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29화
정말로 콜린에게 데려다준다고?
엉뚱한 곳에 떨어지면 알아서 찾아갈 각오까지 했었는데.
도로테아는 뜻밖의 행운에 눈을 끔뻑였다.
“콜린 하이클레어? 그자가 이 아이를 데려온 거 아니었어?”
“잘은 모르겠지만 7황자가 엮여 있었어.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거겠지. 그 사람은 우리 쪽이야.”
“하긴, 널 저택에 추천한 게 그자라고 했었지.”
아아, 콜린.
어린 도로테아를 그렇게 열심히 죽이려고 했던 까닭이 있었던 거다.
도로테아를 대체할 소녀를 저택에 밀어 넣고, 아예 그녀를 죽여 버리면 더 이상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던 거겠지.
만반의 준비를 모두 끝내고 그녀를 죽이러 왔던 남자는 되레 ‘존재를 소멸’당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어차피 죽어 가고 있던 조카였는데. 내버려 두기만 했어도 그렇게 끝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을.
참으로 재미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로테아를 이곳으로 데려온 가짜 양녀가 미소를 띤 채 당부했다.
“되도록이면 우리가 드러나지 않아야 할 거야.”
“염려 마. 마차도 일부러 빌리지 않고 새로 샀으니까. 일이 끝나면 부숴서 태워 버려야지.”
도로테아를 이곳까지 데려온 가짜 양녀는 기분이 좋아진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얌전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는 도로테아를 힐끔 보고는 픽 웃었다.
“겁이 나 울며불며할 줄 알았더니, 아직 그 정도 상황 파악도 되지 않는 모양이네.”
“하여간, 다른 건 몰라도 마족과 관련되었다는 소문까지 낼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고작해야 혈연이라는 이유로 내가 노력해서 얻을 뻔한 자리를 차지한 아이잖아. 그것도 야반도주 따위로 가문을 모욕한 어미의 자식인데. 내가 너무하다고?”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인 말에 마부가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다시 콜린의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도로테아는 얌전히 앉아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아가씨. 재밌는 걸 보여 줄까?”
심심했던 건지, 아니면 그녀를 향해 으스대고 싶었던 건지.
가짜 양녀가 눈이 반달이 되도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또 뭘 하려나 시큰둥하게 보던 도로테아가 그녀의 손에 희미하게 흐르기 시작한 ‘기’를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주 미약하지만 저건 분명 영기가 틀림없었다.
도로테아가 쓰는 것과는 달리 탁한 데다, 제대로 된 활로를 찾지 못해 아주 옅고 미세한 흐름을 탄 것이 전부일지라도.
손을 휘감은 푸르른 빛에서 어느새 무언가가 스르르 튀어나왔다.
마차 안에 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물…….”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짜 양녀가 신기하다는 듯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가슴을 쭉 펴고서 당당하게 고개를 든 채 입을 열었다.
“맞아요. 물. 나는 물의 정령사예요.”
“…….”
“제국에서 희귀하고 드물다는, 그 물의 정령사.”
흐릿하게 ‘영체’로 보이는 그것이 작은 물고기 모양의 형상을 갖추어 냈다.
대단한 재주는 아니었지만 신기하긴 했다.
‘이곳에서는 조그마한 생선도 몸주가 될 수 있는 건가.’
적어도 전생을 넘어 현생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같은 인간이었거나,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신이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재능은 있는 모양이야.’
뜻밖에도 저 가짜는 혼력을 타고나긴 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혼력을 받아들이는 신체가 탁하고 기가 막혀 있어 고작해야 물고기 따위를 신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것 같지만.
뭐, 그래도.
오랜만에 혼력을 지닌 채 실체화된 존재를 눈앞에서 보니 먹음직스럽긴 했다.
“맛있겠다.”
도로테아가 환하게 웃으며 물의 정령을 본 소감에 대해 말했다.
가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제국에서도 극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을 보고 어떻게 그따위 말을!”
고작 저걸 소환한다고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건가.
심지어 물고기의 크기도 작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가 머물던 신당 뒤편의 연못에 서식하던 금붕어보다도 더 작고 하찮아 보였다. 가진 혼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귀여워.”
나름대로 칭찬해 줬는데 가짜는 뺨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노려보았다.
이를 갈던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놀던 ‘물고기’는 재빠르게 마차를 빠져나갔다.
사방에서 풍겨 오는 물비린내에, 도로테아는 이 물고기가 주변에 결계와 비슷한 것을 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내려.”
아마도 모습을 감추거나, 존재감을 감추는 그런 자잘한 장난질 정도겠지.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팔을 쥐고 마차에서 밀어냈다.
얼결에 힘없이 밀려난 그녀는, 음산해 보이는 저택의 정문에 버려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마차를 뒤로하고 도로테아는 눈을 깜빡였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바 있는 건지 무표정한 보초가 문을 열어 그녀를 저택 안에 들였다.
* * *
“자,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여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콜린의 저택이라 들었는데 정작 저택의 주인인 콜린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엉뚱하게도 처음 보는 여자가 나와 도로테아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육중한 몸이 뒤뚱뒤뚱 복도를 지나쳤다.
“아가씨 때문에 저택의 주인께서 몹시 심기가 불편하시답니다.”
“…….”
“오죽하면 아가씨를 후작님께 넘겨 드린 그날부터 끙끙 앓아누우셨겠어요, 그분이!”
그건 딱히 나하고 관련이 없는데.
콜린은 지금 ‘인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사신에서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신체 내부의 생기와 사신의 혼이 가진 혼력이 부딪치지 않고 섞이는 과정이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것뿐이다.
“아가씨가 여기 오셨으니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녀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창백한 얼굴의 시녀와 하녀, 시종과 일꾼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콜린은 결혼을 했다고 했었지.
그럼 이 여자가 그의 아내인가?
‘방에 틀어박힐 만하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인간이 되자마자 이런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망스럽긴 할 것 같았다.
질질 끌려가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무리하게 계속 끌려 다닌 결과였다.
힘없이 바닥에 끌리는 아이를 내려다본 여자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덜떨어진 게!”
후작가의 직계손을 향한 언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품위 없는 말투였다.
알 굵은 반지가 빛나고 있는 솥뚜껑만 한 손이 높이 올라갔다.
“잠깐.”
그 순간 누군가의 가냘픈 목소리에 여자가 멈칫했다.
도로테아의 눈앞에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안색의 여인이 서 있었다.
숄을 두른 여인의 눈이 이윽고 도로테아를 알아본 듯 커졌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로테아의 옆에 서 있는 뚱뚱한 여인이 먼저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부인, 어찌 이곳까지 나오셨습니까? 방에 계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밖이 소란스럽기에 무슨 일인가 하여 나와 봤네. 그 아이는 누군가?”
차분한 목소리의 여인이 도로테아를 보며 물었다.
분명히 알아본 눈치인데 굳이 ‘누구냐’고 묻는 것을 보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 보였다.
부인이라 불린 여인의 어깨를 가리고 있는 숄 너머로 언뜻 푸릇한 멍이 보였다.
“먼 친척 조카입니다. 제가 교육 중이었어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던 ‘부인’이 도로테아를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니?”
“부인!”
그녀가 강하게 소리치자 부인이 움츠러들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멋대로 돌아다니시다 또 콜린 님께 혼이 나시려구요.”
“…….”
“지난번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을 텐데. 지금 부인께서는 다른 이를 걱정하실 때가 아니지요.”
어깨에 두른 숄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로테아는 잠시 그런 여인을 관찰하다 모르는 척 몸을 일으켰다.
“숙부께 갈래요.”
“안 돼……!”
제법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섰지만 그것도 잠시, 도로테아의 손을 잡은 여자가 그녀를 우악스럽게 밀쳐 내자 힘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의 얼굴에 무력감이 드러났다.
그런 그녀를 모른 척 지나친 두 사람이 멈춰 선 것은 굳게 닫힌 어느 문 앞이었다.
도로테아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온 여자가 환히 웃었다.
“여기가 바로 숙부님이 계신 곳이랍니다.”
“그렇구나.”
“아가씨, 얼른 가서 숙부님을 맞으셔야지요?”
간드러진 목소리를 낸 그녀가 있는 힘껏 도로테아의 등을 떠밀었다.
열린 문틈으로 밀려 들어가자마자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무슨 소리가 나든, 그 누구도 들어가지 마라. 부인이 와도 들여보내서는 안 돼.”
밖에서 당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바짝 붙어 있던 도로테아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숨을 내쉬었다.
방에 들어찬 탁한 공기가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엉망이네. 진짜로.”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콜린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힘없이 눈을 뜬 콜린이 도로테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사신인데, 융합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어쩔 거야?”
“네가 나를 이따위 몸에 가뒀기 때문이다. 쌓은 업이 너무 많아 탁해진 이자의 육체는 내 혼과 섞이기 쉽지 않아.”
힘없는 목소리가 내뱉은 말에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래서 나가지 않았던 거구나? 하긴, 지금 이 꼴로 나갔다가는 저택에 있는 다른 이들까지 삼킬 태세인걸.”
이미 정문에서도 느꼈지만, 방에서 새어 나간 탁기가 저택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오염된 기운에 노출된 이들은 평소보다 더 분노하고, 음침해지고, 교활해지며, 생기를 잃어 가게 되었을 터.
“뭐, 걱정하지 마. 이렇게 내가 왔잖아.”
도로테아가 폴짝 뛰어 침대로 올라가 콜린을 내려다봤다.
두 손을 허리에 얹은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건넨 말에 콜린의 눈에 불신의 기운이 스몄다.
“뭘 하려고?”
“맞이굿 해 줄게.”
“……그게 뭐냐?”
“네 혼을, 네 몸이 좀 더 잘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술법.”
그가 꺼림칙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당한 바가 있으니 이 조그마한 아이가 심상찮은 재주를 지녔다는 것이야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위해 나서 줄 만한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 물론. 하는 김에 네 혼력도 좀 받아 가고. 재밌는 걸 발견했거든. 해 보고 싶은데 아직 이 몸만으로는 벅차서.”
생긋 웃는 그녀를 올려다본 콜린이 그럼 그렇지, 하고 얼굴을 구겼다.
두통 때문인지 아니면 혼력을 나눠 주기 싫은 탓인지 일그러진 얼굴을 본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너한테 별다른 수도 없을걸?”
품에서 튀어나온 다람쥐, 피피가 쪼르르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소녀의 손 위로 저장해 둔 도토리 몇 알을 꺼내어 바쳤다.
콜린은 자신이 아닌 다른 주인을 향해 알랑거리는 신기를 향해 기막히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신기는 전 주인을 모른 척하며 할 일을 마치자 다시 도로테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자, 널 위한 상차림이야.”
도로테아가 도토리를 뿌리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뱉은 창(唱)이, 넓은 방을 가득 채워 나갔다.
천신일월 님이 오시는 길이 어찌 되었을까.
초목이 탱천한 길을 언월도로 베어 내고
동서로 치우니 날카로운 그루터기가 보이누나.
고르지 못한 지면을 발로 밟고 크고 작은 돌멩이를 삼태기로 치우자.
울퉁불퉁한 길을 떡미레로 평평히 고르고 이슬 다리를 놓아라.
바삭거리는 띠밭에 나비 다리를 놓고 일광 다리 월광 다리를 놓아라.
바르지 못한 네 귀를 끊고, 올 구멍은 쌀로 메우며, 시루떡 다리를 놓아라.
소녀가 뱅그르르 돌 때마다, 들릴 리 없는 방울 소리가 영롱히 울려 퍼졌다.
방을 가득 채운 탁기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