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1화
“정신 차려라.”
누군가의 일갈에 영롱한 빛이 가득한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던 도로테아가 멈춰 섰다.
자연에서 태어난 영체들의 세계.
잠시나마 열린 문틈으로 엿본 그곳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감미로운 자연의 빛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운 색채들로 가득 찬 그 공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던 도로테아는 가까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조그마한 물의 정령이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잃고 퍼덕였다.
“괜찮은 게냐?”
“응, 괜찮아.”
아직까지도 빠르게 뛰는 심장만이, 그녀가 보고 온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여 그녀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세계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만물에 깃들어 있는 ‘신’의 원형이 바로 저들의 세계에 머무는 영체들이 아닐까.
“쓸데없이 엿보다 하마터면 삼켜질 뻔했어.”
창백한 안색을 살핀 콜린이 다가오자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으며 저지했다.
“아직 내 안의 혼력이 날뛰고 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게다가 ‘의식’이 모두 끝난 게 아니었다.
정령이 문 너머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현계에 가두었다고 해서 그녀의 것이 된 것은 아니니까.
도로테아가 기절한 헤르티아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역시 좀 이상해.”
이곳의 정령사는 도대체 어떻게 정령과 계약을 맺는 걸까.
정령과 인간을 잇고 있는 ‘연’은 지나칠 정도로 흐릿하고 가늘었다.
이 정도의 결속력이라면 ‘정령을 다루는 자’라는 호칭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서로의 혼력을 공유할 수도 없고, 생각을 소통할 수도 없으며, 온전하게 권속으로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둔 것도 아니라면.
“반쪽짜리라는 말조차 무색한 계약인걸.”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연결된 실을 내려다본 도로테아가 물었다.
“이곳의 정령사들은 모두 이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령과 계약을 맺는 거야?”
실로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나는 모른다.”
“정령사의 혼을 거둔 적도 있을 것 아냐?”
“대개 정령사가 숨을 거둘 때가 되면 정령과의 연결고리는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끊기기 마련이다. 흔히 ‘역소환’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다른 정령사들도 이 아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겠네.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사 자체가 몹시 드물다. 이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진작 알렸더라면 아마 제국이 그 능력을 인정해 작위를 내렸을 수도 있겠지.”
아마 그녀는 후작가에 입양된 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 터였다.
도로테아는 그런 헤르티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저를 향해 친근하게 몸을 비벼 오는 자그마한 정령에게로 손을 뻗었다.
도로테아에게서 느껴지는 ‘혼술사’ 특유의 느낌 때문인지 정령은 처음부터 거부 반응 없이 그녀의 혼력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자연의 기운 때문에 제법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정령을 삼켜 봤자 고작 몇 년 치의 혼력을 얻게 되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냥 보내 줄 생각이냐.”
도로테아는 손을 뻗어 물의 정령을 간지럽히며 웃음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나와 ‘복종의 계약’을 맺는 건?”
아마 헤르티아가 준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대단한 걸 줄 수 있을걸.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콜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정령을 살살 꾀어내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도로테아의 손이 ‘실’을 움켜쥐었다.
헤르티아와 정령을 연결하고 있던 가느다란 실이 그녀의 손 안에서 끊어졌다.
갑작스레 소환사를 잃은 정령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주변을 적시는 물줄기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정령을 자신의 혼력으로 뒤덮었다.
혼력에 삼켜진 푸른 정령의 색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 권속이 되렴.”
푸른 물고기의 꼬리 끝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금빛이 느긋하게 정령을 모두 삼킨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자작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누군가와의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비켜서게!”
“이, 이곳은 콜린 자작님의 저택입니다. 제아무리 후작님이라 하셔도……!”
“비키래도!”
무언가가 나동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군화를 신은 이들의 투박한 발걸음이 우르르 몰려드는 소리가 바로 앞까지 들려왔다.
“도로테아! 내 아가야!”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열린 순간, 무서운 얼굴로 들이닥친 하이클레어 후작은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고 멈춰 섰다.
“맙소사.”
도로테아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온전한 몸으로 응접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곁에 어느새 다시 푸른빛을 띠고 있는 물의 정령이 맴돌고 있었다.
“저, 정령……!”
“맙소사, 정령이라니…….”
“내 생애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뒤늦게 후작을 따라 문을 넘어 들어온 일행들이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로 눈앞의 광경에 말을 잃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비는 이들도 있었다.
어린 도로테아와, 그 곁을 맴돌고 있는 푸른 정령.
성스러워 보이는 광경에 어떤 이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 옆에서 기절한 헤르티아나 창백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있는 콜린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서늘하지만 따뜻한, 정령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흐트러졌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다가온 벤이 딸아이를 안아 들었다.
“얘야, 저택을 나오려면 말을 했어야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까르르 웃으며 도로테아의 옆을 맴도는 정령의 존재를 확인한 그의 눈에 착잡함이 깊어졌다.
제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하다는 정령사가 다른 이도 아니고 제 딸이었다니.
심지어 정령석조차 없이 자연적으로 발현한 경우는 몹시 드물어, 기록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주목을 잔뜩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령사로 발현한 것이 어린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테아야, 이번만큼은 잔소리를 들어야겠구나. 저택을 홀로 빠져나오다니.”
도로테아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침을 뚝 떼고 기절한 헤르티아를 가리켰다.
“이 언니가 절 숙부님께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누가?”
“시녀 언니가요. 제가 저택에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숙부님께 데려다주겠다고요.”
벤은 헤르티아의 존재를 몰랐지만, 후작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본 눈치였다.
상황을 파악한 펠릭스가 줄곧 구석에 기대어 있던 콜린에게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말도 없이 네 저택으로 데려오다니. 게다가 저기 쓰러져 있는 아이는 시녀가 아니라 네가 추천했던 방계 여식이 아니냐.”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라는 압박에 콜린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도로테아를 저택으로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저 아이가 테아를 이곳으로 데려다준다며 멋대로 마차에 태웠다더군요. 다행히도 저택에서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쯤 제 수하가 거리에서 둘을 발견했고요.”
자랑스레 여기던 정령을 빼앗긴 데다 모든 죄를 홀로 뒤집어쓰게 생긴 당사자는 안타깝게도 기절 중이었다.
콜린은 내친김에 골치 아프던 과거까지도 세탁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저 아이를 추적하시면, 그간 흘러나온 소문의 진원지도 아시게 될 겁니다.”
담담한 콜린의 말에 펠릭스의 시선이 헤르티아를 향했다.
“도로테아를 황도로 데려온 이후, 저 아이가 제게 지속적으로 접촉해 왔습니다. 별것 아니라 여겼지만 우연히 불온한 무리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평소 연락을 주고받으며 저 아이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기에 때마침 적절하게 테아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헤르티아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그녀에 대한 뒷조사가 시작되어 구린 구석이 줄줄이 튀어나올 무렵일 터.
그녀가 콜린을 공범이라 해도 그때가 되면 그 말을 믿어 줄 사람조차 없으리라.
펠릭스는 묘한 시선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 술술 자기변호를 하는 콜린을 쳐다봤다. 예전과는 달라진 동생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가늠하는 눈초리였다.
이윽고 짧은 한숨과 함께 그가 서출 동생의 어깨를 툭 쳤다.
“수고했다.”
그의 치하에 콜린이 고개를 까딱였다.
“끌고 가라.”
나지막한 명에 함께 온 기사들이 기절해 있던 헤르티아를 끌고 나갔다.
그 뒤로 가장 느긋하게 들어선 누군가의 인기척에 다들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는, 하얀색 법복을 입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도로테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로 다가온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맑고 선한 기운에 도로테아의 눈이 빛났다.
‘신을 섬기고 있는 자다.’
타락하지 않은 수행자.
전생에서도 아주 가끔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하며 신을 섬기고 자신의 도를 닦는 종교인들.
산에 묶인 액막이의 존재를 알아채고 결계를 넘어온 이들.
열에 아홉은 말만 번지르르한 모리배에 사기꾼이지만, 오랜 수행을 통해 ‘성인’이라 불리는 경지에 다다른 이들도 아주 드물게 있다.
꼭 눈앞의 인물처럼.
“소문의 그 아가씨로군요.”
대신관이 손을 뻗자 도로테아는 별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포근한 미소를 지은 그는 주변을 맴도는 정령을 보고 놀랍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동안 드물게 정령사들을 만나 본 적은 있으나, 이 아이처럼 친화력이 강하고 맑은 기운을 가진 이는 처음 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아이가 마족과 계약을 맺었다는 불온한 소문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자연의 정령이 이토록 친근하게 구는 존재입니다. 만일 마족과 일말의 관계라도 있었더라면, 정령이 이토록 아이에게 다가올 리 있겠습니까? 후작께서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신관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요 몇 달간 조금씩 이어지는 저택 내의 자잘한 불행들과 소문이 맞물리면서 다들 불안하던 차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신관이 도로테아에게서 눈을 떼고 후작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염려 또한 놓아도 되실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염려라 하시면……?”
“이 아이는 마나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대신관의 말에 가까이 시립해 있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후작과 벤, 그 외의 다른 가족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로군요. 자연적으로 발현한 정령사는 100년 만에 탄생한 것이니, 다들 몰랐을 수밖에요.”
“예?”
“마나가 아닌 정령의 사랑을 받아 정령사로 발현한 아이들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 탓에 심하게 앓는 경우가 있습니다.”
“…….”
“아마도 그것을 마나병이라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후작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궁의 치료사는 도로테아가 태어나자마자 ‘마나병’이라는 진단과 함께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나뿐인 딸의 죽음에 이어, 그녀가 남긴 혈육마저 보내야 한다는 괴로움에 모질게 끊어 냈던 혈연의 정이었다.
그것이 모두 오해였다니.
눈을 질끈 감은 그의 얼굴에 후회가 스쳤다.
다들 뜻밖의 희소식에 기뻐하는 분위기 속에서 콜린, 단 한 사람만이 애써 냉랭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오해는 개뿔이.’
애가 바뀌었으니 병이 사라졌지.
제가 모아 놓은 혼력을 알뜰하게도 가져가서 온몸에 두르고 있으니 없던 병도 사라질 판이었다.
끌려 나간 헤르티아 덕에 정령까지 얻은 도로테아의 뺨에는 보기 좋게 혈색이 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간이 지날수록 망가진 육체도 회복될 수 있을 터였다.
멀리 복도 끝에서 조그마한 형체가 이곳을 기웃거리다 이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도로테아를 다정하게 안아 들고 잠이 들도록 등을 토닥이는 벤을 보며 콜린이 다시 한번 한숨을 삼켰다.
이 몸이 저지른 수많은 원죄, 그중에서도 이미 꼬일 대로 꼬인 가족관계를 떠올리자 머리가 아파 왔다.
동시에 도로테아를 향한 원망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를 권속으로 들였다면, 그녀에게도 일정의 책임이 있지 않은가.
평생 가져 본 적도 없는 아내에 아들까지 생긴 그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은 천사 같은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 테아, 얼른 집에 가서 쉬자.”
차라리 저도 어린아이의 몸에 넣어 주면 좋았을 것을.
콜린의 눈이 다정하게 딸을 어르는 벤을 보다 자신의 아버지인 후작에게로 향했다.
‘저놈이 왜 저래.’
후작은 오늘따라 서러운 눈을 한 둘째 아들을 떨떠름하게 보다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