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2화
으슥한 밤, 눈물로 손녀를 맞이한 노부인에게 도로테아를 맡긴 벤이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둘째 아드님의 말대로, 그 어린 여아에게 줄을 댄 이들의 세력 규모가 적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겠지.”
“은밀히 저택에 독을 풀었던 이들은 모두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더군요.”
간 크게도 자신의 저택를 휘젓고 다닌 이들을 떠올린 후작이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다른 건 없었나? 그 아이는 뭐라던가?”
맹랑한 아이였다.
헤르티아는 눈을 치켜뜨고선, 끝까지 자신은 도로테아가 저택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라는 말을 지껄였다.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던지 허무맹랑한 말들까지 뱉어 냈다.
콜린이 도로테아를 죽이라고 사주했다든가, 도로테아가 자신의 정령을 빼앗아 계약을 맺은 거라든가.
“아무래도 ‘조직’에게 세뇌되었거나, 애초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늘어놓을 리 없었다.
거기다 정령과의 연결이 끊어졌니 어쩌니 하며,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어느 쪽이든 더 이상의 정보를 캐는 건 어렵겠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아니다. 요 며칠 지나치게 마음을 놓았던 게지.”
후작은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듯 복잡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설마하니 도로테아가 마나병이 아니라 정령사가 될 자질을 갖춘 아이일 줄은 후작도 벤도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외가에서는 아이의 죽음이 두려워 존재를 외면하고, 하나뿐인 아비는 치료비를 구하려 아이를 두고 매일 밖으로 나돌았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대신관을 부른 것이 득인지 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도 높은 인물을 부른 것인데, 뜻밖에도 도로테아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신관이 직접 천명했으니 정령사가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폐하께서 더욱 욕심내시겠군.”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어린아이가 겪은 아픈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되도록 풍파 없이 자라게 해 주고 싶건만.
정령사라는 특수한 신분은, 귀족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보일 터.
“무엇보다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지.”
후작의 말에 함께 이야기를 듣던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헤르티아를 따라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아이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들을 저택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후작의 말에 펠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에드윈은 의젓한 편이고 데인은 장난이 지나치긴 하지만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지 않으냐.”
멈칫하던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 아이들이었으니 조금 시일을 앞당긴다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으리라.
“그러고 보니 필립도 테아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겠구나.”
불쑥 꺼낸 이름에 펠릭스가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콜린의 하나뿐인 아들인 필립을 보지 못한 지 어언 3년째였다.
늘 겉모습과 속내가 다른 서출 동생을 꺼리게 되며 필립 또한 자연스레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콜린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눈에 가득 들어찼던 탐욕도, 열등감도, 음흉하고 간사하던 이중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지나칠 정도로 냉소하고 삶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생전 처음 보는 면모였다.
“음…….”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아이 다 저택으로 부르도록 하자꾸나. 다들 테아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게다.”
* * *
새벽녘, 고요한 저택에서 일찍이 눈을 뜨자 푸른빛의 정령이 시야를 가렸다.
도로테아는 아침부터 자신에게 몸을 부비는 정령을 바라보다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자는 동안 심심했구나?”
아무 말 없었지만 파닥이는 꼬리가 긍정을 표현하는 듯 보였다.
손을 뻗자 시원한 냉기가 정령으로부터 전달되었다.
“피피와 놀지 그래?”
정령이 파닥이며 재빠르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흐음.’
역시 반응이 좀 미묘했다.
신기로부터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인 걸까.
그렇지만 타락한 사기도 아니고 순수한 죽음의 기운을 자연의 정령이 무서워할 까닭은 없었다.
‘애초에 생명으로 태어나 삶을 부여받았던 혼이 아니라면.’
사람이나 동물처럼 유한한 삶을 살다가 사신의 낫에 마지막을 맞이하는 혼이 아니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정령이라는 게 뭘까?”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정령을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정령이 기분 좋은 듯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다 이내 허공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도로테아가 부르거나 본인이 내키면 돌아올 터였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잠이 드는 바람에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속이 허했다.
“제인을 불러야 할까.”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새벽부터 충성스런 하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국 홀로 방을 빠져나온 도로테아는 늘 호화로운 음식들이 툭툭 튀어나오던 주방을 향했다.
주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식재료를 들여오는 작은 쪽문은 열려 있었다. 몸을 웅크려 반쯤 통과했을 무렵, 어디선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어디다 둔 거야?”
“…….”
“망할 아버지, 꼭꼭 숨겨 뒀네.”
투덜거리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멈칫했다.
계속해서 부엌의 물건들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무언가 잘못 건드렸는지 커다란 냄비가 굉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아, 젠장.”
얼굴을 잔뜩 구긴 소년이 냄비를 주워 들다 반쯤 쪽문을 통과한 도로테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넌…….”
기왕 들킨 것 뻔뻔하게 나가야겠네.
문을 마저 통과한 그녀는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짙은 고동빛 눈을 가진 소년의 얼굴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을 찡그린 그가 도로테아를 향해 시큰둥하게 말을 뱉었다.
“이 시간에 주방에 있으면 혼날걸. 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지만.”
소년은 그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였지만, 그녀가 또래에 비해 왜소하다는 것을 가늠해 봤을 때 아마 비슷한 나이일 듯했다.
입고 있는 복장을 보니 평범한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배가 고파서 온 거냐?”
퉁명스러운 물음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
“너도 배가 고파서 온 거야?”
“나는 찾아야 할 것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소년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다시 한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가장 높은 선반 위에 있는 물건에 닿았다.
“아, 저기 있네.”
“저게 뭔데?”
“높은 절벽 틈에서만 자리를 잡는다는 혈아붕의 바위 꿀이야. 오죽 귀하면 선물을 전하기 위해 온 하급 관리가 손을 벌벌 떨면서 건넸…….”
말을 이어 나가던 소년이 별안간 뚝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기이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옅은 분홍빛 눈과 마주한 소년이 흠칫하고는 물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냐?”
“아니.”
자기소개도 없이 하고 싶은 말만 꺼낸 것은 소년이었다.
그는 마치 어른이라도 되는 양 혀를 끌끌 차면서 그녀의 볼을 한껏 잡아당겼다.
“요 맹랑한 꼬마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말부터 놓은 거야? 말괄량이가 따로 없네!”
“이거 놔.”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로테아는 이 맹랑한 꼬마와 그리 잘 맞을 것 같지 않다는 것.
“놔.”
짧은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손을 놓은 소년이 의아한 눈으로 눈앞의 자그마한 소녀를 훑었다.
비쩍 마른 데다 목소리마저 기어 들어가는 소녀에게서는 위협적인 요소가 하나도 보이지 않건만, 어째서 ‘놓으라.’는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았을까.
“너…….”
“바위 꿀이 먹고 싶으면 먹어도 좋아. 그 전에 내 간식부터 줘.”
“저건 단단히 밀봉되어 있어서 먹을 수가…….”
“항아리 뚜껑은 내가 열어 줄 테니까 넌 저 창고 안에 든 과일을 가져다줘.”
마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지시하는 소녀의 말에 그가 홀린 듯 창고 문을 열었다.
“왼쪽 가장 끝에 있는 잘 익은 붉은 사과로.”
“너, 여길 들어와 봤어?”
냉장 창고의 물건들은 고용인들이 매일 같이 정리하는 공간이다.
도대체 소녀가 어떻게 구석구석 채워진 물건의 위치를 알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과를 건네준 소년이 선반에서 바위 꿀을 내리자, 과연 촛농으로 단단하게 밀봉해 놓은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귀한 물건임을 티라도 내듯, 단지의 겉이 번질거렸다.
“정말 이걸 열 수 있어?”
호기심이 가득 어린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면 열릴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토록 단단하게 밀봉됐는데.”
“정말이야. 열릴 거라니까.”
믿었던 내가 바보지.
아마도 사과를 먹고 싶어 한 거짓말이겠거니 하고 코웃음을 치자 소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열어 보래도.”
소녀의 채근에 뚜껑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그가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뚜껑이 스르르 열리며 꿀에서 나는 단내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소년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눈으로 열린 꿀 항아리를 한 번, 도로테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제 먹어도 돼.”
“어어…….”
계속 바위 꿀을 노리긴 했지만 막상 먹을 수 있게 되자 난감해졌다.
이건 후작이 불면의 밤에 아주 가끔씩만 맛보는 별미라는 것을 소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몹시도 비싼 식재료라는 것도.
“먹고 싶어 했잖아.”
그녀의 말에 소년이 큼큼 기침했다.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난 순간 그는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어깨를 쭉 폈다.
늘 잘난 척 구는 형도 이 꿀의 유혹을 견디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에 의기양양해졌다.
“그래, 그럼. 먹지 말고 다시 올려놔.”
도로테아가 무덤덤하게 건넨 말에 선반 위로 꿀을 올리던 소년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걸 다시 올리고 있지?’
그가 대체 언제부터 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을, 특히 후작을 두려워했다고 기껏 열은 꿀 항아리를 다시 올려놓는단 말인가.
어스름한 새벽하늘에 조금씩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주방에도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잠시 가출했던 소년의 장난기와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도 돌아왔다.
“이것 봐라. 이건 이렇게 먹는 거다!”
그가 은수저로 꿀을 듬뿍 떠서 입안 가득 넣은 순간, 도로테아는 주변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주방을 지키는 성주신.
대대로 이 가문의 수호신이자, 터를 지켜 온 터줏대감이 후손의 만행에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일렁이던 그림자가 허공에 흩어졌다.
인사를 하러 왔던 모양인데 심기가 꽤 불편해진 듯 보였다.
“너, 당분간은 꿈자리가 사납겠다.”
“엉?”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펠릭스가 그의 귀를 잡고 비틀었다.
달콤함에 젖어 있던 소년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파요, 아버지!”
도로테아는 붉디붉은 사과를 손에 쥔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사촌을 지나쳐, 쪽문으로 엉금엉금 기어 방으로 돌아가다 벤을 만났다.
“…….”
한밤중 사촌과 함께 주방을 털고 온 딸을 물끄러미 보던 벤이 손을 뻗었다.
“배가 고프지 않게끔 방에 요깃거리를 두어야겠구나.”
“네.”
냉큼 대답한 도로테아가 아버지에게 안겨 아삭한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잘 익은 사과는 몹시도 달고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