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3화
늦은 밤.
도로테아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깨어났다.
온몸이 무겁고 축 늘어지는 탓에 눈을 뜨는 것도 버거웠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녀를 품에 안고 이동 중인 것이 분명했다.
낯익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가면 된다. 이 외숙부가 너를 얼른…….”
마비되었던 감각들이 천천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축축한 새벽의 내음이 저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감각을 일깨웠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그녀는 스스로가 ‘납치’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까 먹었던 스튜.’
강한 향신료 향 덕분에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끝 맛이 살짝 오묘했었다.
생각해 보니 에이든은 그녀에게 정성스럽게 스튜를 먹이면서도 자신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
‘무언가 들어 있었구나.’
몸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으므로 도로테아는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이, 이리 안아도 될까? 너무 작고 말라 부러질 것 같으니 어딜 잡아야 할지…….”
에이든은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연신 그녀를 고쳐 안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멀리서 흥분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여럿인 걸 보니 그에게 공범이 있는 듯했다.
‘쫓아오는 발소리가 없어.’
다른 식구들 또한 그녀처럼 약에 취해 잠든 것이 분명했다.
어수룩해 보이는 에이든이 이런 일을 저지르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빠르게 달리던 그의 몸이 멈춰 섰다. 도로테아는 이미 잠이 깼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아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프오, 둘째 형.”
“그래, 잘 데려왔다.”
“궁정 마법사조차도 손을 놓았다는데 정말 방법이 있겠소?”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그곳에 방치해 둬선 안 되는 게지. 우리 가문의 아이가 아니냐. 아무리 연을 끊었어도 하나뿐인 누이의 딸이다. 더 좋은 환경에 있어야 해.”
다소 이성적이고 냉랭한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에이든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하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형, 그런데…… 놈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를 아끼는 것 같소.”
“잊었느냐. 그놈이 누이를 죽였다.”
“…….”
혼란스러운 듯한 에이든과 달리 대화 상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말을 꺼낼 때마다 주변의 온도가 서너 도씩 내려가는 듯한 냉랭함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에이든의 품에 안긴 채 미리 데워진 마차로 들어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흐릿하게 에이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 미안하다. 아주 미량이었단다. 네가 잠들지 않으면 나서기 힘들 것 같아서.”
“…….”
안절부절못하는 에이든이 늘어놓은 변명을 듣던 그녀가 시선을 돌려 맞은편의 남자를 확인했다.
덩치가 크고 강렬한 인상을 가진 에이든과는 달리, 호리호리하고 창백한 안색을 지닌 남자는 평생 검을 쥐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유약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커다란 보석 알이 박힌 반지를 끼고, 고급스런 옷을 입은 남자의 시선에 도로테아를 향한 애정이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이 그를 소개했다.
“네 둘째 외숙이란다. 훌륭한 학자로 이름 높아 궁의 왕족들을 가르치고 있지. 성국과도 연이 깊으니 분명 네 건강이 좋아지도록 도와줄 게야.”
도로테아는 그의 눈에 스치는 짜증과 귀찮음을 읽어 냈다.
그는 에이든과 달리, 도로테아의 존재를 그리 애틋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왜 굳이 이곳까지 왔을까.’
귀찮게 납치까지 감행하면서.
짜증이 솟은 것은 도로테아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몸이 성치 않은 이때, 겨우 터를 잡아 놓은 저택에서 멀어졌다. 묻어 둔 십자가 목걸이가 못내 아까웠다.
그 힘을 삼켜 몸을 보양하며 시간을 벌 생각이었건만.
‘내 보양식…….’
한숨을 삼키며 마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만으로도 마차가 속도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외숙이라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약 기운이 떨어져 소란을 피우기 전에 한 번 더 먹여 두어라.”
“아픈 아이가 자꾸 약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소. 우리 테아는 얌전하니 그냥 두어도 되오.”
에이든의 반박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가 치민 듯 노려보던 남자는 소리를 높이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요구를 거절당한 순간 남자의 눈에 서린 열등감은 도로테아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아픈 아이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맞장구쳤지만 눈에 서린 살기는 줄지 않았다. 뱀처럼 교활하고 간사한 눈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저절로 전생이 떠올랐다.
그녀를 낳아 가문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아버지는 액막이제에서 가장 상석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배다른 형제들의 열등감 어린, 그 눈.
영향력 있는 아버지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늘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아이를 짓누르며 제단 위로 올리던 손에는 손톱만큼의 안쓰러움도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둘째 숙부라는 작자의 눈에도 도로테아를 향한 애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해묵은 감정들은, 도로테아처럼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인물이 아니면 들키지 않을 만큼 교묘하고 능숙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아이가 아파 내가 예민했구려.”
“그래, 그럴 수 있지.”
관대한 말과는 달리 감춘 속내는 어둡기 그지없으리라.
남자에게 이끌려 몰려든 사기가 마차 안을 넘실거리다 도로테아의 시선에 이내 잠잠해졌다.
* * *
동이 틀 무렵, 쉴 새 없이 달린 마차가 허름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졸고 있던 카운터의 직원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방 두 개만 내주시게. 되도록 다른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는 곳으로.”
은밀한 말과 함께 쥐여진 금화에 직원이 침을 삼켰다.
묵직한 금화의 무게에 그의 몸짓이 절로 빠릿빠릿해졌다.
“복도 끝 방이 아무래도 조용하고 좋지요. 식사를 올릴까요?”
“두 사람분만. 그리고 묽은 수프나 소화 잘되는 음식 좀 가져다주시오.”
일행은 곧장 안내받은 방으로 향했다.
도로테아가 목을 빼고 주변을 살피자 둘째 외숙부라던 남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가소로워하는 눈빛이었다.
“이쪽입니다.”
내부는 한산했다.
음산한 분위기를 더하듯 멀리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 외숙부라던 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도로테아의 눈이 새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죽었는지 의심할 만큼 얌전하고 조용했다.
어디선가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희미한 노랫소리도 섞여 들었다.
“맞은편에 손님이 한 분 묵고 계시긴 합니다. 늦은 밤이니 방에서 나오진 않으실 겁니다.”
점원의 말에 힐끗 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지금 당장 여관의 다른 손님들을 모두 내쫓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훅 풍기는 술 냄새에 에이든이 입맛을 살짝 다셨지만 어린 조카를 보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복도를 가로질러 방문 앞에 도착하자, 식사를 가지러 간 점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남자가 지시했다.
“호위를 넷이나 두었으니 옆방에서 잠을 청하거라. 아이는 이 방에서 재우겠다.”
“그치만, 형님.”
“열둘이면 충분히 홀로 자도 되는 나이야. 나도 이 아이를 재우고 곧 건너가겠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틈을 주지 않는 딱딱한 말에 에이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쫓겨났다.
방을 떠나는 이들에게 시선을 주던 도로테아는 외숙부가 데려온 것으로 보이는 하녀를 응시했다. 물을 따르는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앳된 하녀의 옆에 건장한 호위가 넷이나 서 있었다.
‘지키기 위해서, 란 말이지.’
그러나 저들의 눈에 들어찬 살기를 보라.
도로테아를 지키도록 세워 둔 ‘기사’들은 누군가를 지키는 일보다 목숨을 거두는 일이 더 익숙해 보였다.
“편히 주무셔요, 아가씨. 필요하시다면 벨을 울려 주시고요.”
“더워요.”
물러가려던 하녀에게 불쑥 꺼낸 말에 그녀가 멈칫했다.
도로테아가 하녀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더워요.”
마치 주입이라도 하듯, 느릿하게 건넨 말을 듣던 하녀의 눈에서 순간 생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가 좁은 창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든 바로 그 순간.
우연인지 필연인지 옆에 놓여 있던 벨이 다라랑, 하고 울렸다.
하녀의 시선이 벨을 향한 순간 도로테아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방 안에 내려앉은 뿌연 안개에, 수상함을 눈치챈 호위들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순간 이미 이변은 일어났다.
희미하게 들리던 종소리가 빠르게 이들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사로잡았다.
열린 창을 통해 날아든 까마귀가 그들에게 접근했지만, 그들은 저항하지 않은 채 텅 빈 동공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로테아는 사뿐사뿐 그런 이들을 지나쳐 ‘둘째 외숙부’의 품에서 슬쩍한 물건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고급스러운 커프스단추에 그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C. H’
콜린, 하이클레어.
테이블에 놓인 이니셜 위로 달빛이 모여드는 것과 함께, 사념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이들의 사이를 거침없이 지나다니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얼굴을 찡그렸다.
지나치게 서늘한 바닥에 닿은 맨발을 타고 오른 한기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신이라도 가져다 놓을 것이지.”
외숙부란 인간에 대한 못마땅함이 더욱 커졌다.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지만 ‘현혹’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저 부정한 것들에게 눈이 없다고는 하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커프스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낼 테니까.
삿된 존재를 불러들이는 건 쉽지만 다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속았음을 알게 된 순간 저들의 분노는 역으로 도로테아를 덮칠 것이다.
‘그러니 도박이지. 여차하면 이 육신을 버려야 할.’
어차피 지금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도로테아의 옅은 분홍빛 눈동자가 제 할 일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창틀에 앉은 까마귀를 향했다.
‘그래, 잘했어.’
칭찬의 눈길을 보낸 그녀는 텅 빈 눈을 하고 서 있는 이들을 지나 복도를 가로질러 술 냄새가 짙은 방으로 향했다.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낯선 이가 머무는 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