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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0)화 (10/242)

혼술사 도로테아 10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는 도로테아를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침묵했다.

그녀는 다물린 입을 억지로 열려 들지 않았다.

“그래, 뭐. 그쪽이 아버지로서 대해 주길 바란다고 내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

소년은 스스로 말을 꺼내고 스스로 결론에 다다른 그녀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 일인 것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의 생각은 몹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떨떠름한 마음으로 상황을 외면하려는 순간이었다. 싱긋 웃은 도로테아가 소년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겁 없는 행동에 소년이 찡그리며 손을 떼어 냈다.

“무엄하다.”

기분이 좋아진 도로테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심을 뱉어 냈다.

“나는 살 거야.”

“넌 지금 살아 있다만.”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거야.”

“욕심이 많군.”

귀찮은 듯 답하던 소년이 힐끗 그녀를 봤다.

뭔가를 떠올린 듯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자유라니, 자유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데.”

“떳떳하게 살고 싶어.”

이 몸을 갖고 싶다.

지금의 그녀는 한때 누군가의 것이었던 남의 몸을 차지하고 앉은 손님이었다.

어딘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소년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냥 살아라. 수많은 사람들이 떳떳하지 않아도 살고 있으니.”

“그런가.”

“아버지라 여기기 싫지만 상대가 바란다면, 아버지로 여기는 척만 해도 되지 않으냐.”

충고하는 그의 심경은 꽤 복잡했다.

아직 열 살도 채 먹지 않은 아이에게 할 만한 충고는 아니었지만, 도로테아는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네. 아버지라고 불러 주기만 해도 좋아하니까 말뿐이라도 그렇게 해 주어야겠다.”

“……,”

이쯤 되면 이 소녀의 아버지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돈도 받고 식사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데 도통 아버지로 대우하기가 내키지 않았는데. 하는 척이라도 해 주어야겠지.”

이런 몹쓸 계집애를 보았나.

할 말을 잃은 소년이 콜록 기침하는 도로테아의 등을 저도 모르게 쓸었다.

그러고는 제 행동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약이나 먹어. 떳떳하든 아니든 그 몸으로는 곧 숨이 넘어가겠으니.”

진심 어린 충고에 눈을 깜빡이던 도로테아가 불쑥 말했다.

“네가 먼저 죽을걸.”

“……뭐?”

마치 아침 인사라도 하듯 여상한 목소리로 ‘죽음’을 예고받은 소년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소년의 목에서 반짝이는 물건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런 것을 지니고 있는데 오래 살 리 없지.”

은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는 흔히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며 부모가 주는 세례 선물이었다.

그러나 저것은 달랐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가득 묻어나는 것이 애정 가득한 선물일 리 없었다.

오래전 비슷한 물건을 본 적이 있어 한눈에 알아봤다.

누군가의 지독한 한이 서린, 저주가 깃든 물건이었다.

“사람을 해하고자 세상에 태어난 물건이야.”

“…….”

“지니고 있을수록 죽음이 계속 곁을 맴돌다 언젠가는 널 잡아먹으려 들걸.”

십자가에 씐 희미한 어린아이의 울부짖음이 그녀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어미의 배 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아이의 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멀쩡한 두 목숨을 생으로 날려 만든 물건이 어찌 불길하지 않으랴.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다.”

“그럴 리 없어.”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어머니의 물건이 아닐 거야.”

소년의 나이를 고려해 봐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 어떤 어미가 자식을 저주하기 위해 생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목걸이가 끊어졌다. 반질반질한 겉을 보면 꽤 아끼던 물건이었을 텐데도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십자가를 몇 번 만지작거리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하긴. 지나치게 순순하게 내 손에 쥐어지긴 했지. 내게는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도로테아가 침묵했다.

그제야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낸 존재가 그토록 흐릿하고 희미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불길한 물건으로부터 소년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써서, 형체조차 유지할 수 없었던 거겠지.

“이상하군.”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가?”

“네가 한 얼토당토않은 말들이 그리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아서.”

“전부 사실이니까.”

소년이 픽 웃고는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그대로 멀리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도로테아가 재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얘, 그거 나 줘.”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요구하는 태도가 자못 당당했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주받아 불길한 물건이라더니?”

“나는 그걸 사용할 수 있으니까.”

“이제 보니, 말주변이 좋은 좀도둑이로군.”

“아니야.”

지독한 저주이긴 하나, 혼을 녹여 만든 정성이 담긴 물건이었다.

제대로 정화할 수 있다면 상당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몹시 탐나는 얼굴로 목걸이를 살피는 도로테아를 보던 소년이 목걸이를 멀리 집어 던졌다.

가볍게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던 소년이 드물게 입꼬리를 올리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버린 물건이라면 너도 못 갖는다.”

“개새끼.”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소년이 멈칫했다.

“지금 뭐라 했지?”

“기껏 도와줬더니.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개새끼.”

조막만 한 입에서 오물오물 나오는 욕이 찰졌다.

앙상하고 퀭한 분홍빛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았다.

몹시도 억울하고 분노하는 모양새에 소년은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범한 것처럼 여겨졌다.

‘내 물건을 버린 것뿐인데 말이지.’

도로테아는 열이 뻗쳐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쓸모없는 몸뚱이 탓에 화조차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비록 지금이야 꼴이 좋지 못하지만, 나는 네가 함부로 욕을 지껄일 만한 신분이 아니다. 말을 조심하는 것이 어떠냐.”

“알 게 뭐야.”

“…….”

맹랑한 도로테아의 말에 소년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도로테아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운 목걸이. 그것만 있었어도, 제대로 힘만 흡수할 수 있었어도 이 몸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어.’

도로테아가 아니었더라면 결국 비명횡사했을 명줄이다.

그저 한순간의 변덕으로 좋은 일을 하고 기분 좋게 물건을 받아 가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눈에 들어찬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본 소년이 떨떠름하게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도로테아 에버리라고 했잖아.”

또박또박 꺼낸 이름에 소년이 기억하겠다는 듯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도로테아가 소년을 향해 물었다.

“너는?”

“내 이름은 알아 무얼 하게.”

“저주하게.”

“…….”

아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저주도 재료만 있다면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실력 있는 술사인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것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분기에 못 이겨 하는 말이긴 하지만.

소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며 나지막이 일렀다.

“루크.”

“루크?”

“어디 한번 저주해 보든가. 만일 네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몸을 돌린 그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도로테아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물이 졸졸 흐르고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주변에는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서늘한 날씨에,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소년은 반쯤은 호기심으로, 또 반쯤은 심술로 그녀를 두고 간 것이 분명했다.

설사 이곳에서 도로테아가 얼어 죽는다 하더라도 그의 잘못은 아니긴 했다.

‘다음에 만나면 뺨을 때려야겠어.’

그녀가 천천히 몸을 아래로 숙여 돌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발아래 선을 그어 땅따먹기를 하듯 영역을 만든 그녀가 손가락을 이로 물어뜯었다.

핏방울이 얼기설기 돌로 그어 놓은 진 위로 흩뿌려졌다.

아주 미미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좋을 텐데.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드는 정도의 가벼운 장난질이지만, 적어도 야생 동물들의 위협에서는 벗어나도록 도울 터였다.

‘이제 다들 일어났겠지.’

지금쯤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늦기 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더운 사람이 없어 좀 불안했다.

기껏 쓸 만하다 여겨 가져온 다리는 미련한 구석이 있고, 하녀는 눈치가 없다.

아버지라 하는 사람은 진심을 주는 것 외에는 서툴기 짝이 없는 사람이고.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애써 치켜뜨며 생각했다.

‘희한하게도 와 주길 바라고 있는 건가.’

사람에게 실망했으니 더 이상 기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라비에게서 받았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버렸는지 또다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잃어버렸다 여겼던 마음은 잃은 것이 아니라 꼭꼭 숨어 있다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아주 희미한 박동이 느껴졌다. 온기가 꺼질 듯 말 듯 위태로이 살아 있었다.

위태롭게 서 있던 그녀가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앞으로 숙였다.

휘청이며 짚은 발이 하필이면 그어 놓은 진을 밟았다.

덕분에 빛과 함께 희미해졌던 존재감이 다시 짙어졌다.

도로테아의 가쁜 숨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앉아 잠이 든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요한 숲속에 인기척이 나타났다.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배회하던 인물은 이내 갈대숲을 빠져나와 흔적을 추적한 끝에 소녀의 앞에 다다랐다.

커다란 그림자가 달빛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떡 벌어진 어깨에, 목이 아플 만큼 큰 키,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은 그가 걸친 후드로도 다 가려지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넓은 날이 박힌 창이 달빛을 받아 스산하게 빛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거인이 시선을 내려 제 허리춤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눈썹을 위로 올린 낯선 남자가 천천히 몸을 굽혀 도로테아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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