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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9)화 (9/242)
  • 혼술사 도로테아 9화

    잠든 벤이 있는 곳을 보던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약하지만 주변을 맴도는 기운이 있었다.

    서늘해진 공기를 따라 흘러들어 온 흐릿한 영이 그녀의 앞을 알짱거렸다.

    “그리 강하지도 못한 영 따위가.”

    제 앞을 얼씬거리며 수작을 부리는 것이 괘씸했다. 순간이지만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려졌다.

    ‘드문 일이군. 실체화(實體化)도 하지 못한 넋이 이토록 날뛰다니.’

    손끝에 닿는 희미한 혼은 힘을 잃어 가면서도 회광반조(回光返朝)처럼 최선을 다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해 버렸을 테지만 간절한 부름에 마음이 끌렸다.

    ‘감상적으로 된 걸까.’

    흘끗 밖을 바라본 그녀의 눈에도 삿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 이승에 머문 듯한데, 이 정도로 정순한 기운을 가졌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힘을 써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어 이번 생을 ‘살아 보기로’ 택한 것이 아니었던가.

    결심 끝에 바닥에 발을 디뎠다.

    걸음마다 위태롭게 휘청이는 몸을 작은 바람이 받쳐 주었다.

    “실체도 없는 것이 애를 쓰는구나.”

    도로테아가 웃었다.

    미약한 힘으로 살아 있는 육체를 도울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노력이 가상했다.

    “이럴 때에는 튼튼한 다리를 깨워 데려가고 싶지만…….”

    아직도 이승과 저승에 대해 논하려 들 때마다 기겁하며 못 들은 척하는 그가, 부름을 받았다는 도로테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했다.

    자신의 다리는 그 무엇보다 담이 작은 게 제일 문제였다.

    숨을 크게 들이쉰 도로테아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샤 부인 일가를 모두 보내면서 그녀가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혼이 길을 찾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혼력’이 충만해지는 시기가 온다.

    길잡이가 되어 혼을 보내 준 그녀에게도, 혼력이 조금이나마 들어와 있었다.

    이를테면 비상금처럼 숨겨 놓은 한 수인 셈이다.

    ‘이렇게 금방 쓰게 될 줄이야.’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반딧불 같은 영롱한 빛들이 한데 모여들어 부들거리는 다리로 흡수되었다.

    새끼 사슴처럼 덜덜 떨리던 다리가 꼿꼿하게 바닥을 짚고 섰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도, 쓸 수 있는 힘도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비척비척 문을 열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잠에서 깨는 사람은 없었다.

    앞서가는 도로테아의 뒤로 안개처럼 희미한 형체가 그녀를 보호하듯 뒤따랐다.

    *   *   *

    고요한 밤을 가로질러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발에 사륵사륵 스치는 풀로 인해 드레스 끝이 푸르게 젖어 들었다.

    쑥쑥 빠져나가는 혼력을 아껴 가며 빠르게 걸었다.

    물 내음이 코끝을 가득 채울 만큼 가까워진 순간, 뒤따르던 혼의 기척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이런.”

    사람을 불러 놓고선 안내는 반만 하고 사라지다니.

    나더러 어찌하란 말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푸…….”

    갈대밭 너머 깊은 강물 한가운데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물살을 헤치고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누군가의 반나체가 드러났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가느다란 팔뚝과 호리호리한 몸이 드러났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어깨까지 찰싹 달라붙은 것이 보였다.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에 그 얼굴이 드러났다.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새파란 것은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상당히 수려했다. 가늘고 짙은 눈썹 아래로 옅은 회색빛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방울이 턱선을 따라 맺히다 흘러내리는 모습이 소년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지척에 소년이 벗어 놓은 촘촘한 은빛의 갑옷이 보였다.

    이름난 장인이 만들었을 법한, 한눈에 봐도 귀하고 좋아 보이는 군화와 함께.

    ‘이 마을에 마가 끼었나.’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군인들이 왜 이리 자주 드나든단 말인가.

    도로테아는 무심한 얼굴로 나체의 소년을 훑었다.

    빽빽이 심어진 갈대 뒤에 서 있는 그녀의 작은 체구는 쉽게 상대의 눈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들킬 생각 않고 움직인 순간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사이에서 느껴진 미약한 인기척에 상대가 재빠르게 반응했다.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작은 비수에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나와.”

    냉랭한 목소리에 살기가 담겼다.

    아직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미성으로 살벌한 경고가 떨어졌다.

    “내가 그리로 가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터.”

    형형한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갈대숲을 헤치고 걸어 나왔다.

    그제야 드러난 인기척의 정체를 본 소년이 침묵했다.

    비쩍 마르고 창백한 안색을 가진 도로테아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굳은살 하나 없는 앙상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듯 가는 그녀의 목이 위태롭게 까딱였다.

    호기심 가득한 분홍빛 눈동자를 보면서도 소년은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뭐 하는 놈이지?”

    “난 도로테아 에버리야.”

    “…….”

    회색 눈에 짜증이 서렸다.

    상대가 경계한 것조차 우스울 만큼 별거 아닌 여자애라는 사실에 맥이 빠진 듯했다.

    “돌아가라.”

    “안 돼.”

    단호한 답에 소년이 다시 대답하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너를 만나러 왔으니까, 돌아갈 수는 없지.”

    뜻 모를 말을 건넨 그녀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미약하게 등을 밀어 주던 혼은 어느새 소년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물놀이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일 텐데, 계속하려고?”

    순수한 궁금증에 던진 물음이었다.

    세상 경험이 적은 그녀는 한밤중에 강에서 수영하고 싶어 하는 소년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여겼다. 다만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헤엄을 치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다.

    호기심 어린 도로테아의 짧은 반말에 소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나이도 어린 것이 건방지군.”

    소년의 나이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도로테아가 훨씬 어려 보였다.

    천천히 물가에서 걸어 나온 소년이 그녀의 앞에 섰다.

    아직 완연히 성장하진 않았지만, 군살 하나 없는 몸에는 옅은 근육들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골격이 잡히지 않았을 뿐, 평소 많은 훈련으로 다져진 몸이라는 증거였다.

    그가 가까워지자, 비릿한 피 냄새가 한층 강해졌다.

    “다쳤니?”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소년은 그녀의 옆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옆구리에 길게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수영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상처를 씻기 위함이었구나.’

    도로테아의 시선이 그의 상체로 향하자, 소년의 눈에 미미한 분노가 들어찼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 분간을 못 한다지만, 여자아이가 부끄러움이 없군.”

    “네가 벗은 거지 내가 벗긴 건 아니잖아.”

    벗고 있기에 그냥 보았을 뿐인데 어째서 내게 죄를 묻나.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벗어 둔 옷가지를 부스럭거리며 입었다.

    “말을 높여라. 어리다고 봐주는 것은 여기까지일 테니.”

    “…….”

    빤히 쳐다보던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소년의 옆에 주저앉았다. 어이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지.”

    단호한 답에 소년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 순간 도로테아가 살짝 몸을 웅크리며 신음했다. 혼력을 써서 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곳에 도착하고 나자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식으로 제(第)를 지냈더라면 더 많은 혼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탓에 1시간이 고작이었다.

    가빠진 숨소리를 들은 소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짚었다.

    “맥이 날뛰는군.”

    “응, 아파.”

    담담한 말에 소년이 그녀의 행색을 훑었다.

    한밤중 불쑥 나타난 소녀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몸으로 이곳까지 어찌 왔는지, 또 어째서 그의 곁으로 올 때까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굳이 검을 들이대지 않아도 채 몇 걸음 가지 못해 쓰러질 듯 안색이 창백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이미 죽어 가는 아이를 두고 굳이 살기를 뿌릴 이유가 없다 여긴 탓이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슬쩍 소년에게로 몸을 기댔다.

    미지근한 온기가 살갗에 닿자, 소년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가 뿌리치기도 전에 도로테아의 입에서 툭, 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아파.”

    “네가 아픈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냉랭한 목소리에도 도로테아는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소년의 말을 무시한 채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이야. 여기서는 생각 없이 편히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소년은 묘한 어감을 주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전생의 삶은 단순했다.

    사람들은 늘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이루어 주면 되었다.

    때로는 제 몸을 깎아서 내주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것을 거들어 이루어 주기도 했다. 자유 한 점 없는 단조로운 삶이 지루하고 지난하고 무기력해서 끝을 내려 했던 것이다.

    새로 얻은 삶은 단조롭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를 자꾸 생각하게 만들어.”

    “누가.”

    “그 사람이 내가 줄 수 없는 걸 바라거든.”

    또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소년은 이 기이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눈으로 엉뚱한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도로테아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사람이 바라는 걸 줄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자꾸만 불가능한 것을 바라니까.”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소년이 물었다.

    “그가 네게 그걸 달라고 강요했나.”

    “아니.”

    “그럼 네가 그걸 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이번에는 그의 물음에 그녀가 멈칫했다.

    아까까지 당황으로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고요하게 도로테아를 보고 있었다.

    새벽녘의 하늘처럼 옅은 잿빛의 눈동자를 보며 도로테아가 천천히 답했다.

    “없지.”

    “그럼 주지 않으면 되겠군.”

    간단한 결론이었다.

    소년의 답에 그녀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기 싫으니 주지 않으면 끝인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한 소년은 어느새 귀찮아하던 것과 달리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누구한테 빚이라도 진 게냐?”

    “이 몸의 아버지.”

    “뭐?”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이 몸의 아비가 아비 취급을 받고 싶어 하거든.”

    아버지가 아버지 취급을 받고 싶어 해서 고민이라는 말에 소년은 후회했다.

    처음부터 헛소리에 대꾸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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