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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28)화 (28/242)

혼술사 도로테아 28화

하이클레어 후작은 원체 예외를 두지 않는 인물이었다.

군에서 적용하던 그의 ‘규율’은 저택 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사용인들은 살얼음판 같은 긴장을 하고 일에 임했고, 아이들은 숨죽여 방구석에서 조심스럽게 놀곤 했다.

그런 저택을 뒤바꾼 것이 도로테아였다.

어느 날 콜린과 함께 나타난 조그마한 소녀는 이 칙칙하고 딱딱한 저택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저 형태만 갖추었던 정원에는 색색깔의 꽃들이 가득 자랐고, 아이들을 위한 벤치와 놀기 좋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어두운 색으로 통일되어 있던 커튼들은 밝고 옅은 파스텔 톤으로, 식탁보는 아기자기한 무늬로 바뀌었다.

다들 조금씩 얼굴에 여유와 웃음을 띠기 시작한 것은 모두 도로테아의 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 냄새가 나던 저택에서 예전처럼 다시 경직되고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녀장님.”

문을 열고 들어선 어린 시녀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클로이가 오늘 아파 나올 수 없다고 연락이 왔어요. 듣기로는 열이 펄펄 끓고 있대요.”

소식을 들은 시녀장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서신을 구깃구깃하게 접으며 담담하게 지시했다.

“클로이의 몫은 오늘 벨에게 부탁하렴. 그리고 주방에서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단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집사님께 알려 드리고.”

“네.”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시녀가 눈치를 보다 말없이 빠져나갔다.

시녀장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 바깥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들이 이곳을 ‘유령 저택’, ‘저주받은 저택’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복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하녀들은 되도록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지만, 두려움을 온전하게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애써 뒤숭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연 시녀장은 그 앞에 와 있던 조그마한 아이를 보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가씨.”

“할머니는 아직도 아프셔?”

그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도로테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예, 부인께서는 아직 아프셔요. 아가씨는 몸이 약하니 그분 곁에 가시면 안 됩니다.”

“이거.”

흠칫한 그녀가 도로테아의 품에서 나온 것을 억지 미소와 함께 받아 들었다.

“예쁜 꽃이네요.”

“응, 할머니에게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드리겠습니다.”

도로테아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막아 세우는 시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단 며칠 만에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했다.

‘예전 생각이 나네.’

오래전, 자신을 이용하면서도 두려워했던 사람들.

도로테아가 가진 ‘이상한 힘’에 의존해 이득을 챙기면서도 혹여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늘 피하기 바쁘던 이기적인 인간들.

‘그래도 그들과는 달라.’

이들의 눈에 보이는 건 순수한 두려움이었다.

도로테아에게 덧씌워진 불길한 아이라는 굴레에 대한 두려움.

도로테아는 명백하게 자신을 향하는 악의를 폐부 깊은 곳까지 느끼며 모른 척 돌아섰다.

저 꽃을 그녀의 곁에 둔다면 좋을 텐데. 회화나무의 꽃은 잠든 이의 악몽을 쫓아 주니까.

그렇지만 저 꽃이 후작 부인의 머리맡에 가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에 버려지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너!”

우렁찬 외침에 뒤를 돌자 씨근덕대는 우드가 보였다.

줄곧 자신을 찾아다닌 듯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이 망할 꼬맹이야.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말랬잖냐!”

“나가지 않았어. 저택에 있었잖아.”

“그게 아니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벅벅 긁는 우드는 오늘따라 한층 더 멍청해 보였다.

도로테아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유난에 자신을 금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던 속가들이 떠올랐다.

‘아냐, 그들과는 달라.’

우드는 그녀가 가진 무형의 힘을 무서워했지만, 그녀 자체를 무서워하고 터부시하진 않았다.

“걱정하는 거 알아.”

불쑥 꺼낸 말에 우드가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별로 문제 될 건 없어.”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요란스럽게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며칠간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일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도로테아의 주변에서만 생겼다. 게다가 수상하리만치 빠르게 퍼지는 소문과 사람들의 눈초리까지.

찜찜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저택을 관리하는 후작 부인이 쓰러졌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후작은 연일 후작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찾고, 다른 사람들도 우왕좌왕하며 저택의 사건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즈음부터, 악의적인 소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이 애가 이상한 건 맞지만, 누군가를 다치게 할 아이는 아닌데.’

문제는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일들을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막막하다는 거였다.

담담한 태도로 우드를 안심시키던 도로테아가 요란스러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인.”

한 박자 빠르게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저 멀리 소란 속에서 제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보나 마나 또 하녀들이 모여서 도로테아의 흉한 소문을 늘어놓았거나, 제인의 흉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자신의 하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라비틀어진 가지처럼 가는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슥슥 빠져나갔다.

“괜찮아.”

다들 분노하고 있는 가운데 도로테아만이 태연했다.

“방으로 돌아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인이 휘청, 하고 쓰러졌다.

우드가 재빠르게 들어 올렸지만 이미 어린 하녀의 몸은 불덩이였다.

“제기랄!”

붉어진 얼굴을 하고 가쁜 숨을 쉬고도 아가씨, 아가씨, 중얼거리는 제인을 내려다보는 우드의 얼굴이 못내 험악했다.

“너는 방에 들어가 있어.”

도로테아는 제인을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우드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시녀 차림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택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아가씨, 방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살갑고 다정한 미소의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저택에서 요 며칠 내내 외면당하고 눈치 보던 아이에게 이런 손길이 내밀어진다면 당연하게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되겠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덥석 손을 잡고 하자는 대로 따를지도.

도로테아는 상대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단순한 아이가 아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망설임 없이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택에 쥐를 심어 놓았던 ‘밖’의 누군가를.

손을 놓은 채 잠자코 기다린다면 분명 누군가가 제게 접근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드디어 실마리를 손에 쥐게 된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기쁘게 올라갔다.

“응, 방에 가자.”

어린 도로테아의 손을 잡은 시녀는 자그마한 손이 뼈가 만져질 정도로 앙상한 것을 느끼고 흠칫했지만, 이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덧씌웠다.

*   *   *

방으로 돌아온 도로테아의 앞에 따뜻한 우유와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가 놓였다. 

그녀가 막 포크를 든 순간 맞은편에 앉은 시녀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응.”

부드러운 시폰케이크가 서툰 포크질에 잘게 조각났다.

시녀는 그것을 보고도 시중을 들어주기는커녕 더욱 짙은 미소를 띠고서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요 며칠 심심하셨죠? 다들 아가씨와 놀아 주지 않으니 말이에요.”

“아냐, 제인이 있는걸.”

“제인이요? 방금 실려 나간 그 애 말이에요?”

도로테아가 케이크를 난도질하던 것을 멈추고 시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제인은 많이 아파요. 어쩌면 두 번 다시 아가씨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왜?”

그녀는 잠시 대답 없이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시선으로.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을 모르시는군요?”

“소문?”

“아가씨가 이 저택에 있으면 가까운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는 소문이요. 아가씨에게 아주 해로운 기운이 붙었다고요.”

가당치도 않았다.

이곳에 온 첫날부터 터주신께 인사를 올리고, 풍수에 해가 될 만한 돌을 빼냈으며, 영성 높은 나무를 더욱 정성껏 가꾸어 준 것은 도로테아 그녀였다.

저택을 청소하고 있는 중에 성가신 벌레가 끼어드는 통에 잠시 멈춘 것뿐이지.

감히.

포크를 내려놓은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녀복을 입은 소녀의 심장이 별안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가 쥐어짜듯 해야 할 말을 이어나갔다.

“시, 신관님이 오실 거예요. 아가씨를 살피기 위해서요.”

“그래?”

“그분이 오면 아가씨는 더 이상 이 저택에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왜?”

“왜냐면……. 아가씨께 지금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건 아가씨에게 불길한 괴물이 들러붙었기 때문이거든요.”

후작은 소문을 완전히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신전의 고위 신관을 불러 직접 도로테아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신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진 못했지만, 사람들의 말처럼 그의 말이 높은 권위와 신뢰성을 가진다면 일을 꾸민 이들이 꽤나 곤란해질 것임을 알았다.

‘자잘한 술수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모두 물거품이 될 테니까.’

“그렇구나. 큰일인 거네?”

도로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제 생각에는요, 아가씨.”

시녀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해졌다.

“잠시만 그 신관을 피해 숨어 계시는 것이 좋겠어요. 저택 밖으로요.”

“밖 어디? 나는 아는 곳이 없는걸.”

“아가씨의 둘째 외숙부가 계시잖아요!”

콜린을 뜻하는 건가.

도로테아는 눈을 내리깔고서 제법 오랜 시간 자신의 저택에 은둔해 있는 권속을 떠올렸다.

이제 슬슬 보러 갈 생각이긴 했다.

‘확실히 저택 내에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모양이네.’

한때 제국의 ‘검’이라 불리던 후작이 그렇게 녹록할 리 없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꼬리를 잡았지만 이대로는 또다시 몸통은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이들의 뜻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은 또 숨어서 기회를 노릴 테고, 모처럼의 평화가 방해받을 테지.

‘내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이들이 누구건 본보기를 보여야지.’

두 번 다시는 저택으로 손을 뻗어 오지 못하게끔.

생각을 마친 도로테아는 웃는 얼굴로 시녀의 손을 잡았다.

“응, 콜린 숙부에게 갈래.”

시녀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

*   *   *

후드를 푹 뒤집어쓴 조그마한 형체를 안아 든 시녀가 재빠르게 후문을 통과했다.

미리 수를 써 뒀는지 저택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보초들이 보이지 않았다.

순조롭게 빠져나온 문 앞에 검은색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초조한 목소리에 마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를 몰았다.

질주하는 마차의 안은 몹시도 흔들렸다.

“콜린 숙부한테 가?”

“시끄러워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꺼낸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시녀가 거친 손길로 무릎에서 도로테아를 밀어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 그녀가 자신을 밀어 낸 시녀를 올려다보았다.

냉랭한 얼굴을 한 시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묶고 있던 헤어밴드를 풀었다.

‘생각보다 어리네.’

열다섯에서 열여섯 정도.

머리를 풀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자 한층 더 어려 보이는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도로테아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런 것 따위가 나를 밀어내다니.”

“…….”

“내가 그 저택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아, 기억났다.

후작이 막내딸과 손녀의 존재를 잊지 못하자, 몇몇 가신들이 합심하여 방계의 어린아이 하나를 저택으로 들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도로테아가 나타난 덕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아마도 눈앞의 여자는 그 ‘손녀’가 될 뻔한 인물인 모양이다.

‘흠.’

쥐새끼의 배후를 파헤치려 한 건데 뜻밖에도 둥지를 노리던 뻐꾸기가 나타나다니.

점점 일이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마차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그래서 이 애는 어떻게 할 거야?”

공범으로 여겨지는 마부의 물음에 여자아이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내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어.”

그러고는 멀뚱멀뚱 자신을 보는 도로테아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콜린 숙부님께 모셔다 드린다고 약속했으니, 아가씨를 그 저택에 모셔다 드려야겠지.”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거야.

여자아이가 픽하니 웃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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