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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유혹? (150/153)


150. 유혹?
2023.01.08.



 
무아렌까지는 마차로 일주일이 걸렸다.

이 거리를 키에르트는 단 이틀 만에 주파했다. 사람의 의지는 때로 물리법칙마저 뛰어넘었다.


“가는 중간에 거치는 영지가 다섯 개네?”

“예, 그렇습니다.”

“흐음…….”

리시스는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의지를 발휘해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무아렌까지 가는 도중에 놓인 영지들은 하나같이 빈곤한 곳들이었다.

에드린은 수도를 중심으로 동북쪽이 번성한 편이었다.

무아렌과 델리안은 각각 서쪽과 남쪽. 발전도 더디고 사는 것도 팍팍한 곳들이었다.

리시스가 수도에서 아무리 신경 써서 명령을 내린다 한들 본인이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것만 할 수는 없었다.


“들렀다 가자.”

시간이 지체되기는 하겠지만 키에르트가 그 정도도 기다려주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다, 같은 군주인데 이걸 이해 못 해줄까?


“음…….”

리시스는 그 질문 앞에 살짝 멈칫했다.

키에르트는 훌륭한 군주이자 자제력 훌륭한 남자이기는 하지만, 리시스를 대상으로 할 때만 예외적인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장군님.”

“예, 폐하.”

정식으로 왕이 된 리시스의 칭호는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렉싱턴도 꽤 마음에 들었는지 폐하란 말이 쏙쏙 잘 튀어나왔다.

그의 내면을 휘몰아치던 복잡함도 얼추 정리되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에드린을 위해 싸운다는 내면의 규칙대로 돌아간 것이다.

왕의 명을 따르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혼란스러울 일도 없게 되었다.

반역 직후에는 자괴감을 느꼈지만, 리시스의 몸에도 에드린 왕가의 피가 흐르는 데다 이전 에드린 왕보다 훨씬 에드린을 위한 왕이니까.


‘내가 지금 모시는 왕이 최고면 됐지!’

그 정도 선에서 렉싱턴은 자기 자신과의 합의를 마쳤다.

리시스에게 반발하려던 전 에드린 왕의 간신들은 모두 처단했다. 남은 것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에드린 왕의 폭거에 눈치만 보며 숨죽이던 사람들, 또는 불만을 품고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역시 반역으로 등장한 서출 공주의 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딱 봐도 똑똑한 것이, 아무리 못해도 전 에드린 왕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새 왕의 존재와 자신의 내면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리시스와 키에르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합의였다.

***



“새로운 왕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가는 곳마다 영주들은 리시스를 환영했다.


“편히 머무실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으로 준비했습니다만, 미흡한 구석이 많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말들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내놓은 방들의 상태가 리시스가 각오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좋은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아니,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다 굶어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방을 꾸릴 수 있었어?”

리시스는 순수하게 놀랍고 신기해서 물었다.

영주들은 하나같이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핫, 그게……, 갑자기 돈 들어올 일이 생겼지 뭡니까.”

“그게 뭔데?”

“별건 아니고……, 영지민들이 용역을 나갈 곳이 생겨서 수입이 확 늘었습니다.”

“용역?”

“예, 그냥, 좀. 급히 인부가 필요한데 가까운 곳에서 구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접근해 와서……, 혹시 몰라 영주인 제가 계약사항을 꼼꼼히 살피고 감시도 하고 있습니다. 삯도 후하게 쳐주고, 험하게 부리지도 않더군요.”

“그게 무슨 일인데?”

“그냥, 힘쓰는 일입니다.”

답변은 거기까지였다.

구체적으로 뭐에 어떻게 힘을 쓰냐고 물어도 그때그때 바뀐다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영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다들 뭐에 힘쓰는 일인지 숨겨?”

“그게, 사실 계약사항이…….”

“계야악?”

리시스는 말끝을 잡아 늘이며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을 하는지 외부에 발설하지도 못하는 계약이라니.


“무슨 악덕 계약을 맺어서 영지민들을 내돌리고 있는 거야?”

“아, 아닙니다! 정말 계약 자체는 안전하고 괜찮습니다만…….”

“대체 어느 놈이랑 계약을 한 건데!”

“그게…….”

“영주님! 영주님!”

그때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리시스와 독대하던 모습을 발견한 하인이 헉 놀라 코를 바닥에 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어억! 폐하!”

“괜찮아. 일 봐.”

리시스의 압박에서 벗어난 영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그분’께서 오셨습니다!”

“직접? 갑자기? 연락도 없이?”

“급히 찾으시는 게 있는 것 아닐깝쇼?”

“뭔지 여쭈고 내어드려.”

영주는 급히 하인을 돌려보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리시스가 팔짱을 끼며 문가에 기대섰다.


“직접 나가보지 않고?”

심문 분위기가 되었다.

아무리 모르는 척 넘겨보려 해도 상대는 왕이다.

영주는 대번에 긴장했다.


“예, 지금까지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흐응…….”

리시스는 날카로운 이빨 달린 짐승이 먹잇감을 탐색하듯 영주를 뜯어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영주의 손님이면 에드린의 손님이기도 하지. 내가 직접 가서 맞을게.”

“아, 아니!”

리시스는 영주가 말릴 새도 없이 몸을 돌려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 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딱 마주쳤다.

문을 열려던 손을 뻗은 손이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굳었다.


“……폐하?”

“……폐하.”

이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똑같아져 버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러는 당신은?’

부르기만 하고 다음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영주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리시스는 퍼뜩 놀라 키에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쉬란의 황제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예? 알고 있습니다.”

“응? 알고……, 있어?”

리시스가 영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쉬란 사람이었나?”

“……쉬란의 황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조건 쉬란 사람입니까?”

그것참 굉장한 선입견이십니다.

그러나 리시스는 그 말을 듣고도 의심의 시선을 풀지 못했다.


“보통 에드린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

“아, 예. 보통은 그렇긴 하지요. 보통은……. 하지만 일자리 주고 돈 주는 사람은 나쁘지 않은 사람이지요.”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이 분이 ‘그분’이야?”

“예에……, 뭐……, 그렇습니다.”

리시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른 에드린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자신에게 그 사람의 정체를 숨기려고 다들 똘똘 뭉쳤단 말인가.


“다들 모르나 본데, 이 사람 내 남편이야.”

둘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무효가 되었다는 성명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니 아직까지 혼인은 유효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인 자신에게까지 숨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고용주께서 정체를 숨기는 것을 계약조건으로 거셔서…….”

영주가 키에르트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리시스의 눈이 이번에는 키에르트를 향했다.


‘이게 무슨 얘기지요?’

당장 해명을 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박박 긁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설명하겠습니다, 내 아내 폐하.”

“…….”

호칭이 좀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키에르트의 안내대로 밖을 향했다.


“바로 무아렌으로 가도 괜찮겠지?”

역시 거기에 뭐가 있구나.

가서 직접 봐야 답이 나올 듯했다.

영주관 밖으로 나가니 미하엘이 키에르트의 말을 지키고 서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에 리시스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네.”

“황제 폐하가 계신 곳이 제가 있을 곳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보니 미하엘의 행색이 영 초췌했다.

키에르트가 뭔가 강행군을 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어떻게 폐하께서 여기까지 왔어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리시스는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기다리다 지쳐 달려왔지. 빨리 와 달라고.”

“……아……. 그렇게……, 오래 지체되진 않았는데…….”

중간에 겸사겸사 일을 보느라 늦게 도착한 죄인은 우물쭈물 변명했다.


“서운해.”

키에르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죄송해요!”

리시스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파닥거렸다.


 


“그렇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는데……, 직접 확인해 볼 일들이 많아서……. 아, 물론 이게 폐하와의 약속보다 중요한 건 아니……, 지 않은……, 건 아니고……, 아니 약속도 중요한데…….”

본심과 변명이 제멋대로 뒤죽박죽 섞여 들어갔다.


“나는 그대 생각밖에 없는데…….”

키에르트의 찌르는 말에 리시스는 한없이 찔렸다.

형태가 있었으면 이미 과다출혈이었다.


“아니, 으으……, 잘못했어요.”

“잘못한 건 아니지. 왕으로서 아주 잘 하고 있는 것이니까.”

“……응?”

“하지만 속 좁은 남편이라 삐친 거야.”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움찔 놀랐다.

우리 황제 폐하가……, 삐치기도 하는 분이셨……, 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맞다. 키에르트는 질투도 심하고 은근히 잘 삐쳤다.

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한 것을 들으니 머릿속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느낌보다 몇 배는 선명하게 다가와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제가 너무 늦어져서 데리러 오신 거예요?”

“응. 더 이상 기다렸다가는 긴장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서.”

“폐하……, 가요.”

“응. 내가.”

그래. 키에르트가 은근히 참을성 없을 때가 있었다.

이것도 말로 하니 새삼 사람이 다시 보였다.


“무아렌에 대체 뭘 준비해 두신 거예요?”

“비밀.”

“아, 그렇죠……, 그런 건 비밀이죠.”

리시스는 일에 치여 잊고 있던 무아렌 행의 본분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은 지금 키에르트의 이벤트를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근방 영지들하고 관련이 있어요?”

“있다면 있을 수도 있고…….”

키에르트는 대답을 빙빙 돌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거예요?”

조급해진 리시스의 추궁에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지그시 마주보았다.

애를 태울 만큼 태웠다 싶어 키에르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유혹?”

“……예?”

그러고는 얄밉게도 무아렌 강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무아렌 강은 이곳에서부터 멀지 않았다.

하지만 마차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멀게 느껴졌다.

자신의 늦은 도착을 기다리던 키에르트의 마음이 이랬을까.

리시스는 역지사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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