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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7)화 (17/242)
  • 혼술사 도로테아 17화

    다람쥐로 변모한 상태인 신기가 가슴을 쭉 폈다.

    마치 ‘여차하면 나를 사용하라.’라는 뜻으로 보였다.

    주인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꽤 적극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내세우는 조그마한 몸체를 보았다.

    ‘아니, 잠깐.’

    도로테아의 조그마한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방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힌 자가 그녀를 노리는 암살자라면, 그를 처박은 것은 누구란 말인가.

    혹 에이든이 온 걸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섰다.

    물론 에이든은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장신의 남자가 한 손에 날카로운 검을 쥔 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기절한 상대를 살피는 옆모습이 묘하게 낯익었다.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이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사르르 휘날렸다.

    몸을 일으켜 돌아선 그는 그제야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를 발견했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아니, 이런. 내게서 술을 빌려 갔던 맹랑한 꼬마로군.”

    “…….”

    “이런 우연이 있나.”

    싱긋 웃은 남자가 한 손으로 쓰러진 암살자의 뒷목을 잡아 일으켰다. 신음 소리와 함께 부스스 깨려던 암살자는 그의 손날에 다시 기절했다.

    멀리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다른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움 가운데에는 에이든의 기합 소리도 섞여 들어 있었다.

    그가 복도 쪽을 응시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 밤손님이 아무래도 오늘 큰 폐를 끼쳤군그래.”

    “은인의 손님이었군요.”

    “내 손님이지.”

    그가 씩 웃고는 도로테아의 말꼬리를 잡았다.

    “너는 마치 저들이 내 손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왜, 너를 노리고 찾아든 손님이라도 되느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관을 바꾸었으니 아마 저들은 그녀가 아닌 눈앞의 남자를 노리고 온 무리가 맞을 터.

    다만 암살자를 피해 도착한 곳에서 또 다른 무리의 암살자를 만난 셈이니 운이 나빴던 거지.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기절한 암살자는 그림자처럼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에게 끌려간 지 오래지만, 복도 너머의 검 부딪치는 소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옅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도로테아는 일렁이는 살기를 모르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걱정 마라. 내 손님이 확실하니 네게 피해를 주진 않으마.”

    “제 숙부께서 맞은편 방에 계셔요.”

    의아한 눈이 그녀를 향했다.

    “구해 달란 말이냐?”

    “저들이 당신의 밤손님이라 하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더니 이내 장난치듯 반박했다.

    “내 손님이라 하여 내가 여관의 모든 이를 책임질 이유는 없단다. 저들이 나에게 온 것이지, 내가 초대한 것이 아니야. 예컨대 나도 원치 않은 손님이라는 거지.”

    “저는 이 여관의 모든 사람을 책임지라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맹랑한 말에 그가 ‘응?’ 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녀는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또랑또랑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제 숙부를 구해 달라 말씀드린 거죠.”

    “술잔의 값도 아직 갚지 않았는데, 숙부까지 구해 달라?”

    “저에게 빚을 지우시면, 언젠가 분명 매우 유용하게 받을 상황이 생기실 거예요.”

    시간을 좀 더 들여 혼력을 완벽히 되찾고 건강한 몸이 된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리라.

    옅은 분홍빛 눈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레인.”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마자 검은 복면의 남자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이 아이를 지켜라. 잠시 찾아올 사람이 생겼구나.”

    서늘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 그가 물었다.

    “숙부의 이름이 무엇이냐?”

    “콜린이에요.”

    그녀는 굳이 숙부가 두 사람이라든가, 둘 모두 구해 달란 부탁은 하지 않았다.

    바깥의 소리만 들어도 에이든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합 소리를 보면 밤새도록 창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난 장수라 했으니 이까짓 암살자들로 어찌 되지야 않겠지.

    그렇지만 지금 막 인간의 몸을 얻은 사신은 달랐다.

    원래 약골인 데다 육체의 전 주인과 동화를 시도 중인 지금은 그 스스로 몸을 가눌 상황이 아니었다.

    “콜린이라……”

    그가 흥미롭게 이름을 되뇌며 중얼거렸다.

    “그것참, 흥미롭구나. 마침 내가 아는 자의 이름도 콜린이거든. 그리고 이런 이름은 흔하지 않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그의 모습을 보고도 도로테아는 놀라지 않았다.

    옆에서 피피가 찍, 하고 울자 도로테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신기를 달랬다.

    “괜찮아. 네 주인은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니까.”

    기껏 얻은 권속을 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잠을 자긴 그른 것 같지만.’

    사방이 피비린내에, 칼 소리에, 공포 어린 비명 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태연하게 잠에 빠지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일 테지.

    그녀는 자연스레 테이블에 놓인 음식에 손을 뻗었다.

    우물거리며 식사하는 도로테아의 앞에 시체처럼 잠든 콜린이 던져진 것은 테이블 위 음식이 절반 가까이 사라진 후였다.

    *   *   *

    콜린을 시체처럼 집어 던졌던 남자는 어느새 자신의 호위가 구해 온 마차에 도로테아와 콜린을 태웠다.

    정신을 잃은 콜린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도로테아는 별생각 없어 보였다.

    “숙부를 아끼는 것 아니었더냐.”

    “그래서 살려 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그걸로 족하단 말이지?”

    남자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눈앞의 자그마한 아이를 관찰했다.

    입꼬리가 내내 올라가 있었지만, 때때로 보이는 서늘함을 도로테아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는 상대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굳이 숙부를 끔찍이 사랑하는 흉내까지는 내고 싶지 않았다.

    신음하며 굴러다니는 콜린의 육체를 보면서도 도로테아는 태연하게 식사를 마쳤다.

    육체에 난 생채기들은 자잘한 것들뿐이다. 어차피 그 안에 들어 있는 혼에는 타격이 없을 터였다.

    “다른 일행도 있는 것 같던데.”

    “그분은 알아서 찾아오실 거라서요.”

    에이든이 고작 이런 일로 부상을 입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도로테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차라리 잘된 거지. 콜린이 일어나 지껄이기 시작하면 의심하게 될 수도 있고. 잠깐 떨어져 있으면서 적응시키면 돼.’

    게다가 눈앞의 남자가 가진 실력이면 콜린과 도로테아, 두 사람 모두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도로테아는 흘끔거리며 남자를 가늠했다.

    차림새만 보아도 높은 신분인 것이 명확했다. 호위들의 실력 또한 훌륭했다.

    빚을 지는 것은 이골이 났다. 정 안 되면 가문에다 청구해도 상관없겠지.

    가문. 그래, 가문.

    목적지를 떠올리자 다시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우리 아가씨의 목적지는?”

    남자가 의뭉스레 물었다.

    굴러다니는 콜린의 얼굴을 알아본 눈치였으니, 그녀가 가고자 하는 방향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지 않을 까닭도 없다.

    “하이클레어 가문.”

    벤과 우드, 제인도 분명 자신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올 터였다.

    남자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하이클레어 가문이라.”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이 도로테아를 훑었다.

    “그곳에 이렇게 어린 영애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는데.”

    도로테아는 말없이 침묵했다. 제 내력을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콜린의 뺨을 톡톡 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던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보면 볼수록 호기심과 흥미가 일었지만 쉽사리 추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옅은 분홍빛 눈과 마주할 때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심연을 엿본 듯 가슴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저 열 살 어림의 어린아이라기에는 그 깊이가 너무나도 깊었다.

    결국 돌리고 돌려 떠보듯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단한 하이클레어 가문의 가문치고는 꽤 수수한 차림새로구나.”

    도로테아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떠난 이 몸의 어미가 그녀를 위해 정성껏 준비해 둔 드레스였다. 물론 남자의 차림에 비하자면 한없이 모자랄 테지만 그리 수수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는데.

    새삼 제 외가가 어떤 위치의 가문인지 짐작이 갔다.

    호기심 어린 남자의 눈을 마주하며 그녀가 물었다.

    “은인께서는 무엇이 알고 싶으세요?”

    “글쎄.”

    “알고 싶으신 것이 고작 제 신상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드릴 수 있어요. 다만, 제 생각에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요구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맹랑한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맑은 눈이 그를 담았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내게 줄 수 있다?”

    “원하신다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까이서 보아도, 도로테아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차분한 태도에 남자가 김이 샜다는 듯 가까이 붙었던 몸을 천천히 물렸다.

    그러고는 눈이 반달이 되도록 웃으며 키득거렸다.

    “마치 네가 대단한 능력자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네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맹랑하게 나오는 것인지…….”

    말이 끝나기 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마차 밖은 조용했지만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꼬리가 붙었나.”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모처럼의 흥미로운 대화를 방해받아 짜증이 난 것이 분명했다.

    흘끗 도로테아를 본 그가 충고했다.

    “꽉 잡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가 덜컹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사방이 포위당한 듯 여러 사람의 기척이 마차 밖을 메웠다.

    “마차 안의 인간은 전부 내려라!”

    “순순히 말을 들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우악스러운 외침과 함께 마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검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귀에 선연하게 들려왔다.

    “순순히 말을 들었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인데, 저 말을 어찌 들어주겠느냐. 그렇지?”

    도로테아는 장난기 섞인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콜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반응 없는 그녀를 보던 남자는 이내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좀 전까지 장난기가 그득하던 눈이 흉수들을 향한 순간 살기가 어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 누굴 지키는 똥개가 된 기분일세.”

    저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이미 지난밤부터 그를 휘두르고 있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

    누군가에게 휘둘리며 유쾌한 기분은 처음이라 남자가 입가에 미약한 웃음을 단 채 검을 빼 들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상황은 정리되겠지만, 생색을 낼 수 있다면야.

    살기 어린 검이 맞부딪혔다.

    용병을 가장한 살수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적으로 밤에 괴롭혔으면, 낮에는 좀 쉬어 주거라!”

    검이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도로테아는 바깥에서 넘실거리는 살기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도 두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수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 갔던 남자는 이번에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지.

    숨어 있던 다람쥐가 슬그머니 주머니 밖으로 나와 찍찍 울었다.

    손으로 피피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방금 전까지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화와 천살이 만난 것은 처음 봐.”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꼬이고 꼬인 운명이었다.

    “재밌네.”

    점점 이 여행길이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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