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무궁한 영광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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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무궁한 영광 있으리
2023.01.05.
대관식 준비위원회에 바로 키에르트가 영입되었다.
본격적으로 준비위원회에 들어간 키에르트는 거침없이 진두지휘를 시작했다.
다른 나라 황제이기는 하지만 남편이니 끼어들 자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자니 키에르트가 너무 큰 도움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 계단은 에드린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 계단 올라가다 지쳐서 다음 행사 진행 못 하면 어쩔 건가. 왕을 존중하지 않는 건가? 그리고, 에드린이 천 년 왕국이 되면 계단을 천 개 올라가라 할 건가?”
“그건 칠백 년 뒤에 생각할 일 아닙니까?”
“삼백 개도 많아. 포기해.”
“…….”
“…….”
이런 식으로 깎아낼 것은 아주 확실하게 깎아내 주었다.
키에르트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드레스는……, 꼭 드레스여야 할 필요도 없지. 왕이니까.”
그리고 아주 파격적이기도 했다.
드레스는 여성의 전유물이자 족쇄이기도 했다.
몸을 옭죄고, 행동을 제한하는 복장. 하지만 왕은 성별의 위에 있는 지고한 존재다.
역대 왕은 남성이 대다수였지만 여자 왕도 없지는 않았다. 여자는 작위를 계승하지도 못하는 에드린 안에서 파격적인 승계였다.
그만큼 여성이 왕이 되면 성별의 족쇄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지 않은 여성 자체가 리시스의 머릿속에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쉬란에서는 전례가 있어요?”
“음. 황제가 된 이후 평생 바지만 입은 황제 폐하도 계시지. 그분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고.”
“아…….”
“그 이후로 쉬란은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게 되기는 했지.”
쉬란의 황궁에서 봤던 사람들은 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치를 뽐내기 위한 개인의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시장이나 축제 때 길에서 바지를 입은 여성을 보고, 친위대의 여성 대원들은 모두 남성 대원과 다를 바 없는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건 직업적인 이유 때문에 허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지만 선택하는 것과 애초에 금지당하는 것은 달랐다.
리시스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졌다.
“바지.”
자신의 넓어진 세계를 에드린 전체에 퍼뜨리고 싶었다.
벌써부터 왕으로서의 계획이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했다.
***
키에르트가 끼어든 덕분에 대관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두셔도 돼요?”
자신의 급한 일이 어느 정도 처리가 되자 키에르트가 꽤 오래 황도에서 떠나 있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전서조가 매일 소식을 날라오고, 긴 문서는 파발을 보내 적당히 처리하고 있어.”
어차피 두 나라가 앞으로 평화롭게 지낼 것은 분명한 일이니, 미리 길을 닦아두는 셈 친다며 전서조와 파발을 확 늘렸다.
그것들은 키에르트가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그것뿐이면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키에르트는 정신없이 바빴다. 하루에 날아오는 전서조만 수십 마리였다. 그리고 키에르트 역시 하루에 수십 마리의 전서조를 보냈다.
“괜찮은 거……, 맞죠?”
“음. 어차피 대관식의 국빈으로 자리할 생각이었으니까. 오며가며 시간 버리느니 이쪽이 낫지. ……기왕이면 그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고.”
리시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라 키에르트와 늘 붙어 있을 수 없었다.
같은 궁 안에서 지내는데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질 줄은 몰랐다.
당장 밀어닥치는 바쁜 일만 끝내 놓으면……. 그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럼 대관식이 끝나면 쉬란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돌아는 가야겠지.”
키에르트는 미적미적 대충 대답했다.
느낌상으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하지만 황제를 때려치우지 않는 이상 그러기는 어려울 텐데?
키에르트는 형제도 없고, 자식도 없다.
리시스는 당최 키에르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예산은 최소한으로, 하지만 화려하고 리시스가 돋보일 수 있도록.
리시스는 새하얀 천에 금으로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백마가 끄는 마차에 올라탔다.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햇살은 약해졌지만 몸에 태양 같은 황금을 두르고 있어 리시스는 한여름처럼 환하게 빛났다.
“만세! 만세!”
백성들은 그 환한 빛만큼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만세를 외쳤다.
리시스는 마차에 올라탄 채 왕도를 한 바퀴 돌고 대관식장으로 들어갔다.
“왕과 에드린에 무궁한 영광 있으리!”
대관식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입을 맞추어 외쳤다.
“무궁한 영광 있으리!”
리시스는 왕좌를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이미 한 번 앉아보았던 자리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자격을 갖추었다.
자신은 이제 왕이었다.
리시스는 왕좌를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 왕좌 위에 올려져 있는 왕관을 들어올렸다.
왕관이 대관식장 한가운데에 뚫린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빛무리는 리시스의 머리 위에 놓였다.
왕의 탄생이었다.
“와아아!”
“만세! 만세!”
자신을 향한 수많은 이들의 환호.
쉬란의 황후로서 받았던 환호와는 또 달랐다.
리시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이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누구나 따스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나,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이제부터 내가 에드린의 왕이며, 에드린의 모든 것을 지킬 수호자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말이었지만 리시스는 온 마음을 담아 선언했다.
“신이여, 에드린을 가호하소서!”
리시스의 온 마음이 담긴 간청이었다.
“에드린을 가호하소서!”
신하들도 똑같이 복창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환호, 새로운 에드린 왕, 리시스를 향한 축복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어진 순서는 각국의 축하 사절들의 인사였다.
이제부터는 연회가 열리는 가운데 편한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다. 그래서 리시스도 웃으며 편하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에드린의 새로운 왕이시여.”
그때 키에르트가 가장 먼저 나섰다.
쉬란의 황제보다 먼저 나설 사람이 없기는 했다.
키에르트는 단상 아래에서 왕좌에 앉은 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키에르트를 내려다보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적응이 되지 않는 상황이 어색해 두 손을 꽉 마주잡았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키에르트는 말투마저 바뀌었다.
한 나라의 지배자가, 다른 나라의 지배자를 향하는 존중이 섞인 말투였다.
리시스는 벅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쉬란은 에드린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완벽하게 동등한 눈높이.
이것이 키에르트가 말했던 그것이었다.
낯설지만 가슴이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해 보지 않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서보니 오히려 확실하게 느껴졌다.
키에르트를 가지고 싶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가 되니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키에르트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쉬란에서의 축하선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시간 맞춰 드리지 못함에 양해를 구합니다.”
“괜찮습니다. 이 자리에 와 주신 것만으로도 큰 선물입니다.”
리시스의 의연한 대답에 키에르트는 가볍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가기 직전, 눈이 마주쳤다.
키에르트의 눈빛이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리시스는 뿌듯한 마음에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차례인 사신을 맞이했다.
각국의 사신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축하 선물과 더불어 축복의 말을 늘어놓았다.
“새로운 왕의 등장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에드린에 영광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선물은 끝없이 길게 놓였다.
아무리 에드린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한들, 새로운 왕이 등극했으면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타국의 왕들은 최대한 성의 있는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리시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걸리지?’
리시스가 오직 궁금한 것은 키에르트가 준비한 것이었다.
***
키에르트가 더 이상은 에드린에 머물 수 없어 잠시 쉬란으로 돌아간 사이, 드디어 쉬란에서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금은보화였다.
그냥 금은보화도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선물이 쌓였다.
이게 다 키에르트가 보낸 것들이었다.
그는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질릴 때까지 선물을 마련해 보냈다.
오늘도 알현실 한가운데에 산더미처럼 선물이 쌓였다.
“……어떻게 할까요?”
시종장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금은보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은보화가 지긋지긋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드린 성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작해!’
키에르트는 적당히를 몰랐다.
리시스는 금은보화를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금은보화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는 해도, 리시스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듣고 싶은 그 한 마디의 말.
‘대체 언제쯤 주려고.’
이제는 애가 타고 목이 마르다 못해 슬슬 불쾌해지려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왕으로서 살펴야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그래서 나날이 기분이 나빠져 갔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데도 일은 평소랑 똑같이 열심히 해야 하는가.
리시스는 성의 없이 보고서를 눈으로 훑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아렌 강을 중심으로, 빈곤률이 줄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최근 그쪽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생긴 듯합니다.”
“무슨 일자리지?”
왕실 주도하에 무언가를 만든 기억은 없다.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어 리시스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보고는 딱 거기까지여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가 봐야 하려나……?”
무아렌은 쉬란과의 국경이자 키에르트와 맹렬하게 싸웠던 장소이기도 했다.
무아렌 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였으나 전쟁의 여파로 현재 활용되지 않았다. 개간을 한다면 그쪽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았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부터 하려면 일단은 가서 보아야 했다.
전쟁터에서 전투를 위해 보았던 것과 개발을 위해 보는 것은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지냈다 하더라도 확인은 해야 했다.
그즈음 키에르트에서 마지막 선물이 도착했다.
마지막 선물은 금은보화가 아닌 명마와 마차였다.
그리고 전언이 함께 왔다.
『무아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소.
그곳에서 키에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