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27화
한참을 그 조그마한 도토리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고목의 정기가 가장 선연하게 담겨 있는 물건인데.’
궁에서 오랜 시간 버틴 나무들은 저마다의 깊은 심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을 땅에 뿌리박고 살아오며 터의 보호수가 된 나무는 땅의 불온한 기운을 빨아들여 깨끗한 기운으로 바꾸어 낸다.
그러니 오래된 나무 한 채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라 하는 것이지.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도토리를 건네는 도로테아를 보자 장난이 동했던 건지, 황제는 그 도토리를 윌에게 건넸다.
“네가 아이를 찾아 데려왔으니 그 상으로 네게 주마.”
윌은 빙긋 웃으며 받고는 도로테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못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리처드.”
엄한 목소리에 엎드려 있던 리처드가 움찔했다.
“일어나라.”
근엄한 목소리에 일어난 황자는 이제야 이성을 찾은 듯 파랗게 질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네 궁의 시녀가 어찌하여 도로테아를 데려갔는지, 물어봐야겠구나.”
손가락에 낀 굵은 알이 박힌 반지를 돌리며 꺼낸 차분한 말에 리처드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저로서는 왜 저 아이가 저를 그리 모함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설마 시녀가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제가 지시했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당당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황제가 고개를 돌려 루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녀가 직접, 이 아이가 지시했음을 인정했느냐?”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
덤덤한 목소리로 보건대 딱히 리처드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궁의 더러운 음모와 수작들을 전부 다 들춰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일을 키운다고 한들 황실의 명예가 실추될 뿐이니.
후작의 품에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를 흐트러뜨렸다.
“언니는 나쁘지 않아요. 아주 친절했어요. 저를 응접실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손을 놓친 거예요.”
“그래?”
리처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 어린것은 여전히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른다고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비웃음에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도로테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덧붙였다.
“언니가 그랬거든요. 언니의 소중한 사람이 로즈궁 깊숙이 있는 지하 두 번째 방에 갇혀 있는데, 그분을 풀어 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했어요!”
자랑하듯 재잘대는 손녀의 말에 그녀를 안아 든 후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하얗게 질린 리처드를 보는 후작의 눈길이 심상찮았다.
만일 이 자리에 황제가 없었더라면.
가까스로 참은 분노를 기어이 터뜨리고 감옥에 가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를 만큼 그는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폭탄을 떨어뜨린 도로테아가 기분 좋게 다리를 달랑거렸다.
슬슬 몰려오는 잠기운에 하품을 하려던 찰나 이제껏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윌이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의 말이니 그저 공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나, 확인은 해 보아야겠지요. 제가 지금 바로 3황자의 궁 지하로 가서 그 존재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폐하, 그건…….”
리처드가 뭐라 변명을 하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다가서자 황제가 냉정하게 그를 뒤로 물렸다.
“좋다. 윌리엄, 네가 직접 조사해 보도록 하라.”
“예.”
몇몇 기사들과 함께 먼저 윌리엄을 떠나보낸 황제의 시선이 다시 도로테아에게 향했다.
“후작에게는 오늘 일을 사과해야 할 듯싶군. 자식 놈들끼리 헐뜯고 싸우는 꼴 따위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말이야.”
씁쓸한 목소리에 후작은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송구합니다.’라거나 혹은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끝끝내 뱉지 않는 노후작을 바라보던 황제가 불쑥 제안했다.
“그 아이를 황녀의 놀이 상대로 들이는 건 어떠한가?”
“폐하.”
“아이의 출신은 내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 테고, 귀족들 중에는 과격한 공격을 행하는 이들도 있을 걸세. 황녀의 소꿉친구이자 놀이 상대라는 지위가 그 모든 것을 상쇄해 줄 터인데.”
“그 대신 또 다른 소용돌이에 아이를 밀어 넣는 꼴이 되겠지요. 폐하, 부디 그 말씀만큼은 거두어 주십시오.”
노후작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야 겨우 품에 안은 손녀를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강인한 눈동자가 황제를 마주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에 땀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저희 가문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할 것입니다. 출신이 어쩌니 하는 말이 나오더라도, 결코 아이의 앞에서 그걸 지껄일 간 큰 자가 존재하지 않도록.”
하긴, 그 하이클레어 후작가와 대놓고 척을 지려고 할 만큼 간 큰 자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
그러나 황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
단호한 거절에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정말 아이를 아낀다면 누가 궁에 아이를 들이고 싶겠나.”
이 더럽고 끔찍한 공간 안에.
황제의 얼굴이 새삼 씁쓸한 빛을 띠었다.
“그저 아까의 유쾌함이 즐거워, 어쩌면 후작의 손녀가 이 궁에도 유쾌함을 불어넣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여겼을 뿐이야. 내 생각이 짧았군.”
그는 미련을 털어 낸 듯 산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걱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네. 걱정 말게. 좀 전의 말이라면 내 거둘 테니.”
“폐하의 하해와 배려에 망극할 따름입니다.”
굳어 있던 황제가 옅은 미소를 띠며 도로테아를 향해 인사했다.
“알현은 이것으로 충분하네. 원한다면 이제 퇴궁해도 좋아.”
“알겠사옵니다, 폐하.”
“3황자 궁으로 가지.”
황제의 말에 곁에 있던 수행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앞장섰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남은 것은 루크와 후작, 그리고 도로테아뿐이었다.
“7황자 전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빚을 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갚은 것뿐입니다.”
“늙은이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손녀입니다. 설사 황자 전하께서 다른 이유로 도왔다 하셔도, 제게는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후작의 말에 루크는 인사치레는 충분히 받았다는 듯 말을 돌렸다.
“황후궁에 가면 이 아이는 아마 또 원치 않게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붙잡혀 다른 이유로 궁에 머무르도록 강요당할지도 모릅니다. 부인을 모셔 오시지요. 제가 여기서 이 아이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
후작의 시선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의지와 다르게 감겨드는 두 눈과 연이어 하품을 하는 앙증맞은 입을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아이를 맡기겠습니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후작이 자신의 품에 웅크리고 있는 손녀를 루크에게로 넘겼다.
올해 열다섯이라는 전장의 영웅은 아주 능숙하게 도로테아를 받아 들었다.
꼭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한 것처럼 당연하게.
* * *
“궁금한 것이 있다.”
후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루크의 입이 열렸다.
소년 황자는 자신의 두 눈에, 눈을 부비고 있는 도로테아를 담았다.
이 조그만 아이가 상황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원래도 리처드가 제대로 된 벌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3황자인 동시에 황태자의 비호를 받는 동복동생이었으며, 시녀는 인질로 잡혀 있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 어떤 것도 발설하지 않았을 테니까.
“정말로 널 데려갔던 시녀가 그렇게 이야기했었나.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갇혀 있는 장소를 줄줄이 읊었어?”
도로테아는 루크의 물음에 눈을 끔뻑이다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내가 추궁했을 때 그녀는 분명 협박받아 겁을 먹은 눈치였지만, 가족의 행방을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으음.”
기지개를 켜듯 내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살짝 편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집요한 시선이 그녀를 쫓자, 도로테아는 짙은 미소와 함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때로는 산 사람보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천금 같은 정보를 갖고 있는 법이야.”
섬뜩할 만도 한 대답에 루크는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납득한 얼굴을 한 소년이 나지막이 물었다.
“지하에 갇혀 있던 자는 그럼 죽은 건가?”
이 황자는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게다가 담도 크고.
신분만 아니었다면 나의 다리가 되어 줘도 괜찮았을 텐데.
도로테아는 아쉬움을 담아 미소를 보냈다.
아무 말도 담지 않은 침묵이었지만 그 안에서 답을 찾은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형님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시겠군.”
이미 화풀이라면 충분히 했다.
앞으로 볼 것도 아닌 사이에 더 큰 원한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가 처벌을 받든 아니든 이제 이다음 상황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일이다.
“그자의 죽음은 진실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자는 그 어떤 거짓도 반박할 수 없고, 자신을 위해 증언할 수 없으니까.”
“응, 그렇겠지.”
맞장구치는 그녀를 보며 뜸을 들이던 루크가 덧붙였다.
“그러니 죽는 것은 손해지.”
“그렇겠네.”
루크는 체력이 떨어져 덜덜 떨리는 소녀의 다리와, 열이 나기 시작한 미지근한 몸뚱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죽지 마라. 누군가로 하여금 너를 더럽히게 두지 마.”
생각했던 것보다 이 소년은 자신에게 정을 주었던 모양이다. 고작해야 지나가다 몇 마디 훈수를 둔 것이 전부였는데.
퍽 간절해 보이는 말에 도로테아는 그저 웃었다.
“괜찮아. 난 죽을 생각 따윈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처음으로 무뚝뚝한 황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이나마 올라갔다.
저 멀리 후작과 후작 부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후작의 부탁대로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적에 도로테아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덤덤히 승인해 줬을 뿐.
다가오는 황녀의 열 번째 생일을 맞아 도로테아를 놀이 친구로 들일 것이라는 예상이 파다한 가운데 나온 황제의 행보는 사람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시 그 아이가 그리 괜찮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출신이 출신인 만큼…….”
“그러고 보니 7황자께서 그 아이와 우연히 연을 맺었다 하지 않았던가? 후작에게 손녀가 생겼다는 것을 알린 것도 7황자라 들었는데.”
“그럼 황자의 얼굴을 봐서 잠깐 대면한 것뿐일지도요.”
“후작도 귀찮게 됐군. 황자가 끼어 있으니 손녀를 아끼든 아니든 간에 감싸고돌아야 하잖아.”
몇몇 악의적인 말들이 오고 가기도 했지만 후작의 ‘손녀’는 저택에 틀어박힌 채 외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녀와 만나 본 사람은 손에 꼽는 데다가, 그마저도 후작의 당부가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바람에 궁금증은 퍼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다.
손녀를 저택에 들인 지 두 달 만에 후작가 저택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어 나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어린 자식들이 한꺼번에 아프기 시작했고, 노부인의 병이 더욱 심해졌으며, 자꾸만 불길한 사고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거였다.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얼쩡거리던 탐문꾼 하나는 저택에서 하얀 유령을 보고 기절했다는 경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윽고 도로테아가 후작의 저택에 들어온 지 세 달째부터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후작이 들인 손녀가, 마족에게 홀려 밤마다 사람들을 해치고 저주를 건다는 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