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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24)화 (24/242)

혼술사 도로테아 24화

꾀죄죄하던 일행들은 여러 과정을 거쳐 근사하게 변모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저택 사용인들의 손을 거치자, 외형만 보면 당장 밖에 나가서 귀족 나으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가씨, 제가 이런 걸 입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묶은 제인이 원피스의 밑단을 만지작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병색이 짙은 도로테아와는 달리 혈색이 좋은 제인은 제대로 된 손길을 받자 그 누구보다 예쁜 소녀가 되어 있었다.

“괜찮아. 한 벌 정도는 있어도 되잖아.”

“저는 아가씨의 하녀일 뿐인걸요.”

제인의 말에 옆에 있던 시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녀라면 이 저택에 차고 넘쳤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아가씨를 모실 수 있도록 훈련된 이들이 줄을 섰을진대, 출신도 알 수 없는 바깥의 아이를 들일 수는 없었다.

못마땅한 시선을 받은 제인이 움츠러드는 것을 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뗐다.

“괜찮아. 넌 나를 도와 특별한 일을 해야 하니까.”

사람들은 낯선 것을 경계하고 미지의 힘을 두려워한다.

도로테아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조차 자신은 천덕꾸러기인 동시에 두려움과 꺼림의 대상이었거늘, 이계에서는 하물며 어떤 대접을 받게 되겠는가.

함부로 힘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로테아가 제인을 향해 다시금 웃었다.

“걱정 마. 네 역할은 언제든 내 옆에 있는 거야.”

시녀장이 못마땅한 시선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후작은 도로테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예외’로 취급하고 있었다.

저택에 엄격히 통용되던 규율이 전부 그녀로 인해 뒤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저택을 책임지는 시녀장이라고는 하나, 그런 도로테아의 말에 함부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다소곳이 물러나 있는 이들을 혼란스레 훑어보던 도로테아의 ‘가족’들은, 시종이 전해 온 뜻밖의 말에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후작 내외분께서 여러분을 만찬 자리에 초대하셨습니다.”

“저, 저도 말입니까?”

우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시종이 예의 바른 어조로 ‘네, 그렇습니다.’하고 답했다.

도로테아는 앙상한 손으로 굳은 그를 토닥여 주었다.

비록 불손하긴 해도 그는 자신의 권속이었다.

주인 된 자로서, 아래에 속한 미물들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

그가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은 그녀가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 당신 이야기는 이미 다 했으니까.”

“뭘 했다는 거냐……?”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도로테아가 활짝 웃었다.

“당신이 탈영병이라는 사실, 다들 알고 있어.”

“…….”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린 우드는, 탈영병이라는 단어에도 놀라기는커녕 미세한 동요조차 없는 주변의 사용인들을 보고 절망했다.

탈영은 중죄였다.

하물며 후작처럼 병권(兵權)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면 즉결 처형 또한 가능했다.

도주하던 탈영병을 추적하던 중에 처리했다고 한다면 누가 문제 삼겠는가.

‘살려 준다 어쩐다 하더니, 여기 데려와 죽일 생각이었냐.’

후작의 단호한 성정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우드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벤은 자신과 여태 함께한 남자가 탈영병이었다는 사실에 놀라 다시 굳어 버렸다.

그 가운데에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은 도로테아 한 사람뿐이었다.

*   *   *

지옥 같은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후작 내외와 펠릭스, 그리고 에이든이 참석한 맞은편에 어색하게나마 앉은 세 사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도로테아만이 -도대체 왜 그녀가 상석에 앉아 있는지는 모른다- 여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후작이 먼저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둘째인 콜린까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아이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의 저택에서 요양 중일세.”

벤이 허둥지둥 답했다.

“기, 기회가 되면 제가 찾아뵙고 도로테아를 무사히 데려다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시게.”

덤덤하게 대꾸한 후작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는 우드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차례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 본 우드는 해탈한 얼굴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래, 여동생의 한을 풀어 줬으니 나름 좋은 인생이었다.’

그의 눈길이 슬쩍 도로테아에게 향했다.

어린 소녀에게 농락당한 채 끝을 맺는 건 아쉽지만 상대는 후작이었다.

발버둥 칠 만한 의욕조차도 나지 않았다.

“자네의 일이라면 테아를 통해 들었네. 어떤 것을 원하는지 몰라 아직 군적(軍籍 : 군에서 관리하는 이름과 신분)을 말소하지 않았네.”

“……예?”

“복귀를 하고 싶다면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울 테고, 그게 싫다면 전역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담담한 말이었지만 파격적이었다.

군에서 도망친 탈영병에게 무사 복귀, 혹은 전역을 시켜 준다니.

“그렇게 되면 후작님께서는 군법을 어기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나도 나이가 들었네. 언제까지나 꼬장꼬장하게 굴 수는 없지. 하물며 자네의 사정을 들으니 더더욱.”

“…….”

우드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탈영한 소년병을 잡아 가두고, 그 소년병을 신고한 병사까지 ‘군인으로서 의를 저버렸다.’는 명목으로 똑같이 감옥에 가두어 처벌했던 것이 고작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물론 탈영치고는 처벌이 약소하긴 했지만…….

보다 못한 황제가 너무 인간미 없다며 말을 몇 마디 얹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궁을 나와 버린 후작이, 그 후작이…….

“할아버지, 이거 드세요.”

“오냐.”

잔뜩 풀린 얼굴로 도로테아가 멋대로 넘긴 야채를 집어 꼭꼭 씹어 먹으며 자신을 위해 군법을 어기겠다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아이가 후작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자신은 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검을 들었고, 그것을 수습해 주다 도로테아한테 코가 꿰었다고 하지만, 누구 앞에서든 당당한 이 나라의 후작이 도대체 왜…….

옆에서 조용히 식사하고 있던 장남, 펠릭스 하이클레어가 의견을 냈다.

“어차피 도로테아의 곁에 둘 사람이라면 군적에 남기는 것보다 정식으로 훈련을 시켜 기사 작위를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푸흡!”

우드의 입에 있던 물이 분수처럼 튀어 나갔다.

그 물을 맞고도 전혀 불쾌하지 않은 에이든이 껄껄 웃었다.

“내 저놈이 몸 쓰는 것을 보았는데 제법 소질이 있더이다. 형님, 훈련이라면 제게 맡겨 주시오!”

이미 넋을 놓은 우드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벤이 마음을 다잡았다.

어린 딸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 참극을 마치 하나의 놀이처럼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후작가였다.

이것이 정말 환대인지 아니면 환대를 가장한 핍박인지 명확한 계산이 서질 않았다.

“아빠.”

도로테아는 즐거운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같이 살자고 해야 할 텐데.

심약한 아버지는 지금도 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큰일이었다.

그녀가 생글거리며 웃자 상황을 살피던 후작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친김에 말을 꺼내지 않으면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후작가에 입적시키기로 했다네.”

“…….”

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도로테아는 제 아이입니다.”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절한 벤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엘렌의 일로 상처받으셨음을 압니다. 제 잘못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로테아는, 테아는 제 아이입니다……!”

“누가 자네 아이인 걸 모른다고 했나?”

후작이 멋쩍은 얼굴로 물을 들이켰다.

후작 부인이 웃는 얼굴로 살며시 후작의 팔을 두드렸다.

“그러게, 너무 무겁게 말을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요.”

도로테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작에게 다시 한번 먹기 싫은 브로콜리를 넘겼다.

장식으로 나온 생브로콜리를, 손녀가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잘근잘근 씹기 시작한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테아는 자네가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했지.”

벤이 흔들리는 눈으로 생글거리는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았다.

바싹 마른 얼굴에 걸린 옅은 미소를 본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며칠 잘 지낸 덕일까, 어린 딸은 자신의 저택에 머물 때보다도 훨씬 더 생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도로테아가 사신을 삼켜 그 힘을 취한 덕이었지만.

“폐하께 말씀을 올려 자네에게 작위를 내릴까 생각 중이네. 그러면 도로테아의 아버지로서 어깨를 펴고 이 저택에 있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저는 떠돌이 상인에, 준귀족조차 되지 못한 평민입니다. 제가 어찌…….”

옆에 있던 에이든이 너털웃음과 함께 펠릭스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보시오. 거 우리 형을 너무 무시하는데, 형이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귀족 작위 뜯어 오는 건 일도 아니라오.”

“떨어져라.”

펠릭스가 냉정하게 동생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고는 무뚝뚝하지만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까지는 좀 어려워도, 몇 번 일을 거치면 신분 세탁을 통해 자작까지는 가능할 겁니다.”

“…….”

지금 그 펠릭스 하이클레어의 입에서 신분 세탁이라는 말이 나온 건가?

심지어 자작이라고?

나이프를 든 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넋 나간 사람들을 구경하던 도로테아는 이내 그조차 시들해졌는지 눈앞의 빈 접시를 밀어내며 요구했다.

“디저트 먹고 싶어요.”

“오냐, 오늘은 과일 타르트를 준비했다더구나.”

후작의 다정한 말에 도로테아는 기쁜 듯 웃었다.

후작 부인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표정이 풀린 펠릭스가 한마디 더 얹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동생이, 엘렌이 고른 남자입니다. 그만한 능력은 보여 줄 거라 믿습니다.”

*   *   *

가족들이 모두 저택에 자리를 잡게 되자, 도로테아는 이곳을 자신의 ‘터’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술사에게 ‘터’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멋대로 힘을 쓰면 안 되니…… 귀찮긴 하지만.”

이렇게 밤중에 움직일 수밖에.

도로테아의 발이 바닥에 닿자, 구석에서 놀던 피피가 쪼르르 달려와 어깨 위로 올라왔다.

“재밌는 곳이 있었어? 볼만한 것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어루만지는 손길에 다람쥐가 기분 좋은 듯 도로테아의 뺨에 제 볼을 비볐다.

“이곳에는 칠성이 없으니 터를 보기 위해서는 좀 더 귀찮은 일들이 많을 테지.”

도로테아가 앙상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앞에 어김없이 잠들어 버린 기사와, 혼란스러운 표정의 우드가 있었다.

아직 잠기운을 완전히 날려 버리지 못한 권속은 도로테아를 보고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여기…….”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자그마한 소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네가 미친 건가. 꿈결에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맞아. 내가 널 불렀어.”

뒷짐을 진 소녀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백금발 머리카락이 푸스스 어깨로 흘러내렸다.

시녀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이제야 조금 윤기가 나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을 밝혀 주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드가 멍한 얼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어떻게 불렀…….”

“여전히 덜떨어졌구나.”

도로테아가 그녀의 눈높이에 있는 단단한 다리를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이제 가자.”

“어, 어딜?”

“이 터를 살피러.”

얼마나 쓸 만한지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견고하게 만들어 주어야지.

도로테아의 말에 남자는 홀린 듯 조그마한 소녀를 품에 안아 든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한밤중에 복도를 돌아다닌 두 사람이 저택의 수많은 보초들과 마주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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