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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8)화 (18/242)
  • 혼술사 도로테아 18화

    시간이 지나자 다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시끄럽게 날뛰던 이들을 모두 정리한 남자가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피를 뒤집어쓴 몰골에 놀랄 만도 하건만 도로테아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수고하셨어요.”

    “뭐, 그래. 수고했지.”

    남자가 씩 웃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옷에서 튄 피가 콜린의 뺨에 묻었다.

    혼을 인도하는 사신이라고는 하나, 무수한 죽음을 보았어도 질퍽한 피를 직접 맞은 적은 없었으리라. 비릿한 냄새에 정신을 잃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본 남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를 덮친 이들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냐?”

    “별로요.”

    “산적인 척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퍽 어설펐다. 검을 든 자세가 분명 숙련된 자들이었어.”

    남자의 반짝이는 눈이 도로테아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

    “듣자 하니 어디선가 도망친, 어린 계집이라던가.”

    ‘아…….’

    도로테아의 가늘어진 눈이 콜린을 흘겼다.

    콜린이 ‘대비해 둔’ 수가 하필이면 이곳에 잠복해 있을 줄이야.

    당연히도 저들이 찾아 없애려던 것은 도로테아 본인이었다. 그것도 콜린의 의뢰에 따라.

    ‘결국 또.’

    눈앞의 남자에게 신세 진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였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일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도로테아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은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간밤은 아니었어도 이번엔 네 손님들이 맞는 것 같구나.”

    남자가 즐거운 듯 눈을 휘었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   *   *

    한참을 뒤척이던 도로테아가 이윽고 잠이 들고 나자 숨어 있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낸 것은?”

    “용병들이 맞습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라 외지에서 온 자들입니다. 여러 번 혼선을 두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의뢰인에 대해서도 알아냈습니다.”

    구깃구깃한 의뢰서에 찍힌 인장이 낯익었다.

    콜린 하이클레어

    창백한 낯빛으로 마차에 누워 있는 자가, 바로 도로테아의 죽음을 의뢰한 장본인이었다.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지.’

    오히려 어린 계집을 찾았다는 말에 아이는 짜증 나는 기색으로 콜린을 쳐다봤으니, 분명 그녀의 죽음을 사주한 자가 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셈이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군.’

    그녀가 했던 말도 신경 쓰였다.

    고작해야 자신의 내력을 아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다는 말은 분명 그냥 던진 것이 아니었다.

    “네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다는 걸까.”

    궁금함에 읊조렸지만 잠에 빠진 소녀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차가 덜컹거리자, 백 금발 머리카락이 사르르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그는 손끝에 닿는 푸석한 머릿결에 무심코 얼굴을 찡그렸다. 앙상한 손목과 패인 볼이 신경을 건드렸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손목을 잡아 맥을 확인한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가는 내내 보양식을 들이부어야겠군.”

    아이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메마르고 병약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곧 숨이 멎을 듯한 아이를 두고 검을 들이대는 비정한 숙부와, 이 꼴이 되도록 아이를 방치한 가문까지.

    ‘그 호랑이 굴에 굳이 들어가려 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고.’

    평탄치 못한 삶을 사는 것은 이 아이나 저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입안이 썼다.

    *   *   *

    폭신한 벨벳 담요로 감싸인 도로테아의 앞에 성대한 만찬이 차려졌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의 분홍빛 눈이 깜빡였다.

    맞은편에서는 장난기 어린 눈빛의 ‘은인’이 그녀를 보며 술로 입을 축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느글거리는 음식뿐이구나.’

    정갈한 한식이 그리웠다. 연신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기름지고 느끼한 양식이 그녀의 입맛을 돋우기는커녕 떨어뜨렸다.

    “먹거라. 집에서 먹던 것과 낯설어 그런가? 새 모이만큼 먹고 어찌 고단한 길을 견딜 수 있겠느냐.”

    “고단하지 않아요. 마차를 타는 것뿐인걸요.”

    핏기 어린 창백한 안색을 보던 남자가 코웃음 쳤다.

    그녀는 상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물었다.

    “숙부는 어디 있죠?”

    “옆방에서 곤히 숙면 중이지.”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 진작 깨어났어야 할 콜린은 내내 잠에 취해 있었다.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숙면을 취하는 건지, 취하게 만든 건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추궁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땍땍거리기 전에 잠을 재우는 것뿐이라면 너그러이 넘어가 주는 게 맞았다.

    “네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숙부 때문이냐? 숙부에게도 이와 같은 식사를 차려 주면 먹을 테냐?”

    콜린의 입에 뭐가 들어가든 상관없는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은인께서 드신다면 먹겠습니다.”

    빈속에 술을 털어 넣던 남자가 그녀의 말에 픽 웃었다.

    “내가 먹으면, 너도 먹겠다? 왜? 내가 음식에 무엇이라도 탔을까 봐?”

    “입맛이 없어서요.”

    솔직한 답에 상대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멀뚱히 그런 상대를 보던 도로테아가 가장 덜 기름져 보이는 구운 채소로 손을 뻗었다.

    작은 손으로 포크를 사용하려니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보다 못한 남자가 자신의 포크를 이용해 음식을 집어 도로테아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자.”

    “…….”

    자그마한 입으로 그가 집어다 준 음식이 쏙 들어갔다. 우물거리는 볼을 보던 남자가 이번에는 고기를 잘게 잘라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살다 살다 식사 시중을 들어 보기도 하는군.”

    도로테아는 익숙하게 그의 시중을 받았다.

    남자는 더욱더 흥미로운 듯 그녀를 관찰했다.

    험한 환경에 투덜거리는 일 한 번 없고, 잔인한 장면을 보고도 멀쩡한 것을 보면 곱게 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중받는 것에 익숙하고, 타인을 부리는 데 거침이 없다라…….

    ‘도통 알 수 없는 아이로군.’

    오물오물 음식을 씹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이름이 어찌 되시나요?”

    “…….”

    그녀의 물음에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이름이 궁금해졌어?”

    “식사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 이름 정도는 알아 두어야 편해요.”

    “그래? 어째서?”

    “그래야 필요할 때 부르니까요.”

    “…….”

    상상도 하지 못한 답에 말문이 막혔다.

    도로테아는 태연했다.

    어두운 밤중에 깬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누군가를 불러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닌가.

    “은인이라 부르며 부탁을 하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니까요.”

    “이름을 부르며 부탁하는 것은 괜찮고? 네 말대로 나는 네 은인이 아니냐.”

    남자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손을 뻗어 도로테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포기한 듯 말했다.

    “그래, 많이 먹거라. 내 이름은 네가 배부르고 난 뒤에 일러 주마.”

    “저걸로 주세요.”

    생선의 뽀얀 살을 보며 하는 지시에 남자가 얌전히 따랐다.

    생전 누군가에게 생선 살을 발라 준 적 없을 것 같은 고운 손이 바삐 움직였다.

    조금 지나자,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알아채고는 빠르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도로테아는 그를 인정했다.

    ‘시중드는 일에 꽤 소질이 있는걸.’

    능숙하게 그녀를 돕는 손을 보니 제인이 떠올랐다.

    지금쯤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오고 있지 않을까.

    그녀의 옆에서 투덜거릴 우드나, 또 새하얗게 질려 안절부절못할 자신의 아버지도.

    희한한 일이다.

    이곳에서 깨어나 함께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생의 인연들은 이미 흐릿한 과거가 되었다.

    대신 새로 얻은 삶에서 채운 인연들이 마음에 들어차 있었다.

    깊이 파인 우물처럼, 좀처럼 마르지도 않고 고요하게 도로테아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보고 싶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그리며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배가 부르자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했다. 식사를 중단하자, 남자의 손이 멈췄다.

    시중을 드느라 먹은 것도 없을 남자가 졸고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졸리더라도 좀 더 앉아 있어야지. 식사 후에 바로 누우면 배가 아플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노래를 듣지 않으려고요?”

    등을 토닥이던 다정한 손길이 멈췄다.

    “별 소용도 없는 일을 위해 남을 고생시키는 것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지.”

    도로테아는 남자의 거뭇한 눈 밑을 보며 납득했다.

    은은한 수면 향이나, 밤마다 들리던 노랫소리, 악기 소리 모두가 잠을 자기 위한 노력이었음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에는 그의 혼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저토록 커다란 균열은 처음 보건만.’

    타고나길 강건하게 타고났는지, 금이 간 틈 사이로 스며든 탁기에도 사내는 꽤 멀쩡해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진즉 미쳐 날뛰어야 했을 터.

    “은인의 긴 불면을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당장 잠들고 싶으시다면 방법은 있어요.”

    그의 고개가 들렸다.

    “제 숙부를 끌어안고 주무시면 돼요.”

    “…….”

    뜬금없는 말에 남자가 눈을 끔뻑였다. 도로테아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피로는 결국 불안정한 그릇 탓이다.

    지금이야 마차 바닥이나 굴러다니는 신세지만, 한때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신이었던 몸.

    콜린의 곁에 신체를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기운이 자연스레 안정될 터였다.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혼이 사신과 몇 밤을 함께 보낸다고 해서 곧바로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당장 잠을 청할 수는 있겠지.

    혹시나 해서 귀 기울였던 그가 웃으며 이마를 짚자 도로테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숙부의 곁에 있으면 푹 주무실 거예요.”

    “너는 잘 때 숙부를 꼭 끌어안아야 잠이 잘 오는 모양이구나.”

    남자는 그녀의 말을 그리 주의 깊게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지. 이미 해결책을 손에 쥐여 주었는데 떠먹여 주기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가 그녀의 말을 듣든 듣지 않든 이미 그녀의 손에서 떠난 일이다.

    남자가 화제를 바꿔,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성문을 통과하는 것까지는 도와주마. 그러나 그 뒤에는 네가 알아서 저택으로 가야 한다.”

    도로테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 두어라. 내일 아침부터는 또다시 강행군이 이어질 테니.”

    눈에 남은 미약한 걱정을 읽은 그녀가 돌아서는 남자에게 다시 한번 충고했다.

    “끌어안기가 버거우시면 근처에서 주무시기라도 하세요.”

    그렇게만 해도 효과는 좋을 테니까.

    남자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고는 말없이 방을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쫓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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