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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9)화 (19/242)
  • 혼술사 도로테아 19화

    성의 검문소 앞에 가득 늘어선 줄에도 불구하고 도로테아 일행이 탄 마차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지키던 병사는 마부가 꺼낸 물건을 보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통과를 외쳤다.

    순탄하게 성으로 들어가게 된 상황과는 달리, 마차 안의 분위기는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마차의 주인인 남자는 시종일관 생글거리고 있었다.

    원래 인상 자체가 냉랭하진 않았지만 부드럽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독 낯빛이 밝고 혈색이 좋은 것이,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 반강제적으로 앉혀진 콜린이 불편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콜린과, 그런 그를 흐뭇하게 보는 남자.

    도로테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주무셨군요.”

    “간만에 쾌적한 밤이었다.”

    흐뭇해하는 남자의 말에 콜린의 얼굴에 모멸감이 스며들었다.

    인간의 거죽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데, 밤새워 제 근처에서 새근거리며 잠든 놈 때문에 마음이 세 배는 더 심란했다.

    게다가 실컷 자고 일어난 뒤로부터 콜린을 향한 놈의 시선이 심상찮았다.

    진득하고 집요한, 갖고 싶은 것이 생긴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이클레어의 2공자께서 이리도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여전히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콜린이 창백한 얼굴로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저와 진지하게 친우로서 교분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이래 봬도 또래 중에서는 제법 유망한 편인데요.”

    “됐습니다.”

    단호한 거절에도 남자는 실망하지 않은 눈치였다.

    도로테아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바라보며 찍찍대는 신기를 쓰다듬었다.

    여유로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콜린은 발끈했지만, 좁은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하물며 남의 호의에 얹혀 가는 신세에서는 더욱더.

    *   *   *

    성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으슥한 골목 어귀에서 마차가 멈췄다.

    주변을 맴돌던 질 나쁜 건달들은 마차를 지키는 검사들을 보고 줄행랑쳤다. 빌어먹고 살아온 이들은 오래 구른 경험만큼이나 ‘건드리면 안 될 자들’에 대한 판단도 빨랐다.

    “이곳에서 곧장 저기 있는 후문으로 들어가면 될 게다.”

    일부러 규모가 있는 여관의 후문과 가까운 골목을 골라 내려 준 것이다.

    성문을 함께 통과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하룻밤의 숙면이 그에게 필요 이상의 호의를 갖게 만든 것 같았다.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결국 남자의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젯밤 콜린으로 인해 맛본 달콤함을 그가 잊을 리 없으니까.

    결국 스스로 그녀를 찾아오게 되리라.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도로테아를 보다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

    “무엇이요?”

    “네 외숙부를 내 곁에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의 강렬한 눈빛에 콜린이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를 곁에 둔다면, 그 또한 자연스레 내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도로테아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흔적이 혼에 가득 남아 있는 남자.

    아마도 꽤 전부터 그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현실과 꿈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왔으리라.

    그에게 지난밤의 단잠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평생이라도 쫓고 싶은 안락한 오아시스가 아니었을까.

    불면이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니까.

    “은인께 진 빚은 갚을 겁니다. 그러나 저를 곁에 두실 수는 없어요.”

    의지 없이 남의 인형으로 사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누군가의 ‘액막이’ 노릇은 이제 사양이었다.

    “저를 강제하신다면 원하는 평온은커녕, 오히려 끔찍한 결과를 얻게 되실지도 몰라요.”

    은혜를 입은 것이지, 족쇄를 찬 것이 아니다.

    도로테아가 흘끗 남자를 훑었다. 이미 균열이 잔뜩 가 있는 혼의 틈을 벌리고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녀를 강제하려 든다면 더더욱 못 할 것 없고.

    남자는 그녀의 경고를 듣고 웃었다.

    “하룻밤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데, 이를 어쩌나.”

    “욕심을 버린다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어도 천천히요.”

    콜린은 임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줄이며 오랜 시간 정양한다면 사내의 문제는 어차피 알아서 해결될 터였다. 하다못해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종교에라도 귀의한다면.

    ‘그렇지만 아마 불가능한 이야기겠지.’

    남자의 눈은 열망하고 있다.

    무언가를 갖고자 욕망하고, 필요해서 욕망하고, 또 지금의 자신을 바꾸고자 욕망하고.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찬 이의 삶이 조용할 리 없었다. 분명 혼의 균열이 수복될 만한 평화는 그의 삶에 없을 것이다.

    “욕심을 버려라? 그건 어렵겠구나.”

    “네.”

    눈앞의 남자는 지독한 욕심쟁이였다.

    그 무엇도 놓지 않으려 하고 또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도로테아의 충고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나는 너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보내 줄 수밖에 없겠구나.”

    “현명한 판단이세요.”

    정 안 되면 남자의 혼을 버리고 제2의 콜린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던 도로테아로서는 성가신 일이 줄어 좋았다.

    “그럼 또 만나자,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남자가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우리 콜린 경 또한.”

    마지막으로 진득한 시선을 받은 콜린이 몸서리치며 얼굴을 구겼다.

    마차가 떠나고, 도로테아는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우울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신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주머니에 있던 신기가 튀어나와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이를 삑삑 비웃었다.

    *   *   *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신은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백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며 이런 굴욕은 없었다.”

    “음, 오래 일을 하다 보면 원래 이런 일 저런 일 겪게 되는 거야.”

    마치 자신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처럼 도로테아가 콜린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먹고 잘 살면 되잖아.”

    여러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인간’ 콜린 하이클레어의 지위는 꽤 높아 보였다.

    고급스러운 의복에 언제든 부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도로테아의 말에 콜린이 눈을 부라렸다.

    “잘 먹고 잘 살기는 개뿔.”

    인간이 된 첫날부터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 몸이 의뢰해 둔 암살자에게 쫓기고, 겉모습만 멀쩡한 사내 곁에서 같이 잠을 청해야 하는 굴욕까지 겪었는데.

    도로테아는 씨근덕거리는 콜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 줘.”

    콜린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지못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좋든 싫든 간에 이 몸에 들어와 생을 이어 가게 된 이상, 그는 도로테아의 ‘삼촌’이라는 신분을 갖게 된 동시에 그녀의 권속이었다.

    “저택까지 가까워?”

    “마차를 부르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 없어?”

    “부르기에 충분하지 못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저택이 있으니 걸어가지.”

    머릿속에 스며드는 기억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도로테아는 자신을 안아 든 채 사람들 사이를 거니는 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

    “이 몸의 주인. 악행을 꽤 많이 쌓았다. 이대로라면 카르마가 이 삶을 집어삼킬 게야.”

    “카르마라…….”

    ‘일종의 업과 같은 것인가.’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깐 채 콜린의 말을 경청했다.

    “기껏 맞아들인 아내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핍박하더니, 자식 놈까지 손찌검했더군.”

    “저런.”

    “자신보다 낮은 자들을 밟는 것에 가차없고, 높은 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혈안이 된 자였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카르마를 쌓았지.”

    애초에도 동정의 여지는 없었지만 들을수록 더했다.

    아마 그녀가 ‘콜린’이 다른 삶을 얻을 기회조차 없도록 혼을 태우고 소멸시켜 버린 것을 후회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사람이 참 많네.”

    도로가 좁지도 않은데 통행하는 이들로 인해 아비규환이었다.

    시끌벅적하고 번잡스러운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며 콜린또한 위화감을 느낀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번화가라지만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군.”

    인간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런 경우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공기가 분명 평소와는 달랐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점점 더 성문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빨리 귀환하는 것이 좋겠다.”

    “저거 먼저 먹으러 가자.”

    경계하듯 주변을 살피는 콜린과 달리 도로테아는 태평했다.

    저택을 나와 처음으로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를 제대로 구경하게 된 만큼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콜린은 형형색색의 자극적인 길거리 음식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도로테아를 향해 혀를 찼다.

    “귀족 영애답게 좀 굴어라.”

    명색이 대 하이클레어 가문의 여식이 되어서 하는 행동은 길거리 출신처럼 별 볼 일 없는 계집아이 같다니.

    콜린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도로테아는 결국 원하던 빵과 구운 새고기를 손에 들었다.

    먹을 것을 손에 든 채 목을 쭉 빼고 주변을 구경하는 그녀를 향해 콜린이 쏘아붙였다.

    “가만 좀 있거라.”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리를 달랑거리던 때였다.

    성문 위에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주변에서 귀가 떨어질 듯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승전이요! 7황자께서 승전하고 돌아오시는 길이요!”

    북적대던 길 위로 사람들이 한차례 더 쏟아졌다.

    이제는 걷는 것이 힘들 정도로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얼얼한 귀를 매만지며 성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위풍당당한 군인들을 보았다.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말을 탄 채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투구 아래 눈빛이 몹시도 매서웠다.

    ‘어라?’

    반쯤 가려진 얼굴이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눈을 끔뻑이며 젊은 장군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투구를 쓴 채 말을 타고 들어오던 남자와 마주했다.

    체격이 크지 않은 남자의 턱은 수염 하나 없이 매끈했고, 피부는 투명하고 맑았다.

    창백한 안색과, 무미건조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아.’

    도로테아가 그를 기억해 냈다.

    ‘그때 그 재수 없는 싸가지.’

    기껏 목숨을 구해 주었더니 목걸이를 강에다 던지고 가 버린, 그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황자였어?’

    상대도 그녀를 알아본 듯 어느새 당당하게 행진하던 말을 멈춰 세웠다.

    황자의 매서운 눈이 집요할 정도로 그녀를 좇고 있었다.

    “아는 사이더냐?”

    “응.”

    “어떻게 엮인 게야?”

    심상치 않은 표정의 황자가 주변의 누군가를 불러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불안한 예감에 휩싸인 콜린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고민하다 답했다.

    “내가 쟬 살려 줬어.”

    그 순간 황자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도로테아를 향했다.

    이윽고 잘 훈련된 기사들이 형형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와 콜린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결코 은인을 모시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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