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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화 (12/242)

혼술사 도로테아 12화

심신이 고단했던 도로테아는 저택의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조용히 잠들었다.

제인은 그런 아가씨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며 살폈다.

“왜 그런 곳까지 홀로 가셨을까요?”

만약 산책을 하고 싶었다면 잠든 사람을 깨워 함께 나가는 것이 옳았다.

실제로 도로테아를 찾았을 때 그녀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니까.

우드는 착잡한 얼굴로 잠든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짐작대로라면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어쩌면 도로테아의 ‘기이한’ 힘과 관련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열두 살.’

허리춤에 겨우 닿을 정도로 조그마한 아이의 눈은 수십 년을 살아온 듯 깊었다.

누군가 들었더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코웃음 쳤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가,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을 마치 눈앞에서 본 듯 생생하게 읊던 것이 떠올랐다.

‘아비나 외숙이라는 이들은 이 아이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지.’

그들의 눈에는 한없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

도로테아는 그들이 바라는 아이 역할에 기꺼이 맞춰 주었다.

그 덕에 다들 이 아이가 얼마나 영악하고 고약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가끔씩은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인외 종족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벤에게 ‘도로테아가 태어나던 순간을 보았냐.’라고 물었을까.

‘생각해 봤자 골치만 아프지.’

우드가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도로테아를 살피던 제인이 그런 우드에게 물었다.

“어딜 가세요?”

“네 아가씨가 시킨 일하러.”

“이 밤중에요?”

“안 하면 혼날 게 아니냐.”

물끄러미 쳐다보며 ‘천하의 쓸모없는 다리 같으니’ 따위의 말을 던져 괴롭히겠지.

신랄한 몇 마디 말이 며칠 내내 가슴을 쑤셔 댈 것임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그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한하게도 그녀의 말에는 상대를 뒤흔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우드가 떠난 뒤에도 숙부와 아버지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공자라 하셔도,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잖아. 저 꼴을 좀 보아라. 홀로 먼 곳까지 도망갈 정도면 집이 얼마나 싫었겠느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한 것입니다. 테아는 제가 잘 돌볼 테니…….”

이윽고 날이 밝았을 때에는 다들 지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   *   *

제아무리 튼튼하고 건장해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밤새도록 얇은 옷차림으로 밖을 헤매고 돌아와서도 한참을 다툰 벤 에버리와 하이클레어가의 3공자, 에이든 하이클레어는 결국 퀭한 눈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사실 에이든은 벤에 비해 훨씬 상태가 좋았지만, 사랑하는 조카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받고 싶었던 그는 앓아누운 벤을 흉내 내고 있었다.

“으으으.”

밤새 강을 뒤져 물에 흠뻑 젖어 돌아온 우드는 멀쩡한 몸으로 아픈 척하고 있는 에이든을 보자 머리가 아파 왔다.

‘앓아누워야 할 것은 내 쪽인데.’

목걸이를 찾고자 생고생했던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컥했다.

다녀와 보니 명을 내린 이는 곤히 잠들어 있고 제인만이 남아 그를 타박했다.

“한밤중에 물놀이는 자제해 주세요. 가뜩이나 아가씨가 아프신데 어떻게 놀 생각을 하세요?!”

그뿐만이랴. 기껏 찾아온 목걸이를 내밀자, 도로테아가 하는 말이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저택 마당에 있는 나무 아래에 묻어요.”

이 조그마한 물건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워 가며 강바닥을 뒤졌건만 이번에는 땅에 묻으라니.

똥개 훈련을 시켜도 이것보단 낫겠다.

울컥했지만 도로테아의 눈은 단호했다.

불퉁한 얼굴의 우드가 결국 목걸이를 묻으러 가자 도로테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인.”

“네, 무슨 일 있으셔요?”

“배고파.”

“그리 밤중에 홀로 산책을 가시니 배가 고프지요. 야채 스튜를 끓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방으로 향하는 제인에게서 눈을 뗀 도로테아는 누워 있는 아버지와 외숙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할 일을 마친 우드가 그 옆에 같이 누워 끙끙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시면 안 돼요. 감기 옮아요, 아가씨.”

제인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졸지에 전염병자 취급을 받은 셋이 동시에 끙 소리를 냈다.

도로테아는 누워 있는 남자들 옆에 앉아 그들의 머리에 얹힌 천을 내렸다.

제인이 하던 대로, 물이 담긴 그릇에 천을 적셨다.

그다음에는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천을 그대로 다시 남자들의 이마에 올렸다. 철푸덕 하는 소리와 함께 흥건한 물이 얼굴을 적셨다.

“…….”

어설프지만 제인의 흉내를 내는 듯했다.

그러나 앙상하고 부러질 듯 가냘픈 손으로 천을 쥐어짤 수 있을 리 없으니 제대로 일이 될 리 없었다.

“테아야.”

벤이 신음처럼 딸의 이름을 불렀다.

도로테아는 이마에 올려진 천을 꾹꾹 눌렀다.

누를 때마다 흘러나오는 물에 그들이 누운 자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안 그래도 찬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린 몸에, 찬물이 끼얹어진 벤이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돕겠다고 나선 딸을 타박하진 못했다.

옆에 있던 우드가 한숨과 함께 돌아누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도로테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인을 돕고 있었다.

그녀는 제 아버지의 젖은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토록 애틋한 자식 사랑도 결국 자라나는 탐욕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마는 걸까?’

혼탁해진 눈으로 거짓을 말하며 다정한 가족을 연기하던 오빠를 떠올렸던 것일까.

그의 볼에 갖다 댄 도로테아의 손이 멈칫했다.

십 년을 아이를 위해 전국을 떠돈 그 고단한 얼굴이 오한으로 붉어져 있었다. 그 옆에서 끙끙 앓는 척하는 건강한 숙부를 슬쩍 본 도로테아는 가장 상태가 심각한 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집중했다.

철푸덕.

“…….”

물론 엉터리 간호에 상태는 더욱 나빠지는 것 같았지만, 옆에 누운 에이든만큼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부러운 얼굴로 벤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숨넘어갈 듯 가쁜 숨을 내쉬었다.

“침 좀 튀기지 맙시다…….”

헛기침할 때마다 날아오는 에이든의 침 세례에 우드가 힘없이 항의했다.

이런 에이든의 노력에도, 도로테아는 벤 외에는 돌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

고작 스튜를 먹기 위해 스푼을 들었을 뿐인데 손이 떨려 왔다.

도로테아는 어제 홀로 밖에 나갔던 것이 결국 몸에 부담을 주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드라도 깨워서 나가든가, 아니면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호기심에 괜히 나섰다가 불편만 커졌다.

스튜를 멀뚱히 내려다보는 도로테아를 계속 관찰하던 에이든이 벌떡 일어났다. 꾀병을 부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 내가 도와주마.”

크고 투박한 손에 쥐어진 스푼이 도로테아의 손에 쥐어졌을 때와는 달리 앙증맞게 보였다.

얌전히 스튜를 받아먹는 그녀를 보는 에이든의 눈동자에 감격이 들어찼다.

거친 숨과 함께 그가 다시금 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이 아이 어디가 이리 아픈 거요! 이리 앓게 할 것이라면 우리 가문에 알리기라도 했어야지!”

“……장군께서는 서신을 보내 아내를 위해 황궁의 치료사를 보내 주는 것이 마지막 배려라 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비를 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아버지가?”

에이든이 얼굴을 찡그렸다.

“제기랄, 아무리 엘렌에게 실망하셨다고는 해도 너무 매정하셨군.”

도로테아는 공중에서 멈춰 버린 스푼을 보며 에이든을 흘끗 보았다.

“제대로 먹고 크지도 못한 아이가 가여울 법도 한데, 어떻게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그의 눈이 한층 더 결연해졌다.

“아이는 역시 내가 데려가겠소.”

스푼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다들 침묵했다.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에이든의 손을 툭, 쳤다.

“줘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다른 이야기가 들릴 리 만무했다.

밥을 달라 요구하는 도로테아를 향한 에이든의 눈에 습기가 찼다.

그가 목멘 목소리로 주장했다.

“이것 보시오. 얼마나 못 먹고 지냈으면 멀건 스튜를 이렇게 맛있게 먹는 거요.”

“아가씨는 원래 스튜 좋아하세요.”

우드는 황망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녀의 말을 무시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역시 아이는 자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숙부.

그런 숙부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식사에 집중하는 도로테아.

‘둘 다 상대방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같은 핏줄인 게 확실했다.

“역시 이 아이는 나와 함께 가야 한다. 최고급 치료사를 불러…….”

곧 죽어도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에이든의 고집에 벤이 고백했다.

“도로테아는 마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벤이 입을 연 순간, 에이든과 우드 두 사람이 동시에 굳었다.

파리했던 벤의 안색이 좀 전보다 더 나빠졌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에는 자책과 무력감이 가득했다.

“화, 확실한가?”

“…….”

더듬거리는 말에 벤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두워진 얼굴이 이미 답을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궁정 마법사가 직접 말해 준 겁니다. 마탑의 마법사들 진단도 같았습니다.”

눈앞의 이 남자가 궁정 마법사를 부를 수 있을 리 없다.

아이의 병에 대해 들은 하이클레어 가문이, 도로테아를 데려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에이든의 눈길이 또래보다 두어 살은 작고 왜소한 조카를 향했다.

창백한 피부, 앙상한 몸, 퀭한 눈.

오랫동안 고통받았을 조카를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어, 어찌…… 네가 어찌…….”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스튜에 눈물 떨어져요.”

이제 그만 그치라는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에이든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스튜로 떨어지자, 도로테아는 제인을 흘끗거렸다.

그러나 제인 또한 눈물을 훔치느라 바빠 보였다.

배가 고프지만 여기서 배고프니 스튜나 달라고 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내가 어떻게든 훌륭한 치료사를, 아니, 성국의 교황을 데려와 널 치료하게 만들겠다.”

마나병에는 신력이 듣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것은 에이든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이었다.

“성국의 교황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이 몸은 못 고쳐요.”

도로테아는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가 이 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육신의 그릇이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거의 바닥나 있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들어와 혼력을 조금이나마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살고 싶으니까, 노력해 보려고요.”

몸뚱이의 수명이 어찌 되었든 그것을 바꿀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곳에서 ‘도로테아’로 살 이유.

이곳에 머무르며 이들과 함께 살아갈 이유였다.

“그냥 살아라. 수많은 사람들이 떳떳하지 않아도 살고 있으니.”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살아갈 이유가 분명하기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는 것이라면.

“테아, 내 아가야.”

슬픔에 잠긴 저 깊고 어두운 눈에 어려 있는 애정은 살아가며 차차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살겠다고 결심해도 지금 당장 건강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우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육신의 그릇에 난 균열을 수복하는 데 집중해야지.

도로테아는 눈물로 흥건한 스튜를 밀어내며 요구했다.

“새 걸로 다시 가져다줘, 제인.”

제인은 막 다시 데운 따끈따끈한 스튜를 도로테아의 앞에 놓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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