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화
도로테아의 말이 옳았다. 제인은 손님이 찾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그가 마샤 부인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지?
제인의 발끝이 저릿저릿해졌다.
하얗게 질린 제인의 얼굴을 본 그가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물어도 아는 이가 없으니 직접 찾으러 갈 생각인 듯했다.
제인은 쥐어짜 낸 용기로 겨우 말을 꺼냈다.
“마샤 부인은 매일 저녁 골목에 있는 빵집에서 납작한 빵을 사 집으로 돌아가요. 붉은 잎의 쌍둥이 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이에요.”
그녀의 말에 그의 몸이 멈췄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맙다.”
제인은 마을로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문을 꼭꼭 잠그고도 소름은 가시지 않았다.
기이한 심부름을 부탁했던 도로테아는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왠지 그 얼굴을 보니 묘하게 안심이 된 제인은 그녀의 옆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어린 하녀가 잠에 빠진 뒤 머리맡에 있는 물그릇의 물이 가볍게 흔들렸다.
방 안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는 남자의 검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 *
한밤중, 제인은 오싹하고 서늘한 느낌에 번뜩 잠에서 깼다.
도로테아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아무것도 없는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일어나 계세요, 아가씨?”
놀란 제인의 물음에도 도로테아는 대답 대신 자신을 부축하려고 뻗은 제인의 손을 밀어냈다.
두 번, 세 번 다시 보아도 제인에게는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가지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아가씨……?”
제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로테아의 눈이 전에 없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황한 제인이 문으로 향하는 도로테아의 앞을 두 팔 벌려 막아섰다.
“무얼 하시려고요?”
“제인.”
일순간이지만 도로테아의 옅은 분홍빛 눈이 요요히 빛나는 붉은 루비처럼 짙게 보였다.
“가야 해.”
또렷한 목소리에 제인이 펄쩍 뛰었다.
“가긴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너무 늦으면 손님이 떠나 버릴지도 모르는걸.”
여전히 시선을 밖에 고정한 채 수수께끼 같은 말을 뱉는 도로테아를 향해 제인이 발을 동동 굴렀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손님이 누군데요!”
“지금 가야만 적절하게 그를 멈춰 세울 수 있어.”
그녀의 눈앞에 희끄무레하게 겨우 형태를 갖추고 있는 길이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녀를 그 손님에게로 안내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연기가 되어 흩어질 듯 위태로운 모양새를 보니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기 전일 때 바로잡아야 했다.
피를 먹인 검은 스스로 살의를 품게 된다.
수많은 이의 피로 한을 머금은 검은,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많은 피를 갈구할 것이다.
이윽고 주인의 의지를 살해하고 그 혼백을 지배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터.
시작은 인간이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지독한 원한의 고리를 끊으려면 지금 끼어들어야 했다.
“굳이 더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니. 손님이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
꿋꿋한 도로테아의 말에 다시 한번 만류하려던 제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손님. 분명 도로테아는 아까 제인이 만나고 온 남자를 향해 ‘손님’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수상하고 위험해 보이던 남자.
“그냥 그분을 보내 드리면 안 되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어린 제인이라고 해서 남자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도로테아는 그녀의 걱정 가득한 말을 듣지 못한 척 손을 내밀었다.
“날 부축해 줘.”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길 위에서, 한때 인간이었을 혼백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한 한이 허공에서 지린내처럼 풍기고 있었다.
코가 마비되어 가는 것을 보니 더 늦으면 눈과 귀도 막히겠지.
도로테아는 겁에 질린 하녀를 토닥였다.
좋든 싫든 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이 아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네게 부적을 하나 줄게.”
멀쩡한 종이 한 귀퉁이를 뜯어내자 제인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가, 값비싼 종이를……!”
제인의 앓는 소리에도 도로테아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하녀는 겁에 질렸던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세끼 식사보다도 종이 한 장이 더 비싸다.
그런 비싼 물건을 도로테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었다.
이리저리 얇은 갈래로 몇 번을 더 찢은 종이가 힘없이 나풀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너덜너덜 걸레짝이 된 종이일 뿐인데 도로테아는 빙긋 웃으며 그걸 제인에게 쥐여 주었다.
“자, 여기 부적이란다.”
제인이 찜찜한 얼굴로 ‘부적’이라 불린 너덜너덜한 종이 쪼가리를 받았다.
비록 임시 지전일 뿐이지만 도로테아가 직접 공을 들여 만든 것이니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이제 출발해야 해.”
울음소리의 간격이 늘어나고 있었다. 저 멀리 검은 어둠에 묻힌 길 위로 원귀가 몰려들었다.
눈먼 귀들이 너무 많아지면 정리하기 힘들어질 터였다.
‘몸이 이 모양이니까.’
도로테아에게서 지전을 건네받은 제인은 그녀의 아가씨를 부축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나섰다.
“강으로. 골목 끝에 있는 강으로 가야 해.”
“네.”
도로테아는 정확하게 강이 있는 곳을 짚어 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을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도대체 한밤중에 거길 뭐 하러 가시려는 거예요. 손님을 만난다는 건 또 뭐고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돼.”
질질 끌다시피 도로테아의 몸을 둘러업은 제인이 걸음을 옮겼다.
울상을 한 채 투덜거리긴 했지만 하녀는 충실하게 명을 이행했다.
도로테아는 빙긋 웃으며 제인의 등 뒤에서 하늘을 살폈다.
다행히도 위로 오르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연이 될 수 있기를 바라 봐야지.’
그녀의 옆에서 희끄무레하게 둘을 쫓는 형체 없는 안개가 착 따라붙었다.
튼튼하고 건강한 다리를 얻으러 가는 길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 *
남자는 흐르는 강에 검을 씻어 냈다.
온몸이 피범벅인 탓에 소매에서 흘러내린 피가 다시 검으로 떨어졌다.
결국 서늘한 강물에 몸을 씻고 나온 남자가 검을 들었다.
군데군데 옅은 핏기가 남아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봐 줄 만한 꼴이었다.
피가 씻겨 나갔어도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모두 지워 낼 수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군.’
남자의 입에서 고단한 숨이 새어 나왔다.
어린 소녀가 일러 준 대로, 그가 기다리던 여인은 빵을 사기 위해 골목을 지나쳤다.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는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여인은 쉽사리 목숨을 내주지 않았다.
그 검의 끝에 제 자식들이 겨눠질 것을 알았던 탓일까, 검에 찔린 채 뒷걸음질 쳐 가며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덕분에 피가 사방에 낭자했다.
어스름하게 날이 밝고 나면 누군들 골목길의 핏자국을 모를 수 없으리라.
‘일찍 이곳을 떠야겠군.’
곧바로 출발하고 싶었지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몸으로 성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가늠하는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을 끝마치지 못했으니 아직은 잡힐 수 없었다.
“에이린…….”
남자는 나지막이 죽은 여동생의 이름을 되뇌며 눈을 감았다.
다시 뜬 눈에 다음 목표를 향한 결연함이 가득 찰 즈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에게 접근하는 어설픈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꾸준히 다가오는 자그마한 두 형체가 보였다.
멀리 있어서가 아니었다.
선명히 드러나는 형태를 보아하니, 제게 다가오는 이들은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만큼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 둘이었다.
서로에게 기댄 채 느릿하게, 필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마치 그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가 흘끗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봤다간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건만.’
도대체 이 야심한 시간에 어린아이들이 어찌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먼 곳에서 부축을 받으며 오고 있던 소녀의 눈이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피로로 인해 흐릿하던 정신이 안개가 걷히듯 차차 맑아졌다.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찾았다, 내 다리.’
그녀의 뻐끔대는 입이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 * *
도로테아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후 굳어 버린 남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도로테아를 이곳까지 부축한 제인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녀는 아가씨의 발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부축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느라, 강가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인에게 도로테아가 명했다.
“이제 그만.”
의아해하며 멈춰 섰던 제인이 자신의 아가씨를 살폈다.
혹 몸이 아파 견디지 못한 나머지 불러 세운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도로테아는 백지장 같은 얼굴에 새파란 입술을 하고도 비교적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로테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제인이 헉,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가씨, 저 사람은…….”
남자가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온몸이 강물에 젖어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한 손에는 시퍼런 예기가 흐르는 검을 들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피비린내에 제인의 몸이 굳었다.
도로테아를 이끌고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할 텐데 야속하게도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에 반해 남자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은 도로테아는 웃고 있었다.
그녀의 귀로 검이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왔지만, 사내의 날카롭고 형형한 눈빛이 마음에 들어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물에 흘려보낸 것은 핏방울뿐이다.
그가 죽인 생명들은 잡귀처럼 몸에 달라붙어 지독하게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아둔한 남자는 몇 번이고 강에 몸을 씻겠지. 그런다고 개운해질 리가 없는데.
‘사검(死劍)이다.’
피를 머금은 남자의 검은 이미 사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대로 두면 더 많은 피를 갈구하며 주인을 망치는 요물이 될 것이다.
“늦은 밤이다. 어린아이 둘이서 올 만한 곳이 아니니 돌아가라.”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둘을 향해 명했다.
제인은 자신의 아가씨를 등 뒤로 숨기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정작 도로테아는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도, 피비린내 나는 검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태연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제인의 등을 토닥이며 남자에게 물었다.
“마샤 부인과의 일은 잘 정리하고 오셨나요?”
“……!”
“제 몸이 좋지 않아 이 아이를 대신 보내면서도 혹여 제대로 방향을 알려 드리지 못했을까 내심 걱정했어요. 다행히 잘 찾아가신 모양이네요.”
남자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지만 도로테아는 태연했다.
“오랜 악연을 정리하니 후련하신가요?”
궁금했다.
만일 전생의 ‘재신’이 스스로 몸을 던진다는 선택지가 아니라, 자신을 이용한 이들 모두를 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눈앞의 남자는 그렇게 했다.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은 전부 저 검에 삶을 마감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