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6화
숨이 막힌 듯 캑캑대는 콜린을 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짓누르던 위압감에서 벗어난 콜린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감흥 없는 얼굴로 밖을 보다가, 어느새 제 발치에 와 어리광을 부리는 다람쥐의 턱을 긁어 주며 웃었다.
“이 아이 꽤 마음에 드네. 내 취향이야.”
명색이 사신의 ‘신기’인 주제에 한낱 인간에게 아양을 부리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신기를 손바닥 위에 올린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숙부.”
“…….”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것이 이런 뜻일까. 콜린의 입이 다물렸다.
인간에게 신기를 빼앗기고 육체에 갇혔으니 그는 이미 사신의 자격을 모두 잃은 셈이다.
설령 도로테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지하계로 돌아간다고 한들 좋은 꼴을 볼 리 없었다.
‘최소가 자격 박탈. 여의치 않으면 소멸이다.’
자신의 힘을 나눠 받은 권속이 고작해야 인계의 존재에게 발목이 붙들렸으니, 체면이 상한 하데스가 무슨 벌을 내린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콜린이 끙, 하고 돌아눕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음 숙박 장소는 위험하다.”
“응?”
“이 몸이 고용한 암살자들이 매복 중일 테니까.”
그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콜린은 덤덤한 얼굴로 사실을 읊어 주었다.
“너를 죽인다면 에이든은 몰라도, 가문 사람들은 충분히 이쪽을 범인으로 의심하겠지. 그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몸의 주인은 아예 동생까지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해? 제법 강하던데.”
“아무리 강해도 조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술을 잔뜩 마신 남자가, 숙련된 암살자 여럿이 덤비는 것을 이겨 낼 수 있겠느냐?”
“그건 그러네.”
다시 들어도 새삼 놀라웠다.
아무리 친혈육이 아니라고는 해도 조카와 남동생을 차례차례 죽일 생각을 품고 있었단 말이지.
게다가 여동생의 죽음에도 손을 썼다고 자백했고.
도로테아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취소하면 되잖아. 암살 취소해.”
“익명으로 의뢰했다.”
“취소 못 하는 거야?”
“착수금은 이미 보냈고,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중간에서 말을 전한 이들 또한 사전에 제거한 지 오래다.”
상대는 오로지 도로테아와 에이든을 노릴 테지만 동행인 콜린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도로테아의 권속이 되었으니, 그녀가 죽어서 곤란한 것은 콜린 본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지난 숙소에서 에이든과 헤어졌어야 했다. 위장한 암살자들과 마주하는 건 에이든뿐이었을 거다.”
“진짜 나쁜 놈이구나.”
그리 태연한 얼굴로 사람을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려 했다니.
그녀의 말에 콜린이 울컥했다. 굳이 따지자면 일을 계획하고 의뢰한 개새끼는 이미 죗값을 치렀다. 삿된 것들에게 먹힌 혼은 이미 소멸되어 다시는 윤회의 고리에 들 수 없을 테니까.
다만 그의 몸을 물려받았으니 이제 그가 ‘콜린’의 일을 수습해야 했다.
“아무튼 숙박할 곳을 바꿔야 한다.”
말을 마친 그가 빠르게 문을 쾅쾅 두드렸다.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창으로 목을 내민 콜린이 웩, 하고 속에 들어 있던 것을 게워 냈다.
옆에서 도로테아가 자그마한 주먹을 쥐고 말했다.
“힘내.”
“찌익, 찍.”
옆에서 다람쥐 흉내를 내던 신기가 그녀의 행동을 따라 했다. 왠지 울컥함이 배가 되었다.
“아이고, 형. 집에 돌아가면 몸을 단련하는 법부터 다시 배웁시다.”
뒤늦게 들여다보고 혀를 차며 꺼낸 에이든의 걱정 어린 조언에 콜린은 울적하게 몸을 돌돌 말았다.
인간에게 동정을 사다니, 사신의 체면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네 이름은 피피로 하자. 어때?”
도로테아가 옆에서 사신들에게만 주어지는 신기(神器)에게 괴상망측한 이름을 지어 주고 있지만, 그것을 말릴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졌다.
신기는 한때 주인이었던 콜린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주인 옆에서 기분 좋게 울고 있었다.
* * *
“아무래도 묵어갈 곳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응?”
뜬금없는 콜린의 제안에 에이든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는 마차 안에서 나름대로 생각해 둔 궁색한 변명들을 끄집어냈다.
“생각해 보니 테아가 아직 어리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묵기로 한 곳이 그리 좋은 여관이 아니야.”
“잠자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특별하겠소?”
“아이가 아직 어리지 않으냐. 가뜩이나 집에서 벗어나 불안할 터인데 조금이라도 좋은 곳에 묵게 해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에이든이 흘끗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그녀에게 불안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도리어 폭신한 쿠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위에서 흥얼거리며 뒹굴뒹굴하기 바빴다.
이미 마을에 거의 다다랐던 터라 장소를 바꾸는 것을 주저하던 에이든은 도로테아를 핑계 삼은 콜린의 말에 어렵사리 동의했다.
“그러겠소.”
“잘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조카를 들먹이자 에이든은 순순히 말을 따랐다.
그의 거칠고 투박한, 커다란 손이 조그마한 도로테아의 머리 위로 얹어졌다. 쓰다듬는 손길이 못내 조심스러웠다.
“안색이 한결 나아졌구나. 다행이야.”
“…….”
콜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의 안색이 나아진 까닭은 사신인 자신을 몸에 가두면서 혼력을 일부 훔쳤기 때문이었다. 못마땅한 눈길이 잠시 도로테아에게 머물다 사라졌다.
도로테아는 그런 콜린의 불손한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한마디 타박해도 괜찮았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저 정도는 관대히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즐거운 기분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신당 밖의 세상을 구경해 본 적 없었다. 기껏해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액막이 제단이 있던 장소 정도일 뿐.
마차 밖의 변화무쌍한 풍경들은 아름다운 그림처럼 고스란히 그녀의 마음에 담겼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인 점이 있다면,
“아버지가 있어야 해요. 제인과 우드도.”
그녀의 말에 에이든이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게, 네게 더 나은 환경을 주려는 거란다.”
“알아요.”
“나, 나중에 기회가 되거든 내가 네 아버지의 멱살을 쥔 채 끌고…… 아니, 데려와 얼굴을 보여 주마.”
“네.”
아마 그 전에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도로테아는 잠자코 에이든의 말에 수긍했다.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고급스러운 외관을 갖춘 여관에 멈춰 섰다.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에게 마차를 넘긴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숙박 명부를 작성하던 에이든이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형, 오늘은 안 되오.”
“무엇이?”
“아무리 우리 조카랑 같이 지내고 싶어도 좀 참으시란 말이오. 가문의 체면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 밤에 그리 몰래 보러 가면 어찌한단 말이오.”
“그럴 일 없으니 염려 놓아라.”
콜린은 눈치 없는 에이든의 말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마음 같아서야 도로테아와 최대한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속내였다. 그렇지만 이미 그녀가 그의 명부를 강탈해 버려 주종 계약으로 묶인 사이.
싫어도 함께 해야만 했다.
눈치 없는 에이든이 껄껄 웃었다.
“그리 부끄러우신 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조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거 알고 있소.”
네가 뭘 알아.
울컥했지만 입을 꾹 다문 콜린이 먼저 방으로 향했다.
에이든은 그런 형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도로테아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말은 저리 해도 네가 예뻐 죽는 거란다.”
“그래요?”
“예전 같으면 벌써 접시 그릇이 날아왔어야 하는데 잠잠하지 않니. 다 너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일 것이야.”
들으면 들을수록 몸을 빼앗긴 ‘원래 주인’의 인성이 돼먹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지금의 콜린은 애초에 인간이 아닌 존재였으니 ‘인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적어도 패악은 부리지 않겠지.
“좋은 꿈꾸거라, 테아.”
에이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뉘어 주었다. 폭신한 이불이 몸 위로 덮어졌다.
창틀을 타고 오른 담쟁이의 줄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폭신한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부들부들하고 폭신한 감촉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저는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가씨.”
하녀가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쳐 물러나자 홀로 남은 방 안이 고요해졌다.
도로테아가 물끄러미 창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젓자, 만진 적 없는 창이 스르르 열렸다. 서늘한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 만도 하건만 따뜻한 이불 덕인지, 한결 건강해진 몸 덕인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도박을 걸어 보길 잘했어.’
뿌듯한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났다.
건강해진 건 아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점차 나아지겠지.
시간을 벌어 놓았으니 그사이 육체의 허함을 채울 방도 또한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명부에 다시 이름이 오르려면 인간의 한 생을 건너야 할 테니 족히 오십 년 이상은 걸릴 터. 우선 벌어 놓은 시간으로도 충분히 그다음을 계획할 수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고 있던 재신의 귀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흠.”
이렇게 늦은 저녁에 노래를 부르다니.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배려 없는 행동이긴 했다.
게다가 멜로디는 처연하고 느릿하기까지 했다.
듣는 사람조차 추욱 늘어지게 만드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피피, 이리 와.”
부름을 받은 신기가 그녀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머리맡 근처에 몸을 말고 누운 조그마한 다람쥐를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폭신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린 순간이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초대받지 않은 인물이 문을 부수며 들어섰다.
정확히는, 누군가에 의해 떠밀린 그가 문을 산산조각 내며 방 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이다.
그대로 벽에 처박힌 인영이 신음을 흘렸다.
잠을 방해받은 도로테아가 짜증스레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차림새가 심상찮았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 날붙이를 든 남자를 본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콜린, 이 쓸모없는 인간.’
숙소를 바꿨는데도 기어코 암살자가 찾아오다니.
얼마나 열심히 행적을 알리고 다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