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20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콜린은 이를 바드득 갈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던 이들이 도망을 치려는 기색을 눈치채고 빠르게 접근해 왔다.
황자는 말 위에 올라탄 채 그 자리에서 가만히 도로테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야. 내가 쟬 어떻게 구해 줬냐면…….”
“이야기는 나중에!”
종알대는 도로테아의 입을 막은 콜린이 혀를 차며 재빠르게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기 시작한 그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쟨 변함없이 배은망덕하구나. 내가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그 입 좀 다물거라, 제발!”
콜린이 숨을 헐떡이며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황자를 마중하기 위해 나온 수많은 인파들 덕에 도망치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민간인을 해칠 수 없기에 기사들의 걸음이 느려지는 틈을 타 콜린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좁은 골목들을 돌고 돌아 가까스로 기사들을 따돌린 그가 사람 없는 폐가로 들어섰다.
그제야 그는 도로테아를 내려놓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라. 무슨 짓을 한 거냐.”
“목숨을 구해 줬다니까.”
“됐다. 네 말은 신빙성이 없어. 황자와 처음 만났던 이야기부터 해라.”
그가 손을 들어 도로테아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내자, 잠시 입을 삐죽이던 소녀는 이내 순순히 답하기 시작했다.
“걔가 다쳐서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나랑 마주쳤어.”
“강에서 목욕을 했다고?”
“피투성이였거든. 씻으려고 한 거겠지.”
콜린이 눈을 찡그렸다.
도대체 황자가 어쩌다 도로테아가 갈 법한 강에서 목욕을 했고, 그녀는 그런 황자와 마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 같으면 날이 밝고 따뜻할 때 씻었을 텐데. 한밤중에 몰래 씻더라고. 부끄럼을 엄청 많이 타나 봐.”
“……몰래 씻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그 황자와 마주친 게냐?”
“그거야 내가 몰래 걔한테 다가갔으니까?”
“…….”
그것부터가 문제잖아.
콜린의 눈썹이 실룩였다.
소리를 치려던 그가 가까스로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눈을 끔뻑이고 있는 도로테아를 향해 물었다.
“몰래 접근해서 어떻게 했느냐?”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길래 다쳤냐고 물어봤지.”
“잠깐. 너는 황자가 목욕하는 걸 목격하고선 한창 씻고 있는 도중에 다가가 그걸 물어봤단 말이냐?”
“응.”
“그럼 황자의 알몸을 보았느냐?”
“응, 그런대로 괜찮더라.”
괜찮…….
조그마한 조카를 내려다보던 콜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니까 이 맹랑한 계집아이는 상대가 심상찮은 인물인 것을 알면서도 씻고 있는 황자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단 말인가.
게다가 전장에서 지휘를 맡은 황족의 부상 여부는 결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밀로 분류되는 사항이니까.
눈을 끔뻑이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콜린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먼지 가득한 폐가 안쪽에는 버려진 상자들이 그득했다.
몇 번 상자들을 뒤적이던 그가 가장 안쪽에 있는 상자를 열어 도로테아를 숨겼다.
“조용히 하고 있어라.”
“…….”
“내 곧 데리러 오마.”
도로테아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콜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의 머리 위로 쌓인 뚜껑을 슬쩍 밀어냈다.
그러고는 찍찍대는 다람쥐와 함께 씩씩하게 걸어 밖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콜린의 당부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 * *
“아까 분명 봐 두었던 게 있는데…….”
도로테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가를 두리번거렸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비쩍 곯아 있는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콜린의 품에 안겨 도망칠 때 눈여겨보았던 상점을 찾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 나는 만큼 장사꾼들도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그중에서도 도로테아는 달콤한 간식거리를 파는 상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앙상하고 조그만 데다, 행색도 그저 그런 도로테아를 보는 상인의 눈길이 심드렁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구경하는 도로테아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살 거면 얼른 고르고, 아니면 저리 가거라.”
주변을 얼쩡거리며 콩고물을 받아먹으려는 아이들이 거리에 넘쳐 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돈을 받아 올 것을.”
수중에 한 푼도 지니고 있지 않은 도로테아는 결국 눈앞의 간식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반짝이는 세공품들을 파는 상인도 있었고, 어린 동물 새끼들을 파는 상인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돈이 없는 도로테아를 반기지는 않았다.
“어떻게 한다?”
도로테아가 버려진 나무 상자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모자를 푹 눌러 쓴 아이 하나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꾀죄죄한 차림새로 조심스럽게 접근한 소년은 기껏해야 도로테아보다 서너 살 더 많아 보였다.
“집에서 도망 나왔냐?”
“…….”
“부모님이 널 괴롭히셔?”
투박한 말투였지만 그녀를 향해 내민 손에는 딱딱한 검은색 빵이 있었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거나한 상차림을 받았던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거라도 좀 먹든가. 노점상을 기웃거려 봤자 뭘 얻을 수는 없을 거야. 저 인간들은 우릴 사람 취급도 안 하거든.”
내민 빵을 받아 들자 까끌까끌하고 단단한 느낌이 났다.
어깨를 타고 내려온 피피가 순식간에 빵을 향해 이를 들이밀었다.
“으앗!”
놀라 펄쩍 뛴 소년은 어느새 빵을 갉아먹기 시작한 다람쥐를 보고 입을 벌렸다.
“고마워. 피피가 좋아하네.”
“이, 이걸…… 기껏 준 걸 고작 쥐새끼를 주겠다고……!”
그의 눈에 스며든 모멸감과 분노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필요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기껏 주었으니 받았고, 심지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는데 모욕이라도 당한 양 부들부들 떠는 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맛있게 먹고 있으니 좋은 거잖아.”
소년이 삿대질했다.
“너, 어디 모자라냐?!”
“그런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병약하다는 것과 모자라다는 말에는 꽤 큰 차이가 있으니까.
“하아, 기껏 오랜만에 새로운 녀석이 나타나서 말이나 걸었던 건데. 사람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머저리였구나.”
도로테아를 보고 독한 말을 퍼부은 소년이 한숨을 푹푹 쉬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난 레번이야. 넌?”
“도로테아. 이쪽은 피피.”
“그 쥐는 아무래도 됐어. 너 갈 곳 없지?”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번은 인심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꺼냈다.
“너 제법 운이 좋았어. 그런 꼴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잘못하면 치안대에 걸려서 교화소나 신전 고아원으로 가게 되거든. 너도 알겠지만, 그곳은 거의 생지옥이야.”
겁을 주듯 으르는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교화소? 신전의 고아원?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는 익숙지 않은 명칭들이었다.
“알지? 신전에서는 매일매일 교리를 외워야 하고, 복잡한 예법까지 모두 다 지켜야 하고, 그 좁은 건물 안에 갇혀서 쓸데없이 신 따위에게 하루 종일 기도나 올려야 한다는 거.”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네.”
이미 그것과 비슷한 삶을 전생에 겪었던 도로테아가 순순히 인정하자 레번은 더욱 신이 난 듯 말을 술술 이어 나갔다.
“차라리 우리 패거리에 들어와.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굶지도 않고 가끔씩 괜찮은 간식도 얻어먹을 수 있어.”
“됐어. 난 어디 들어가는 거 안 좋아해.”
“그러지 말고…….”
레번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도로테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약해빠진 도로테아의 몸은 비슷한 덩치를 가진 소년의 힘조차 이겨 내지 못하고 세 걸음이나 질질 끌려갔다.
골목 안으로 몸이 반쯤 끌려 들어간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눈을 빛내며 도로테아를 기다리던 ‘패거리’들의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렸다.
“누구야!”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려는 훼방꾼을 향해 짜증 섞인 외침을 지른 레번이 상대를 확인하고는 새하얗게 질렸다.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패거리들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다.
레번 또한 빠른 발놀림으로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전부 치안대에 넘기도록. 근처에 한패가 있을 거다. 그들까지 모두 잡아넣어.”
“예!”
딱딱한 명령에 주변 기사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황자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가 인상을 쓰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꽤 많은 이들의 품에 안겼지만 이 황자만큼 서툰 손길은 처음이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 불편하고 아팠다.
“내려 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침묵하던 상대가 천천히 그녀를 내렸다.
투구로 반쯤 얼굴을 가린 황자, 루크가 도로테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그리 오랜만은 아닌데.”
불퉁하게 답하는 목소리에 루크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군. 왜 그러지?”
“너 때문이잖아. 너만 만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걸.”
‘너’라는 명칭에 주변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황자를 상대로 짧은 말에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 비쩍 곯은 아이를 처형해야 마땅하나, 당사자인 황자가 가만히 있는데 검을 드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다.
침묵하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넌 변함없이 눈에 뵈는 것이 없군.”
“아까 날 왜 찾았어? 너 때문에…… 삼촌이 날 두고 갔잖아.”
도로테아의 말에 황자가 뒤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곁에 남아 있던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물러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도로테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네 말이 옳았다.”
“…….”
“내게 목걸이를 건넨 자는 나를 노리던 이들의 하수인이었어.”
도로테아의 말간 눈이 그를 향했다.
몇 달 사이 다시 보게 된 소년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계집아이처럼 곱상한 얼굴도, 전장에서 구르며 뼈와 혼에 새겨졌을 살업의 기운도.
다만 소년의 눈빛은 몇 달 사이에 변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깊어져 있었다.
“설마 내 유모까지도 매수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 사람을 많이 아꼈구나.”
“그래.”
“그렇지만 죽였을 테고.”
“…….”
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로테아는 그의 침묵 속에서 답을 읽어 냈다.
그 누구나 그렇겠지만 의무와 책임이 막중한 황족에게,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하는 유모는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망설임 하나 없이 처단해야 하고, 또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소년의 마음조차 멀쩡하다는 건 아니었다.
깊어진 눈 너머로 부서진 마음이 느껴졌다.
‘위로하는 법 따윈 모르는데.’
누군가를 대신하여 액을 받는 법이나, 누군가의 욕망이 이뤄질 수 있게 자신의 명을 태워 돕는 법이라면 알아도.
그의 슬픔에 어색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라 믿었던 자로부터, 철저하게 기만당하는 순간을.
그녀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꺼냈다.
“잘했어. 수고했어.”
루크는 손을 뻗어 자신의 무릎을 토닥여 주는 고사리손을 내려다보았다.
“넌 변함없이 불손하고 무엄하군.”
픽 웃은 황자는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춘 뒤 손을 내밀어 도로테아의 볼에 묻은 먼지를 닦아 주었다.
“네 정체가 뭐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삶이나, 이곳으로 떨어지게 된 기이한 인연들을 설명하기에는 어려웠다.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도로테아.”
“도로테아.”
“응, 난 도로테아야.”
그녀의 이름을 되뇐 황자가 다시금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황자 전하!”
다급한 발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창백한 얼굴의 낯선 남자가 등 뒤에 기사들을 끌고 이곳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곁에 도로테아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콜린이 함께 있었다.
‘어디 가지 말고 있으랬지!’
타박의 눈초리를 읽은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콜린이 데려온 중년의 남자 뒤로 건장한 기사들이 우르르 따랐다.
본 적 없는 인물이지만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황자 전하, 부디 저희 가문의 아이를 놓아주십시오!”
남자의 말에 일순간 주변의 공기가 굳었다.
모두의 시선이 작고 깡마르고 보잘것없는,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