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 외전 2. 황제의 태교 (153/153)


153. 외전 2. 황제의 태교
2023.01.19.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펼쳐진 과일의 향연에 앨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멀 후작도 비슷했다.

앵두, 무화과, 포도, 감, 배…….

거기에 생긴 것도 처음 보는 과일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종류가 참……, 다양합니다.”

“응, 며칠 전에 과일 먹고 싶다고 하니까 이렇게 챙겨 보냈더라고.”

“설마 이것도 황제 폐하께서 일일이 따 오신 겁니까?”

“에이 설마. 산지가 다 제각각인데 어떻게 그래.”

리시스는 별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양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앞선 예시를 벌써 둘이나 봐 버린 두 사람은 그다지 웃을 수 없었다.

뭘 해도 큼직하게, 최선을 다해 다양하게, 이게 쉬란 사람의 특성이기는 했지만…….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그 선봉을 달리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건 계절마저 다른 과일들 아니에요?”

앨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같은 계절에 볼 수 없는 과일들이 동시에 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 같은 산지면 그런데 북쪽 끝이랑 남쪽 끝을 훑으면 이렇게 모아지나 봐.”

“……그걸 며칠 만에 다 모을……, 아……. 수 있군요…….”

몇 달 전만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했다.

바로 키에르트의 위대한 업적 덕분이었다.

부부궁의 축조와 동시에 키에르트가 진행한 일은 도로사업이었다.

에드린과 쉬란을 잇는 길은 당연히 뚫어야 했다. 거기에 로구안과의 관계까지 더해졌다.

이번 전쟁에서 로구안으로부터 빼앗은 땅들은 대부분 원래 독립된 국가였다. 워낙 방치되어 있던 곳들이라 관리를 하려면 빨리 오갈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그렇게 뚫는 김에 아예 다 뚫어 버리자! 가 되었다.

마침 전쟁으로 황폐한 곳에 돈이 돌게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가장 좋았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뻥뻥 뚫렸다.

거기에 연락책까지 더해지자 쉬란의 서쪽 끝에서 에드린의 동쪽 끝까지 도착하는 데 하루 반이면 가능한 초고속 우편체계까지 완성되었다.


“그걸 이렇게 상 차리는 데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어쨌든 잘 쓰면 된 거 아니겠어?”

리시스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허멀 후작은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면……, 혹시……, 이게 원래 목적이었고, 경제발전이고 통치고 다 부차적인 목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허멀 후작의 의심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자. 이건 어떤가?”

“음, 맛있다.”

“이건 다른 맛이 나는 것 같은데.”

“아까 그게 더 맛있어.”

“잠시만……, 이건 가시가 좀 많군.”

키에르트는 생선 가시 하나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손수 발라내었다. 그렇게 먹기 좋게 다듬어진 생선은 리시스의 앞 접시에 소복이 쌓였다.

리시스는 옆에서 덩달아 얻어먹고 있는 티티만큼이나 볼을 크게 부풀리며 맛있게도 먹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키에르트의 얼굴은 딱 ‘먹는 것만 보아도 배부르다.’는 말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흠, 흠. 황제 폐하께서는…….”

부부의 알콩달콩한 관계를 적극 권장하는 허멀 후작이라지만 맨정신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달달했다.

감정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은 우리 황제 폐하가 대체 언제 저렇게 당도를 높이셨단 말인가.


“언제 그런 ‘남편의 도리’를 배우신 겁니까. 황실 교육 과정에도 없는 것인데.”

“꼭 스승이 있어야만 배우는 건 아니지.”

본능인가!

허멀 후작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책에 모든 것이 있는 건 아닌가.”

“……책, 말씀입니까?”

“그걸 도서관 관리를 맡은 그대가 그렇게 놀라며 되물을 일인가?”

키에르트는 되레 신기한 듯 허멀 후작을 바라보았다.

허멀 후작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도 책에 있었구나……. 그리고 그걸 이렇게 현실에 대입해서 이렇게나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꼭꼭 씹어서. 물도.”

“우웅, 웅.”

“옳지. 이번엔 이걸 줄까?”

허멀 후작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저 책에서 보고 배운다고 저렇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

키에르트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임신 중기까지도 잘 보이지 않던 리시스의 배는 나날이 쑥쑥 부풀어 갔다.


“배가 두 개가 된 느낌이야.”

리시스는 왼쪽으로 누웠다, 오른쪽으로 누웠다, 출렁이는 배를 안고 자세를 잡다 밭은 숨을 헉헉 토했다.

몸보다 더 튀어나온 배를 가눌 수가 없었다.

키에르트는 옆에서 무력감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배를 대신 옮겨 달 수도 없고, 줄여 줄 수도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없을 수 있다니.


“빨리 잠이라도 들면 좀 덜할 텐데.”

몸을 가누기 힘들어짐에 따라 잠을 자는 것도 힘들어졌다.

자다가도 몸이 무거워 깨거나, 태동 때문에 깨기 일쑤였다. 그도 아니면 그냥 숨이 차거나 손발이 저리기도 했다.

키에르트는 그저 리시스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잠을 청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는 배가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안 돼, 그럼 놀라서 깰 거야.”

힘겨운 와중에도 리시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음,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아기가 오는 꿈을 꾼 적이 있냐고 묻던데.”

“아, 그런 게 있었지.”

이것도 책에서 읽어 알고는 있었다. 아기가 생길 때 특이한 꿈을 꾸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이가 타고 나는 운명을 뜻한다고.

책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임신부가 해야 할 덕목, 피해야 할 것들, 아이의 성별을 알아내는 법, 똑똑한 아이가 태어나는 태교법 등등.

어떤 것들은 신중하게 읽고 따라했지만, 어떤 것들은 무시했다.

임신을 한 당사자를 괴롭히기 위해 써 놓은 것 같은 지식들이 너무 많았다. 뭘 먹고, 뭘 하든, 본인이 행복해야 행복한 아이가 나올 것 아닌가?

그 중 하나가 아이를 가질 때 꾸는 꿈도 있었다.

키에르트는 어떤 아이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인간이 아닌 용이 태어나도 리시스가 낳아준 아이면 기꺼이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키울 것이다.

키에르트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과 반대로, ‘이러이러한 아이가 나올 것이다.’는 기대마저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물어도 됐다.


“꿈 꾼 것이 있나?”

“아니. 사실 꿈 자체를 거의 안 꿔서.”

“그럼 됐고.”

“아, 그래도 임신 기간에 꾼 꿈이 있긴 한데.”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는 해도 궁금함은 별개였다.

키에르트는 저도 모르게 귀를 솔깃했다.

리시스는 흐흐흐, 낮게 웃더니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키에르트의 귀에 속삭였다.


“키에르트가 나오는 꿈.”

“……!”

키에르트가 숨을 멈췄다.

그 반응에 리시스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팔을 팡팡 때렸다.


“키에르트 꼭 닮은 아이가 나올 건가 봐. 그럼 나야 좋지.”

“…….”

이미 키에르트는 아이가 누구를 닮든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사람 가슴에 불 지르는 말을 함부로 하랬나.

책에서 임신 중이어도 적당한 부부관계는 괜찮다고 했다.

키에르트는 곧장 책에서 배운 대로 실천했다.

***

임신과정은 순탄했지만 출산은 그렇지 못했다.

리시스는 반쯤 죽을 뻔하며 겨우 딸을 낳았다.

그 과정에서 어의는 두 번, 황의는 다섯 번쯤 키에르트의 손에 죽을 뻔했다.

그리고 키에르트는 기분 상 열다섯 번쯤 죽었다 살아났다.

그러나 가장 죽음에 가까워졌다가 돌아온 사람은 리시스였다. 하지만 산실의 문이 열렸을 때 가장 산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리시스였다.


“다시는 임신하지 말고, 그냥 이 애를 후계로 삼는 건 어때.”

살아서 느껴 본 공포 중 가장 큰 공포를 느낀 키에르트가 파랗게 질려 울기 직전의 떨리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리시스도 끝나고 나니 시원하긴 하지만 두 번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게 쉬란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자, 에드린 왕국의 유일한 공주, 에리스는 두 나라의 후계로 태어난 순간부터 결정되었다.

두 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정신 놓고 바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이가 둘이면 각각 나눠서 통치하게 만들 수도 있고, 그러다 차차 합쳐지겠지 생각했는데 두 나라의 유일한 통치자가 덜컥 탄생해 버렸다. 에리스가 대를 잇기 전에 얼른 나라부터 합쳐 놓아야 할 판이 되었다.

두 나라의 신하들은 머리카락을 쥐어 뜯어가며 일에 착수했다. 슬프게도 몇몇은 진짜 탈모가 오기 시작했다.

***

그들의 슬픈 사정만큼이나 황제 부부의 첫 육아도 정신없이 밀어닥쳤다.

유모의 손에 자란 키에르트는 강력하게 자신이 직접 키우겠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위치가 위치인지라 웬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위험이 너무 컸다.

리시스도 그것에 동의하며 직접 육아에 동참했다.

둘 다 육아가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도, 훌륭한 남편도 책으로 배워 해낸 키에르트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아빠의 역할까지 잘 해냈다.


“우리 에리스. 잘 잤어요? 배고파요? 맘마 줄까요?”

딸의 이름은 에리스가 되었다.

낳기 한참 전부터 둘이 열심히 만든 이름이었다.

각 나라의 위대한 통치자의 이름을 쓸까, 엄마의 이름을 쓸까, 나라의 이름을 섞을까 고민이 길었다.

그러나 지위와 관계없이 우선은 행복한 아이로 키우자는 뜻에서, 서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 과정에서도 키에스, 키리스, 키시스, 리에스, 리에르트, 리시트 등등 수많은 이름이 생성되었다. 성별도 모르는 상태라 여러 후보군을 두고 있다가, 결국 에리스가 되었다.


“……잘 하네.”

리시스는 산처럼 쌓아 놓은 육아서에서 눈을 떼고 에리스를 안아 둥가둥가하는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몸과 체력 쓰는 일은 키에르트가 거의 도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아드는 것부터 헤매더니 이제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혀 짧은 소리도 그만큼 안정적으로 되었고.

키에르트는 에리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리시스도 배고파요? 맘마 같이 챙겨줄까요?”

“……그만.”

리시스는 죽어도 못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하지?”

에리스를 안은 채 다가온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자연히 하게 되는데. 이렇게, 내가 그대를 볼 때마다 입 맞추고 싶어지는 것처럼.”

“……진짜.”

리시스는 얼굴을 붉히다가, 키에르트의 옷깃을 잡아 끌어 입술을 마주댔다.

키에르트가 말한 대로, 누가 가르쳐주거나 어디서 보고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움직여졌다.
  

 
가운데에 낀 에리스가 입을 오물거리며 칭얼거렸다.

너무나도 서로를 사랑하는 부모 사이에서 자란, 지상 최대의 제국을 통치하게 될 에리스의 옹알이였다.

<황제의 유혹 외전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