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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30)화 (30/242)

혼술사 도로테아 30화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도로테아는, 자신이 올려다보고 있는 천장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콜린의 집이었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기억을 더듬자 그를 위해 맞이굿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직은 좀 무리였나.”

장장 몇 시간 동안 ‘맞이가’를 부른 덕에 팔다리가 저려 왔다.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탁기가 걷힌 것을 보니 의식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도로테아가 콜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콜…….”

이름을 외쳐 부르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손에 든 콜린이 어느새 일어난 도로테아를 보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제 몸은 괜찮은가 봐?”

“그래, 통증도 줄었고, 무엇보다도 확실히 좁아져 있던 ‘길’이 넓어져 전보다 편해졌다.”

사신의 혼력을 인간의 몸이 감당하려니 벅찰 수밖에.

몸이 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도로테아가 뿌듯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콜린이 들고 있던 빵과 우유를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냐?”

입을 꾹 다문 채 바라보고 있던 콜린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놓인 다리를 넘나들며 혼을 다루는 혼술사야.”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입으로 되뇌던 콜린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을 돌렸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그 저택에서 널 혼자 보냈을 리가 없는데.”

음식을 깨끗하게 먹고 입가를 닦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깜박 잊고 있었네.

“넌 이제 ‘콜린의 기억’을 대부분 물려받은 거지?”

“아마도.”

“그럼 나를 대신해 그 저택에 수양 손녀로 들어갈 뻔했다던 아이가 누군지도 알아?”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멈칫했던 콜린이 곰곰이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후작과는 먼 인척 관계일 거다. 작년부터 후작이 부쩍 죽은 막내딸을 그리워하는 일이 잦아지자, 불안해진 콜린 하이클레어가 대체품을 수소문한 게지. 저택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신경이 쏠리기 마련이니까.”

“흠.”

“그건 왜?”

“그 애가 날 여기 데려다줬거든. 숙부님을 만나서 회포를 풀라나.”

덕분에 손쉽게 이 저택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알 만하군.”

무심하게 중얼거린 콜린이 도로테아에게서 빈 그릇과 컵을 받아 테이블 위로 올려 주었다.

“그래서 여길 왔다고?”

“지금 저택을 흘끗대는 쥐새끼들이 있거든.”

어찌 되었건 간에 이곳은 인간 사회였다.

주술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동시에 어느 정도 한정이 되어 있는 법이다.

지나치게 튀면 두려움이든 미움이든 부정적인 감정 또한 쌓이게 되기 마련이다.

“기껏 손에 넣었으니, 웬만하면 망가지지 않았으면 한단 말이야.”

담을 넘어 들어온 불온한 소식들은 모두 바깥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쯤에서 한 번 제대로 거르지 않는다면 귀찮은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 명백했다.

“애초에 황도로 돌아와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7황자와의 친분을 드러내지 말았어야지.”

콜린의 타박에 도로테아가 억울하단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가짜 양녀 혼자서 이 일을 꾸몄을 리 없으니 더 큰 배후가 황궁에 뻗어 있을 테지.

“그 애는 이름이 뭐야?”

“헤르티아. 헤르티아 텐.”

“너도 그 애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어?”

도로테아의 물음에 콜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능력?”

“물의 기운을 담은 영체를 다루던데. 정령이라던가.”

그녀의 말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령사였단 말인가?”

“넌 몰랐구나.”

하기사 그 정도로 음험한 아이라면 제 비밀 무기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을 법하지.

제아무리 뒷배를 업었어도 방계 출신에 불과한 그녀가 망설임 없이 후작가에 발을 디딘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놀랍군. 확실히 정령사는 드물어. 애초에 자연의 기운을 받은 정령들은 인간과 가까운 존재들이 아니니까.”

“정령사라는 게 알려지면 꽤 좋은 대접을 받는 거겠지?”

“당연하지. 적어도 제국 내에서는 이름이 알려질 만한 일이다. 물론 어떤 정령을, 어느 정도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렇구나아~.”

도로테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 위로 몸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콜린이 한숨과 함께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쯤 후작가는 난리가 났겠군. 네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할머니가 아프셔. 저택 사람들도 정신없어서 내가 사라진 걸 뒤늦게 알았을 거야.”

“돌려보내 주겠다.”

“아니.”

태연하게 거부하는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았던 콜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룻밤 더 여기 머무를 생각이야.”

“일이 커질 거다.”

“그러길 바라고 하는 짓인걸.”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의 콜린이 지긋한 시선을 보내자 도로테아는 턱을 괸 채 물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곳에는 백신이라는 게 존재했거든.”

“백신?”

“응, 나중에 큰 병을 앓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독소를 몸에 주입해서 몸이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항체를 만드는 거야.”

저택의 쥐새끼라면 도로테아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택의 담을 넘어 들어오는 바깥의 독소들까지 일일이 잡아 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한 번은, 다들 앓고 나서야 더 견고하고 튼튼해지는 법이다.

“내일 오전이 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사람들의 귀에 흘려줘. 그리고 헤르티아를 이곳으로 부르고.”

고개를 끄덕인 콜린이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 도로테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방을 내주겠다. 여긴 내 방이니 손님방에 가서…….”

“너나 가. 난 여기 있을 거니까.”

“…….”

숙부의 저택으로 와 그의 침실에서 침대를 빼앗는 만행을 저지른 도로테아는 그날 밤 누구보다도 깊고 편안한 잠을 누렸다.

*   *   *

아침 식사 시간이 되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앳된 목소리에 한동안 말이 없던 상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제 보았던 그 창백하고 가냘픈 여인이 겁에 질린 얼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방을 둘러보다 눈을 크게 떴다.

“숙부는 어제 손님방에서 주무셨어요. 제가 이 침대가 마음에 든다고 했거든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도로테아를 살폈다.

마치 무언가의 흔적을 찾듯 팔다리를 꼼꼼하게 살피는 여인을 향해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식사 시간인가요?”

“그, 그래.”

“그럼 내려가요.”

폴짝 침대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몸을 휘청이자 여인은 반사적으로 아이를 잡아 주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빙긋 웃은 도로테아가 그녀의 손을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사용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멀쩡한 도로테아의 모습에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도로테아.”

익숙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간밤에 잠을 설친 듯 눈 밑이 퀭한 콜린이 보였다.

소녀의 손을 잡고 있던 ‘부인’은 당황한 듯 굳었지만 콜린은 그녀의 존재를 모른 척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침 일찍부터 후작이 네가 이곳에 있는지 묻는 전령을 보냈다.”

“곧 들이닥치시겠네. 헤르티아는?”

도로테아의 반말에 옆에 있던 부인의 눈이 커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의 고용인들이 콜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새파랗게 어린 조카로부터 반말을 들은 콜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법 친절하게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응접실에 있을 게다.”

“좋아, 그리로 갈게.”

잡고 있던 손을 빼자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눈을 굴리는 부인을 향해 콜린이 입을 열었다.

“가서 식사부터 하시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부르리다.”

다정하진 않지만 정중한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망설이던 부인이 이내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콜린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앞장서기 시작했다.

*   *   *

콜린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여유롭게 차로 입술을 축이고 있던 헤르티아가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했다.

“콜린 자작님을 뵈어요.”

“음…….”

생글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콜린의 눈이 가라앉았다.

‘지금의 콜린’과 그녀는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셈이었지만 헤르티아의 눈빛은 매우 친근했다.

자신이 같은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을 보던 콜린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물의 정령을 다룰 줄 안다더군.”

숨겼던 사실이 들통났지만 헤르티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정령신의 가호로 그런 축복을 받았답니다.”

“어째서 사실을 숨겼지?”

“보잘것없는 집안의 여식이 정령사가 되었다고 한들, 그 능력을 탐하는 이들에게 휘둘릴 수 있으니까요.”

“이 사실에 대해 몇 사람이나 알고 있나?”

“부모 형제조차 알지 못하니, 저를 봐주신 스승님과 자작님, 아가씨가 전부입니다.”

“등록은?”

“아직이요. 후작가에 정식으로 입적 후에 알릴 생각이었으니까요.”

그 말은 결국 처음부터 후작가에 들어오기 위해 부모 형제와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는 소리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능력을 내보였겠지.

헤르티아는 기대감을 안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언제…….”

“들었나?”

줄곧 담담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콜린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문 뒤에 기대어 있던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문이 열리고 방 안에 들어서는 조그마한 소녀를 본 순간 헤르티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가 콜린을 바라봤다.

“저 아이가, 왜 아직 이 저택에…….”

“왜? 네가 여기로 데려다줬잖아. 그러니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

오늘따라 그녀를 보는 도로테아의 눈빛이 묘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온데간데없고 탐욕이 번들거렸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둔 육식 동물처럼 입맛을 다시는 도로테아를 본 순간, 그녀가 처음 물의 정령을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맛있겠다.”

그때는 그저 천진난만함이라고 믿었는데.

저런 눈빛을 한 아이가 그저 천진난만하기만 할 리 없었다.

헤르티아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콜린 님!”

당황한 외침에 콜린은 아무 말도 없이 벽에 기댄 채 따분한 얼굴로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지금 몹시 기뻐.”

생글거리는 도로테아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헤르티아가 뒷걸음질 쳤다.

등을 벽에 부딪친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네가 ‘그걸’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다면.”

도로테아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전생에도 지금도 그녀는 운이 몹시 좋았다.

필요하거나 욕심나는 것이 있으면 꼭 이렇게 눈앞에 주어지곤 하니까.

“내가 그걸 빼앗아 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지.”

그 물고기가 그래 봬도 여기서는 꽤 대단한 존재로 취급된다니.

솔직히 물비린내는 좋아하지 않지만 모험해 볼 만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작은 몸으로 힘겹게 맞이굿 따위까지 해 가며 콜린의 혼력을 가져오지 않았을 터였다.

도로테아는 무구가 없어 허전한 두 손을 쭉 펼쳤다.

한 바퀴를 돌아, 먼 곳까지 손을 뻗은 그녀가 용신의 존재를 읊었다.

이 몸과 마음 다해 용신께 예를 올립니다.

용왕전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뻗어 나간 혼력이 겁에 질린 헤르티아를 꽁꽁 묶었다.

그녀의 심장 가까운 곳에 어설프게 닫혀 있던 ‘문’이 도로테아의 눈에 비쳤다.

‘이거구나.’

오늘만큼은 혼력이 고갈될 위험 없이 마음껏 쓸 수 있으니 기쁠 따름이었다.

조그마한 문을 비집은 혼력이 재빠르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헤르티아가 그 섬뜩함에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품에서 자그마한 물고기의 형체를 한 정령이 튀어나왔다.

그다음은 결박령이었다.

용왕 신장의 자비로

지극정성 바다같이 받으시어

중생들에 깨달음을 주소서.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던 물고기가 마치 자석에 끌리듯 소녀에게로 향했다.

손안에 파닥이는 물고기를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씩 웃었다.

정령을 빼앗긴 헤르티아의 비명 소리만이 저택을 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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