가 모아 놓은 혼력을 강탈해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건강한 육체에 맑은 혼력이 깃드는 법이니까.
“그래, 그러마.”
다들 도로테아를 향해 상냥한 웃음을 보냈다.
오랫동안 아팠던 과거를 잊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큼은 자신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삼촌에게 건강식품을 선물하려는 착한 조카를 기특하게 여기는 눈빛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 * *
“아오, 짜증 나.”
데인은 아직도 저려 오는 팔을 주무르며 식사 자리에서 벗어났다.
혀를 찬 에드윈이 다가와 동생의 팔에 얼음으로 된 주머니를 대어 주었다.
“혀엉…….”
“그러게 누가 할아버님의 꿀에 손을 대라고 했냐. 그건 단순히 비싼 진상품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어 준 벗의 정성이 담겨 있어 할아버님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나는 그게 그렇게 홀랑 열릴 줄 몰랐다니까.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데인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러고는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로테아를 보고 별안간 목소리를 낮췄다.
“형, 쟤 좀 이상해.”
“또 그런다. 밖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돌아온 아이니 고이 품어 주지는 못할망정.”
에드윈이 혀를 차며 철없는 동생을 나무랐다.
몰래 저택에 숨어들어 주방을 뒤진 데다, 후작이 아끼던 꿀을 있는 대로 퍼먹고도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인이 한심해 보일 법도 했다.
소년은 형의 눈초리에 왈칵 성질을 냈다.
“그게 아니라! 진짜 이상하다고 쟤! 어젯밤에 내가 주방에 들어갔을 때, 쟤가…….”
동생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투덜대자 에드윈이 그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아가 뭘 했다는 건데? 꿀 항아리를 내린 게 테아야?”
“아니, 그건 나야.”
“그럼 항아리를 연 게 테아야?”
“아니, 그것도 나지.”
“그럼 꿀을 퍼먹은 것이 테아야?”
“아니, 나긴 한데…….”
물음에 대답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조금씩 어깨를 움츠리는 데인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 에드윈이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테아의 어디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건데?”
“그러니까…….”
데인의 입이 궁색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테아는 사실상 그에게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꿀을 퍼먹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데인은 형인 에드윈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을 하며 깨달았다.
꿀 항아리를 연 것도 먹은 것도 자신일 뿐, 그녀는 별달리 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도로테아에게 찜찜함을 느끼는 걸까.
그 순간이었다.
투덜거리던 데인의 눈이 도로테아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이 슬며시 휘어졌다.
입꼬리를 올린 소녀는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며 입맛을…….
“입맛을 다셔?!”
“뭐?”
에드윈이 데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때맞춰 도로테아에게 다가선 제인이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 아가씨. 열이 있으시잖아요!”
그러자 근처에 있던 이들 모두가 후다닥 도로테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호들갑스럽게 그녀를 업어 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윈이 동생을 향해 혀를 찼다.
“가만히 두기만 해도 끙끙 앓아눕는 애한테 애먼 소리 하지 말고, 반성했으면 방으로 돌아가.”
엄한 잔소리와 함께 돌아서던 에드윈의 눈에 목석같이 서 있는 필립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소년은, 창백한 낯빛으로 시녀의 부축을 받는 도로테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형, 저놈이 여기 온 것도 신기하지?”
몇 번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는 사촌이었다.
애초에 콜린은 이 저택에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으니까.
펠릭스는 어쩐지 묘하게 그를 꺼려 왔고, 실제로도 콜린과 그의 가족은 다른 친척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의외로 우리의 사촌 누이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지 않아?”
늘 세상 다 산 얼굴로 텅 빈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인데.
에드윈은 호기심 가득한 데인의 물음에 말없이 필립을 관찰했다.
소년은 도로테아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도로테아의 존재는 제국에 또 다른 파란을 일으켰다.
후작가에서 쫓아냈던 딸의 핏줄을 다시 받아들인 사실만으로도 귀족 사회가 들썩였다.
이미 호적에서 제명했던 딸의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후작은 그녀의 아버지이자 장사치에 불과했던 벤 에버리에게 귀족 작위를 얻어 주기까지 했다.
한동안 아이를 향한 불온한 소문들이 돌았을 때, 귀족들은 후작을 동정하면서도 어리석다며 비웃었다.
하나뿐인 딸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성급하게 자격이 안 되는 아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앞다퉈 거리를 두고 교류를 끊어 냈다.
“그러게 아무리 핏줄이 당긴다지만 어찌 반쪽짜리를…….”
“평민들보다도 더 바닥인 삶을 살았다던데요.”
“저는 그 애가 몹시 꺼림칙하다는 걸 진작 눈치챘지요.”
“어쩌면 천민들이나 걸린다는 몹쓸 병을 달고 온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후작 부인이 앓아누웠다는 소문은 그들이 입을 신나게 놀리는 데에 기꺼이 한몫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차례차례 병을 앓고 있다는 것, 후작가에서 진행하던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는 일들을 마치 필연이라도 되는 양 신이 나 엮어 댔다.
하이클레어 후작가는 점점 몰락할 것이다, 라는 전망이 나오던 그때였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줄곧 앓아 왔던 병이 마나병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녀가 실은 제국에서 100년 만에 발견된 자연적으로 발현한 정령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스승에게 친화력을 전수받은 것도 아니요, 정령석을 이용해 발현하게 된 것도 아닌 순수한 자연 정령사.
귀족 사회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나게 비방을 일삼던 몇몇이 뒤늦게 의혹을 제기했지만, 대신관이 직접 나서서 그녀의 무고함과 비범한 재능을 보증함으로써 그조차도 빠르게 잠잠해졌다.
“마족의 아이니 어쩌니 하더니.”
“신관님께서 정식으로 천명하셨다지.”
“애초에 자연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그런 몹쓸 소문에 휩싸인 것부터가 수상하지 않나.”
너도나도 불길하다며 입을 놀리던 이들 모두 하루아침에 손바닥 바꾸듯 말을 바꿨다.
발걸음을 끊었던 이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다시금 기웃거리기 시작했지만, 어린 도로테아를 만날 수 있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저택은 문을 닫은 채 모든 이들을 밀어냈다.
이번 일 탓에 아이가 앓아누웠다는 것이 그들의 해명이었다.
물론 그 해명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후작가가 입을 함부로 놀린 이들에게 처절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며 공포에 질렸지만…… 도로테아는 ‘진짜’ 아팠다.
* * *
회광반조(回光返照).
해가 지기 직전 밝아지는 하늘.
물러가기 직전까지 저항하다 강렬히 산화하는 마지막을 뜻한다.
하마터면 아이의 생명력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었던 병마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 못내 원통했던 모양이었다.
육신에서 물러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왕성하고 잔혹한 기세를 드러내며 어린 도로테아의 몸에 상흔을 남기려 애썼다.
덕분에 며칠 동안 열이 펄펄 끓은 도로테아는 줄곧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내야만 했다.
‘멋대로 타인의 연을 끊어 낸 반동인가.’
아무리 희미하다고는 하나 정당한 대가를 교환한 정령과의 계약을 강제로 끊어 냈으니.
헤르티아가 그 반동으로 인해 반쯤 넋이 나간 것 이상으로 도로테아에게도 그 반동이 전해진 것이다.
열병으로 앓아누운 지 닷새째 되는 날에서야 도로테아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
줄곧 눈치를 보듯 방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물의 정령이 그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영체를 바라보던 도로테아는 지친 얼굴로 잠이 든 제인을 살피다 몸을 일으켰다.
내내 말간 수프만 먹은 속에서 허기가 밀려들었다.
“당분간 힘을 쓰는 건 자제해야겠네.”
육체가 강건하지 못한 상태에서 혼력을 쓰니 그만큼 체력이 부족한 육체가 계속해서 섭취의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부드러운 빵과 우유를 바라보았다.
주방에 들어가 사과를 가져 왔던 그녀를 안아 준 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배가 고프지 않게끔 방에 요깃거리를 두어야겠구나.’
자신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배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손을 뻗어 준비되어 있던 간식 바구니를 비운 그녀는 정령의 안내를 받아 곧장 저택의 서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