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경험자가 여기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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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경험자가 여기 있었네
2023.01.01.
“동맹……, 얘기는 아니죠?”
유명무실해졌지만 지금껏 두 사람을 묶어두고 있던 관계의 근간은 동맹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제는 알 수 있다.
헷갈릴 수조차 없을 만큼 키에르트의 마음이 선명히 보였으니까.
“설마.”
리시스도 ‘아니죠?’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지금 그 단어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키에르트에게는 충격이었다.
아니, 아직까지도 그 동맹이란 단어가 떠올라?
“동맹 얘기도 하긴 해야 하겠지만.”
그건 에드린의 새 왕이 등극한 이후의 문제다.
쉬란과 에드린은 지금까지 정식 국교를 트지 않은 채 지내왔다. 이제부터는 적국이 아니라 동맹국으로 다시 묶이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동맹 얘기는 꼭 나눠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동맹으로 정리될 것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
델리안에서부터 줄곧 꺼내고 싶어 뱃속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그 말.
어쩌면 지금이 그때일 수도 있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머지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키에르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제가 왕이 되면 하실 거예요? 왕이 안 되면 안 하고?”
리시스가 덩달아 긴장하며 물었다.
“아니. 그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말은 할 거야.”
리시스가 자신만의 위치를 잡기를 바라는 마음에 왕의 길을 추천했지만, 강요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자신의 욕심이었다.
리시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살게 해 줄 것이다. 눈 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순간을 원하는 것으로만 채울 수 있게.
“……당장 듣고 싶긴 한데.”
“그대가 원한다면.”
“생각 조금만 해 볼게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다급하게 덧붙였다.
키에르트는 웃으며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꽃 한 송이를 받아도 원하는 상황이 있던 리시스였다. 당연히 ‘그 말’도 꿈꾸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데이트 때까지만 해도 리시스의 꿈이 어떤 방향인지 알지 못해 꽤 많이 헤맸다.
그러나 이제는 키에르트도 감을 잡았다.
리시스가 기대해도 좋을 만큼.
***
“왜 고민을 하시는 겁니까?”
렉싱턴은 자신이 리시스의 연애상담까지 해 주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리시스는 맡겨 놓은 것처럼 렉싱턴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둘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늘 붙어 있으면서 왜 굳이 자신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둘이 알아서 얘기하고, 알아서 합의 보시라고 외치고 싶었다.
“폐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는 한데……. 왕이 됐다가 무를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요.”
중간에 양위를 할 수도 있지만 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폐하께 ‘그 말’만 듣고 왕 취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왕이 된 다음에는 폐하랑 어떻게 지내게 되는 거지?”
리시스의 고민을 가만히 듣던 렉싱턴은 문득 다른 것을 떠올렸다.
“리시스 님께서 ‘앞일 걱정’을 하시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응?”
“이전에는 ‘고민해봤자 어차피 내 마음대로 못 산다.’며 그냥 되는대로 살겠다 하셨지 않습니까.”
전선에서 함께 있을 때 들었던 말이다.
전선이라고 하루 종일 전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마을의 일을 돕거나 훈련, 정비를 하느라 시간을 쓰기도 하지만 사람이니 쉬기도 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 할 수 있는 일은 수다뿐이다.
매일 살 부대끼고 사는 사람끼리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왔다면 가족 이야기를, 그도 없으면 ‘이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 같은 희망사항 같은 것들을 늘어놓았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희망사항이었지만 결국은 비슷했다.
‘평화로운 곳에 정착해 먹고 살 만큼 벌며 가족을 꾸려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 얘기가 오갈 때마다 리시스는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얘기하기 싫은 모양이다 넘어갔던 사람들도 몇 년이 지나가자 차츰 묻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때 리시스의 대답이 이것이었다.
‘나는 공주니까 꿈 꿔봤자 그대로 못 살아.’
공주라서 그 어린 나이의 어린아이가 전쟁터까지 내몰렸다.
그 사정을 눈으로 지켜보며 함께 지내 온 사람들은 일시에 숙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리시스도 꿈을 꾸지 않았던 건 아니다. 멋진 왕자님에게 고백 받는 꿈,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온 백성의 환호를 받는 꿈,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을 꾸리는 꿈.
그러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에는 ‘어떠한 삶’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랬네?”
그런데 그런 과거가 엄청나게 오랜 옛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가?’ 할 정도로.
“쉬란의 황제는 그걸 원한 것 아니었을까요?”
리시스가 꿈꾸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리시스 님은 계속 바라기만 하시면 되고, 고민은 그쪽이 하는 거지요.”
“……응?”
어쩐지 괴롭힘이 느껴지는데.
하지만 렉싱턴은 그저 웃으며 친절한 척 고민의 답을 주었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신의 곁에서 숨 쉬고 있어 달라 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손에서 놓겠다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요. 아니, 그리고, 무슨 자신감입니까?”
렉싱턴이 갑자기 흥분했다.
“우리 리시스 님이 얼마나 똑똑하고 멋진 사람인데.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전전긍긍하지는 못할망정. 붙어 있고 싶으면 본인이 알아서 고민하고, 알아서 답을 찾아와야죠. 그 답까지 리시스 님이 뭐 하러 고민해서 가져다줍니까?”
“그,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렉싱턴이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너무나도 확고한 대답에 리시스도 설득되었다.
“하지만 선택은 리시스 님의 마음에 따라 가십시오.”
키에르트가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원해서 하는 선택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지금도 그가 원한다니까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닌가.
리시스는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모든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욕구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자각했다.
진짜 자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
“……더 생각해 볼게.”
그것을 더 선명하게 찾을 때였다.
***
며칠간 리시스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렉싱턴은 물론이요, 키에르트조차 식사 때를 제외하면 보지 않았다.
리시스의 고민을 눈치챈 두 사람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시스도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리시스는 마음을 정했다.
“왕이 되겠어.”
정무회의의 첫 마디로 꺼낸 말에 모여 들었던 신하들은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환호하는 신하들의 얼굴을 보며 리시스도 가볍게 미소 지었다.
같이 지내는 방법은 키에르트가 알아서 찾아내겠지.
왕으로서 책임감이 무겁기는 했지만 자신 외에 다른 왕이 올라서서 에드린이 또 개판이 나는 꼴을 볼까 봐 무서웠다.
그 꼴을 보느니 그냥 자신이 왕 하고 좀 피곤한 게 나았다.
“그럼 대관식 날짜부터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다렸던 신하들은 득달같이 대관식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관식을 치르면 관두겠다고 도망가지는 못하겠지, 하는 속셈들이 훤히 보였다.
“응. 최대한 빨리.”
리시스도 마음이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빨리 왕이 되어야 키에르트에게 듣고 싶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당장 대관식 준비 위원회부터 조직하겠습니다!”
“그런데 대관식 준비해 보신 분……?”
“……아?”
에드린 왕이 워낙 젊은 나이에 즉위해서 오래 해먹은 탓에 즉위식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에드린 왕의 눈 밖에 나서 사형당한 사람들도 워낙 많다보니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일단 자료가 있으니 그것부터 뒤져보고…….”
“꼭 이전과 똑같이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얼렁뚱땅 굴러가도 굴러만 가면 된다.
의지 하나만으로 열심히 굴리고 굴리다보니 그럭저럭 틀이 잡히는 것 같았다.
대관식은 결국 왕 본인의 취향이 최대한 존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리시스는 취향이랄 것이 크게 없었다.
“돈 아껴야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 탓도 있었다.
“그냥 최대한 간단히, 단순히, 형식만 맞춰서.”
“안 됩니다! 이건 국가의 위상이 걸린 문제입니다!”
“국가의 위상을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간단히.”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리시스 본인이 욕심을 부리지 않자 주변 사람들이 더 성화를 부렸다.
크게 하면 국고가 털리고 작게 하면 국가의 위상이 손상되고.
어느 선에서 타협을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본 적이라도 있어야 기준이 생기지.
지금은 기준이 없으니 그저 난감했다.
리시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했다.
“으음…….”
“일단 주요 색은 지금껏 역사상의 대관식에서 늘 그랬듯 불타는 듯한 빨강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 공주님은 파스텔 톤이 더 잘 어울리는데.”
그때 회의실 문 쪽에서 키에르트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모든 시선이 동시에 그쪽을 향해 홱 돌아갔다.
쉬란의 황제라면 그 이상이 없을, 지고한 사람이지만 에드린에서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오랜 시간 쌓인 원수를 향한 불호의 감정 덕분에 황제고 뭐고 일단 눈을 부라리고 보았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키에르트는 당당하게 주장을 펼쳤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대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주인공이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지.”
“여기가 어디라고 막 들어오십니까!”
대뜸 싸울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냐, 아냐. 내가 점심 같이 먹자고 했어.”
리시스는 흘끔 시계를 쳐다보았다.
회의가 길어지다 보니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이미 점심시간은 한없이 지난 뒤였다.
비밀스러운 회의가 아니라 회의실 문도 열어둔 채였다.
시간이 늦어져 와 보았다가 열린 문으로 들어온 말에 끼어든 키에르트의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감정이 깊은 신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시스의 만류에도 기어이 한 마디를 더 하고야 말았다.
“당신이 에드린의 대관식에 대해 뭘 아신다고!”
키에르트도 지지 않았다.
“에드린의 대관식은 잘 몰라도, 대관식을 주인공으로 경험해 본 사람은 나뿐이지 않은가?”
“……어.”
그 순간 리시스의 눈이 번득였다.
여기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삽질해가며 끙끙댈 일이 아니었다.
무려 대관식을 직접 경험해 본, 경험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