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침략은 아니고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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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침략은 아니고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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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침략은 아니고 방문
2022.12.25.
“……그…….”
키에르트가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시종을 내려다보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마음이 급해서……, 사전 예고 없이 무작정 영토에 침범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키에르트도 이제야 정신이 든 모양새였다.
하지만 아직 덜 들었다.
당사자들은 잊고 있지만 쉬란과 에드린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던 사이고, 긴 시간 원수였다.
그러니까 ‘마음이 급해서’라는 사유는 굉장한 헛소리로 들릴 수 있었다.
“쉬란의 황제가 미쳤나봅니다! 으아아! 전하! 미치기까지 했나봅니다! 제가 말려보겠습니다!”
여과 없이 ‘미친’, ‘헛소리’로 받아들인 시종이 키에르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울부짖었다.
리시스는 시종의 희생정신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하지만 필요 없었다.
“흠흠, 험.”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더 있었다.
리시스의 특수부대는 그대로 친위대가 되었다. 미하엘을 제외한 쉬란의 친위대도 섞여 있어서 구성이 묘하게 되었지만 ‘용병이라 치자’고 저들끼리는 합의를 마쳤다.
그러나 ‘원래’ 주인인 키에르트를 무단침입자로 만나니 입장이 묘해졌다.
둘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키에르트가 무슨 생각이 있어 에드린으로 쳐들어왔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았다.
‘생각 없이 달려오셨겠지!’
매사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황제 폐하는 황후 폐하의 일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이번엔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으니 생각이 평소보다 더 없었을 것도 뻔했다.
“일단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호위들도 있잖아.”
“으아아! 에드린의 왕실이!”
“그 왕실을 엎은 건 나고, 여기는 단순 방문이니까 걱정마.”
리시스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여 시종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 주었다.
“어, 어어……? 침략이 아닙……, 니까?”
“침략이라기보다는……, 방문일걸?”
시종은 손 놓고 머쓱하게 쳐다보고 있는 호위들과 렉싱턴 장군을 돌아보았다. 쉬란의 황제라는 말에 기겁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방문……, 쉬란의 황제가 방문…….”
도저히 그 두 단어를 연결시키기 어려웠는지 시종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쉬란의 황제가 도저히 침략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에르트를 소개했다.
“일단은 내 남편이기도 하니까.”
혼인 무효가 정식으로 처리가 된 건지 만 건지, 애매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한때나마 진짜 남편이었던 건 맞으니까.
“아……, 어, 어……. 실례했습니다. 차라도…….”
“차는 됐고.”
키에르트는 다가온 리시스의 체취에 한결 몸이 달았는지 시종의 말을 끊고 손을 저었다.
“‘부부’간의 대화를 좀 하게 나가주겠나.”
“어…….”
그래도 되나?
시종이 도움을 청하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 즐거운 시간 되십쇼.”
호위들은 굽신 인사하고 깔끔히 몸을 돌렸고, 렉싱턴 장군은…….
“……쯧.”
엄청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도 문을 나섰다.
리시스의 최측근인 렉싱턴이 물러날 정도면 자신이 나서 충심을 과시할 때가 아니었다.
시종도 절을 하고 조용히 방을 나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리시스.”
키에르트의 눈빛이 낯설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안, 떨림, 설렘, 그리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제멋대로 뒤죽박죽 섞여 키에르트의 눈동자 안에 휘몰아쳤다.
리시스는 그 감정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가슴 안에서도 같은 것이 담겨 있었으니까.
“어떻게……, 갑자기.”
“그대가 다 죽어간다고 해서.”
“……예? 제가요?”
다 죽어간다는 사람이 자신 맞나?
혹시 지금 다 죽어가고 있었나?
리시스는 얼떨떨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제 발로 서 있기는 했다.
“…….”
키에르트의 눈에도 리시스는 멀쩡해 보였다.
“그래도 렉싱턴 장군이 아주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닌데.”
그 인간이 키에르트를 위해 거짓말까지 해서 불러들였을 리가 없다.
리시스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죽는 것이 아니어도, 진짜 죽겠구나 걱정이 되니 자신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괜찮지만 속병이 났을 수도 있고. 병이 날 예정처럼 위태로워 보였을 수도 있다.
“식사는? 잠은?”
“그럭저럭 먹고……, 그냥저냥 잘 자고…….”
“그냥저냥?”
리시스의 어물어물한 대답에 키에르트의 눈에 불이 붙었다.
역시 안심이 안 되더라니.
“암살 시도는? 과로는?”
“덤비는 놈들은 없었고……, 과로는……, 어…….”
과로를 하긴 했다.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 며칠 동안은 키에르트에게 보낼 편지를 쓰느라.
하지만 그걸 과로라고 해야 하나? 식사 좀 거르고 잠 좀 줄였지만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행복해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는데?
“일은 많이 했지만 상태는 괜찮았어요.”
“일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상태가 괜찮을 수 있지?”
“괜찮은 것 같으니까…….”
“본인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를 만큼 심각하게 안 좋은 건 아니고?”
“그러려나요……?”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키에르트의 이어지는 심문에 리시스도 덩달아 ‘그런가?’ 하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와 보길 잘 했어.”
키에르트는 자신의 방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리시스도 반기는 바였다.
“네, 폐하를 보니까 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번쩍 안아들었다.
집무실 안에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소파는 있었지만 편히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없었다.
그리고 생이별을 했던 부부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침실이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안은 채 문을 발로 찼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돌아보았다.
“침실은 어디지?”
“어……, 이쪽입니다……, 만…….”
아직 정신을 덜 차린 시종은 키에르트의 박력에 밀려 안내를 하면서도 연신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렉싱턴 장군과 호위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는 표정들이었다.
“저기, 괜찮은 겁니까? 침실까지 같이 가셔도……?”
“부부인데 뭐.”
“말려도 말려질 분도 아니고…….”
“포기하면 편할 겁니다.”
시종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들도 포기하고 있는 것이구나. 쉬란의 황제라는 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하길래. 아니, 그런 극악무도한 자와 우리 공주님을 한 방에 넣어도 되는 건가? ……그래도 부부인데, 아닌가?
시종의 혼란이 가라앉기 전, 이미 걸음은 침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종은 문을 열기 직전, 마지막의 마지막 확인을 하듯 리시스를 쳐다보았다.
리시스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했다. 키에르트의 품에 안긴 리시스는 요 근래 보았던 것 중 가장 표정이 밝았다.
시종은 자신이 토를 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얌전히 문을 열었다.
“편히 쉬십시오.”
침실의 문은 집무실보다 두꺼웠다. 웬만한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키에르트는 이제야 마음을 놓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제야 겨우 안심하겠군.”
“폐하도 긴장을 다 하세요?”
“아무래도 적국 한가운데까지 쳐들어오는데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지.”
리시스를 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국경을 넘어가면서부터 슬슬 이성이 고삐를 조이기 시작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성 앞에서도 어찌저찌 넘어간 것을 보면 렉싱턴이 미리 손을 써 둔 것은 확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함정이라면 바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몸이 닳았고, 리시스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걱정도 됐고.”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리시스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에 비로소 긴장이 쓸려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저도요.”
리시스도 키에르트의 등을 마주 안으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 모두 마냥 마음대로 살기에는 짊어진 의무가 많았다.
누구보다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투정을 부리거나 마냥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참고, 또 참았지만 참는 만큼 마음은 더 크게 부풀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몸을 떼어내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나 보고 싶던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폐하도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아…….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그런가.”
“대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아무리 계산해 봐도 시간이 맞지를 않는데.”
“맞출 수는 있지.”
안 먹고, 안 자면서 말을 계속 갈아타 달리면.
그리고 사실 리시스의 연락을 받기 전에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에드린의 전서조는 쉬란으로 날아갔고, 쉬란에서는 그것을 다시 키에르트를 찾아갈 수 있는 전서조를 통해 전달했다.
“중간에 티티도 만났고.”
“삑!”
제 이름을 들은 티티가 키에르트의 옷깃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와! 티티!”
반가워하며 티티를 끌어안으려던 리시스가 멈칫했다.
티티는 원래 들짐승이라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몸단장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오랜 시간 달려왔어도 깨끗한 몸 상태를 유지했다.
“……꼴이 왜 이래?”
그런데 지금의 티티는 심각한 몰골이었다.
키에르트는 그래도 얼굴만은 깨끗했는데, 티티는 피곤에 찌든 데다 더럽기까지 했다.
리시스는 그제야 키에르트의 얼굴도 제대로 뜯어보았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건 제가 아니라 폐하랑 티티인데요?!”
“삐…….”
티티가 시름시름 앓으며 리시스의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아무리 티티가 날래도 말이 달리는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래서 키에르트에게 매달려 함께 말을 타게 되었는데…….
말 등에서 흔들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칠 대로 지치는 것이 당연한 상태였다.
“그게……, 쉴 새 없이 이동을 하다 보니…….”
리시스의 눈이 주먹만큼 크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잠은요?”
“음…….”
“식사는?”
“…….”
“휴식으은?”
“……그게.”
키에르트는 괜히 찔려 눈을 피했다.
리시스의 콧김이 거칠어졌다.
자신을 소중히 하라고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 댔던 사람이 어디의 누구더라?!
그 잔소리를 한 사람이 정작 스스로는 챙기지 않고 학대에 가까운 일정으로 달려왔단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키에르트가 스스로를 소중히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열이 확 올랐다.
“일단은 씻고, 쉬어요! 식사도!”
키에르트가 했던 잔소리가 리시스의 입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