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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1)화 (11/242)

혼술사 도로테아 11화

코를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에 도로테아가 눈을 떴다.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으나, 그 숨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눈에 힘을 주자 흐릿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잠기운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이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품에 안긴 도로테아가 뒤척이자 남자가 멈칫하고 그 자리에 섰다.

“깨, 깼느냐?”

걸걸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커다란 체격의 낯선 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받쳐 안고 있었다.

그의 반대 손에 들려 있는 창에서 피비린내가 풍겼다. 날에 스며 있는 피 냄새가 지독한 것을 보아 그는 사람을 무수히도 많이 죽여 본 장수임이 틀림없었다.

“아가…….”

“제 가족들은요?”

침착하게 묻는 목소리에 거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주변에 여전히 강이 보이는 걸로 보아 멀리 온 것은 아니다. 다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닌 것 같았다.

몹시 답하기 어려운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거인이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은, 그들은 너를 이 시간에 여기에 내버려 두었다. 너와 함께 지낼 자격이 없어!”

“제가 혼자 몰래 나온 거예요.”

“너는 연약하고 어려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해.”

“그러니까 되돌려 보내 주세요.”

보호자에게로.

그녀의 말에 거인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커다란 덩치에 살기가 가득 배인 무기를 든 인물은 의외로 풀 죽은 강아지 같은 모양새를 해 보였다. 까끌까끌한 수염이 도로테아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자신을 안은 손이 갓 낳은 연약한 새를 다루듯 다정하고 또 다정함을 깨달았다.

‘누구지.’

이 몸의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 남자라고 기억할 리 없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도로테아지만, 지금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희미하지만 먼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 섞인 높고 가는 목소리. 제인의 것이었다.

“제인이 절 찾고 있어요.”

한밤중에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루크가 지니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어야 하는데.

소년이 심술을 부린 순간 모든 일이 틀어졌다.

무슨 생각인지 침묵하는 거인의 품에서 귀를 기울이자 제인 외에 다른 이들의 다급한 발소리와 외침도 함께 들려왔다.

“돌아가야겠어요.”

“늦었다! 이제 와서 찾아봤자야! 너를 이렇게 위험하게 혼자 둬 놓고, 이렇게 늦게 와 봤자!”

그가 콧방귀를 끼며 으르렁거렸다.

“너, 너는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하고 있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도로테아의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귀가 얼얼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주변의 벌레와 동물들이 놀라 후다닥 튀어 가는 것이 보였다.

다행인 것은 그의 외침이 다른 동물들을 쫓아낼 만큼 쩌렁쩌렁했던 덕분에 주변을 수색하는 이들에게도 들렸다는 것이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우드의 눈이 도로테아를 발견하고는 커졌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고 있는 거대한 남자를 보고 일그러졌다.

거대한 창을 쥔 거인이 살기 넘치는 눈으로 우드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또 무슨 일에 휘말린 건지.’

도로테아는 거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끔뻑였다.

한밤중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도로테아는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테아야!”

뒤이어 벤이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딸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본 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는 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낯선 이를 향해 애원했다.

“그 아이를 놔주십시오.”

어림도 없다는 듯 남자가 들고 있던 창을 가볍게 휘둘렀다.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높은 갈대가 잘려 나갔다.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 갈대들을 내려다보는 도로테아의 귀에 다시금 벼락같은 소리가 울렸다.

“이 아이는 보호자도 없이 홀로 외딴곳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너, 너희가…… 너희가 이리 아이를 방치해 두고 할 말이 있는가!”

“…….”

도로테아를 보는 우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게 왜 성치도 않은 몸으로 저택을 빠져나와서.’

정작 밤 외출을 즐긴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였다.

그녀를 안고 있던 거인의 입에서 다시 한번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벤 에버리, 너 따위가 감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은 도로테아는 물론이고 그녀의 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인 듯했다

다만 벤은 그를 모르는 듯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당황한 눈치였다.

‘불편해.’

남자는 그녀를 한 손으로 들 만큼 힘이 좋긴 하지만 아이를 많이 안아 본 솜씨는 아니었다.

몸을 기댄 한쪽 어깨가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도로테아가 얼굴을 구겼다.

할 일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자신을 안아 든 남자는 보내 줄 생각은커녕 귀가 얼얼하도록 소리만 질러댔다.

‘귀에 피딱지 앉겠는걸.’

뒤늦게 가쁜 숨을 쉬어 가며 나타난 제인은 누군가에게 폭 안겨 있는 도로테아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 아가씨가 괴한에게……!”

납치당하셨다고 외치기도 전에 거인이 반박했다.

“나는 괴한이 아니야!”

소리치는 입에서 침이 튀어 도로테아의 손등에 떨어졌다.

불쾌감에 몸을 버둥거리자 거인은 그녀를 고쳐 안고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너희 같은 것들보다 더 이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다!”

버럭 외치는 소리에 우드와 제인이 당황한 듯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이없는 발언에 눈이 동그래진 두 사람과 달리 벤은 심각했다.

무언가 기억해 내려는 듯 미간을 찡그린 벤을 향해 남자가 씨근덕거렸다.

“네놈은 아비 자격 없는 인간이다. 내 누이를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더니 이 어린것까지 여린 몸으로 밖을 돌아다니게 방치하다니. 내가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영문 모를 말에 우드와 제인이 벤을 바라보았다.

도로테아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남자는 적어도 그녀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너, 너희에게는 줄 수 없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분명 도로테아가 납치된 것만은 확실해 보이니까.

그 순간 남자를 보던 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누이’를 운운한 순간 살짝 변했던 얼굴빛이 신중한 생각 끝에 결론을 낸 모양이었다.

혼란보다 먼저 난감한 기색이 벤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영식이십니까?”

남자는 코웃음 쳤지만 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낯선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하이클레어 후작가.

“이곳에 오신 사실을 후작 각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이제 와 그것이 겁이 나나? 아이를 이리 방치하다니! 제아무리 매정한 아버지여도 누이의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음을 아신다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날카로운 말에 벤이 씁쓸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죄책감과 자책이 한데 뒤엉킨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3공자로군요.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와는 달리 완연한 어른이 되셨습니다.”

“시끄럽다!”

우렁찬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끄럽기로만 따지면 이 남자가 배로 시끄러웠다.

지친 몸은 자꾸 잠을 청하려는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몸을 들썩이니 도통 잘 수가 없었다.

“아이가 얼마나 불안했겠느냐! 안 그래도 이곳에서 가엽게 벌벌 떨며 길을 헤매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딱히 그렇게 헤맨 것 같지 않은데.

“집에서 제대로 먹이고 재우지도 않아 맨발로 여기까지 온 것을 봐라! 틀림없이 배가 고파서 나온 것일 테지!”

도로테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을 튀기는 남자의 얼굴을 조막만 한 손으로 밀어냈다.

벤이 지친 목소리로 요구했다.

“아이를 내주십시오, 3공자.”

“…….”

“후작가에서 테아를 데려오라 하셨을 리 없습니다. 후작께서는…….”

벤의 침착한 말에 남자가 움찔했다.

아무래도 그가 오늘 이곳에서 도로테아를 납치하려 한 것은 후작가와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 틀림없었다.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녹봉을 높이 받는다. 게다가 좋은 집도 있어.”

“이제 겨우 성년을 넘기신 공자께서 어찌 아이를 돌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겨우?

이게 이제 겨우 성년을 넘긴 얼굴인가.

도로테아가 심각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빳빳하고 곱슬곱슬한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은 언뜻 봐도 겨우 성년을 넘긴 청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붉어진 귀가 눈에 들어왔다.

“유모를 들이면 된다!”

이 공방이 지겨워진 도로테아는 이제 그만 상황을 정리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졸리고 춥고 배도 고픈 데다 집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가 벤을 무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묘한 불쾌감이 서렸다.

마치 벤의 능력이 모자라서 이 몸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은 것처럼, 이 아이가 아픈 것처럼, 모두 다 벤의 탓으로 몰아가지 않나.

지금도 저렇게 얼굴이 희게 질려 옷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이곳까지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었다.

도로테아는 손을 들어 수염이 북실북실한 남자의 뺨을 제법 찰진 소리가 나도록 쳤다.

“……!”

품에 안은 조카에게 난데없이 뺨을 맞은 남자가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거 놔요. 집에 갈래요.”

“……아가야.”

다른 건 모르겠지만 벤의 얼굴에 자책이 스미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제인이 울먹였고, 우드가 천천히 다가와 두 팔을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도로테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우드에게로 손을 뻗었다.

외숙부란 남자는 몹시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뺨을 부여잡았다.

그녀를 받아 든 우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는 역시 심보가 고약하다.”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리의 힐난에 도로테아는 억울해졌다.

생각해 보면 살인귀가 될 뻔한 그를 진정시키고 그의 원한을 풀어 준 것도, 방금 한 소년에게 저주받았음을 알려 준 것도 모두 그녀가 아닌가.

‘착한 일을 하고도 고약하단 소리나 듣다니.’

그럼 기대에 맞춰서 고약한 짓을 해 줘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도로테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우드에게 속삭였다.

“여기 위치를 잘 기억해 둬요.”

“응?”

“집으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할 일이 있어요.”

도로테아의 시선이 강물로 향했다. 목걸이에 서린 탁기를 생각해 보면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을 가능성은 적었다.

목걸이는 아마 강물 바닥에 잠긴 채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을 것이다.

생명을 갉아 먹고, 오염시켜 가면서.

“내가 아까 강물에 떨어뜨린 목걸이를 찾아요.”

도로테아가 손가락을 교차시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렇게 생긴 목걸이, 찾아와요.”

물론 그녀를 안전하게 저택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홀로 다시 돌아와 강을 뒤지라는 말이었다.

우드는 그 얼토당토않은 지시에 귀를 의심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고약한 것.’

그는 새벽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강바닥을 뒤지고 다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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