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왕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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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왕이 되면
2022.12.29.
당장 목욕물이 마련되었다.
키에르트는 전쟁터에서처럼 신속하게 몸을 닦았다.
티티도 덩달아 벅벅 씻겨졌다.
“삐이이익! 삐아아악!”
목욕에 익숙하지 않은 티티가 애절하게 발버둥쳤지만 키에르트의 급한 마음은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힘을 실어 벅벅 닦으니 티티의 그 작은 등에서도 제법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저기, 괜찮은 거죠? 티티 살아는 있죠?”
“때가 많아서.”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목욕을 할 여유조차 없는 키에르트는 홀로 욕조에 들어갔다.
그래도 혹시 모를 충성어린 암살시도가 있을까 봐 리시스도 욕실에 같이 들어갔다. 하지만 가림막 밖에서 기다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가림막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티티가 정말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즈음, 가운을 걸친 키에르트가 가림막 밖으로 나왔다.
“끝.”
“아…….”
리시스는 조용해진 티티를 내려다보았다.
키에르트의 한손에 들린 티티는 맹렬하게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다행이다. 죽은 건 아니라.
하지만 한동안 키에르트에게 심부름을 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잠깐 떨어져 봐.”
“삐이이이…….”
키에르트는 다른 손으로 티티를 잡아 떼어내 수건으로 똘똘 말았다.
티티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지만 키에르트에게는 하등 협박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위험한 맹수는 키에르트였기 때문이다.
티티까지 떼어 놓은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마주보았다.
“이제는 침대로 가도 되나?”
“식사. 식사도요.”
“……침대에서 먹으면 안 돼?”
“그…….”
우선 드러 눕고 싶은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침대로 가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아주 강하게 났다.
식사 대신 자신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느낌.
그러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면 더 심하게 물어뜯길 것 같아, 리시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식사는 침대로 가져오라 할 테니 우선 누워서…….”
“그게 뭐야.”
키에르트는 거칠게 항의하며 리시스의 허리를 안아 번쩍 들쳐 업었다.
“더는 못 기다려.”
“아, 알았어요…….”
리시스는 얌전히 키에르트의 손에 의해 침대로 옮겨졌다.
낚아채는 손길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침대로 내려놓는 것은 사뿐하고 부드러웠다.
리시스를 침대에 먼저 내려놓은 키에르트가 입술부터 내리눌렀다.
쪽.
리시스는 눈을 감으며 키에르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두 손 안에 들어온 뜨겁고 단단한, 익숙한 이 몸. 키에르트였다.
키에르트는 입술부터 시작해 이마, 눈꺼풀, 뺨, 턱, 목덜미까지 빠짐없이 도장을 찍듯 키스의 비를 내렸다.
“보고 싶었어.”
겨우 도장 찍기를 끝내고 상체를 조금 띄운 키에르트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의 몸에서 솟구친 열기가 리시스에게도 옮겨 붙었나보다. 온몸이 홧홧하고 감질 맛이 나는 것처럼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저도요.”
머리가 어질어질해서일까. 말이 평소보다 더 솔직하게 튀어나왔다.
한 번 편지로 쓰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연습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말도 연습을 해야 는다더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글자를 봐도 폐하 얼굴만 떠오르는데, 막상 눈앞에 없으니 아른아른하고. 그래서 더 선명한 진짜 폐하가 더욱 보고 싶어졌어요.”
줄줄이 이어지는 리시스의 마음 고백에 키에르트의 얼굴도 터질 듯 붉어져 갔다.
그래도 애정 표현만큼은 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것도 질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도. 그 화가의 실력이 아주 별로였지 뭐야. 초상화를 봐도 그대의 실물에 비해서는 너무 떨어져서 보면 볼수록 더 그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초상화요? ……아.”
그게 뭐더라, 생각을 더듬던 리시스가 곧 생각해냈다.
여름축제에서 길거리 화가에게 맡겼던 두 사람의 기념 초상화.
“그거, 완성됐어요?”
“응, 황궁에 가지고 왔더군. 비슷한 것도 여러 개 그려서 가져오긴 했는데, 다 별로야.”
“가져왔어요?”
“있지.”
보면 볼수록 별로라고 했지만 리시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초상화뿐이었다.
이동 중에도 보려고 들고 왔다. 지친다 싶어도 그 초상화만 보면 기운이 샘솟아 더 힘차게 내달릴 수 있었다.
키에르트는 침대 옆에 던져둔 벨트 주머니에 팔을 뻗어 초상화를 꺼냈다.
“이건데…….”
“어디어디……. 엥?”
리시스는 초상화 속의 자신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그렸는데요? 저보다 훨씬 예쁘게 그려준 것 같은데.”
“이게 어디가.”
“진짠데……. 으음, 저는 신경 써서 그려줬는데 폐하가 영 그렇긴 하네요.”
키에르트가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리시스의 얼굴만 봤지 자신의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괜찮은데.”
키에르트의 눈에는 오히려 리시스의 얼굴보다 잘 그려놓은 걸로 보였다.
그러나 리시스는 까탈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폐하랑 나란히, 이렇게 놓고 보면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인데.”
“그대의 얼굴도 마찬가지야.”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 강경하게 충돌했다.
그제야 두 사람은 화가의 실력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들의 평가를 인정했다.
“……흠, 흠. 다음번엔 둘 다 잘 그리는 화가를 구해 봐요.”
“그래, 그래야겠어. 온갖 곳을 다 다니면서 종류별로 남겨 놓는 거지.”
못 본 사이 하고 싶은 것은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곰팡이처럼 무한으로 증식했다.
곁에 없으니 아쉬운 것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왜 미리 해 두지 않았을까 후회되는 것도 많았다.
그 중 가장 아쉬웠던 것은 리시스와 지냈던 시간을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된다면 최대한 많이 남겨두자고 키에르트는 결심했다.
그것은 리시스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와, 좋아요.”
“온 세상 곳곳에 좋은 곳이란 곳은 다 가서 기념으로 남겨 놓는 거야.”
“와…….”
알헨크와의 전쟁, 그리고 에드린 왕의 척결. 이것들은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었다.
큰 이동은 몇 번 했지만, 결과적으로 리시스의 인생에 여행은 아직 한 번도 없던 것이다.
리시스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여행.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대로 살았더라면 아마 영원히 그렇게 꿈도 꾸지 못한 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에드린 왕을 무너뜨리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을 해냈으니 이젠 여행과 행복을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 일부터 끝내 놓고.
갑자기 현실적인 고민이 부풀던 꿈을 파삭 깨부쉈다.
“……그런데, 폐하는 일은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어? 어…….”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키에르트가 말을 흐리며 눈을 피했다.
도망쳤구나!
“……괜찮은 거예요?”
“아마……, 괜찮지 않을까?”
“……아마?”
“어느 정도는 마무리되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살면서 키에르트가 이렇게 쩔쩔 매며 대답을 회피하는 걸 다 보게 되다니.
리시스는 기가 막혔다.
“괜찮은 거예요?”
“괜찮지 않을 건 없지. 일단 황제인 내가 괜찮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테니까.”
억지 같기는 했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기는 했다.
키에르트가 상사병으로 앓아 눕기라도 하면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대는 어땠어?”
이번에는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안부를 물었다.
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대로 신경 써서 보려니 끝이 없더라고요.”
에드린 왕이 미룬 일까지 더해지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산더미였다.
“즉위식 준비까지 더해지면 더 바빠지겠군.”
“즉위식이요?”
리시스는 뜨끔 놀랐다.
미뤄두고 있던 것을 키에르트가 꼭 집어 말한 것이다.
리시스의 놀라는 반응에 키에르트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대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에르트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가 왕이 되어도 괜찮아요?”
“괜찮냐니?”
“제가 왕이 되면 쉬란의 황후 역할을 할 수가 없잖아요.”
쉬란의 황후 자리가 탐나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보다는 왕이 더 좋았다.
하지만 에드린의 왕이 쉬란의 황궁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필연적으로 키에르트와의 이별이 따라오는 선택이었다.
키에르트는 그걸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황후 역할은 하지 않아도 ‘키에르트의 아내’일 수는 있지.”
“?”
키에르트는 영문 모를 답을 내놓았다.
“제가 왕이 되면 일단 쉬란에 있을 수 없는데요?”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 내면 되고.”
더더욱 키에르트의 속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야기를 쭉 나누다보니 한 가지 알 수 있게 된 것은,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왕이 되는 쪽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폐하는……, 제가 쉬란의 황후가 아니라 에드린의 왕이었으면 좋겠어요?”
“에드린을 위해서도, 그대를 위해서도, 왕이 되는 것이 맞지.”
결국 에드린의 왕이기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올 정도인데도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 키에르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시스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왜요? 왜 저를 위해서도 왕이 되는 것이 맞아요?”
왕이 되는 것은 단순히 왕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왕관만 썼을 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에드린 왕 같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나라 꼴을 보고 반역까지 일으킨 마당에 왕이 되어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드린의 왕이 쉬란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망설임의 이유였다.
그리고 황후 역할을 제대로 할 수도 없으니 정말 혼인 무효를 해야 하게 될 수도 있었다.
“내 욕심이기도 하지.”
“폐하가 욕심을 내면 왕이 되지 않기를 바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물음에 빙긋 웃었다.
“나는 그대가 나와 동등한 입장에 섰으면 좋겠어.”
“?”
“내가 그대에게 ‘필요’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때 다시 한번 선택받고 싶거든.”
지금껏 리시스는 언제나 ‘자신의 것’을 가지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되면 감정 역시 상황에 맞춰 흘러가기도 한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배가 부른 후에도 그 호감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리시스가 키에르트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만 느낄 수 있을 때.
그때에도 자신을 원해주기를 바랐다.
더 완벽한 감정을 가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