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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리시스 님이 다 죽어감 (145/153)


145. 리시스 님이 다 죽어감
2022.12.22.


리시스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렉싱턴이 당황하며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제가 뭔가…….”

“아니, 아냐. 장군님 때문이 아니라.”

“아…….”

렉싱턴은 바로 눈치를 챘다.

리시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올라갔던 손이 주춤거리며 내려갔다.

리시스는 훌쩍이며 눈물을 훔쳐내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연락은……, 아, 아직 시간 상 올 때가 아니군요.”

에드린의 왕성에서 쉬란의 황궁까지는 전서조가 아무리 빨리 날아도 며칠이 걸린다. 물리적으로 도착할 시간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급한 마음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답장이 와도 또 내가 답장을 보내고……, 그럼 또 오는 데 시간이 걸릴 테고…….”

“답장이 오기 전에 또 소식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응……?”

“답장을 받는 것이 제일 좋지만, 마음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후련해지니까요.”

리시스가 잘 지내는지 염려가 되어 티티를 보냈을 때, 렉싱턴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의 방향이나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래 볼까?”

그래도 리시스에게는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당장 보고 싶어 죽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어쩌겠나.

리시스는 눈을 빛내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일을 할 때와는 다르게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렉싱턴은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곁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리시스에게는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다.

렉싱턴은 이따금 불길이 작아지는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넣으며 리시스의 쪽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리시스는 손가락만 한 쪽지에 매달려 한참을 끙끙거렸다.


“으응……. 이건 아닌 것 같고.”

또다시 휙.

벽난로의 장작이 하나 추가되었다.

리시스가 던져버리는 망한 쪽지 덕분에 벽난로의 불이 사그라들 일은 없어 보였다.

한참 지켜보던 렉싱턴이 끙끙거리는 리시스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어떻게 적어도 모자라…….”

마음은 넘쳐흐르는데 조그만 쪽지에 그걸 다 적어내려니 한없이 모자랐다.

이래도 모자라고, 저래도 모자라 보였다.

계속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렉싱턴이 머리를 짚었다.

그 똑똑한 머리도 감정이 섞이면 고장이 나나보다.


“일단 큰 종이에 다 적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거를 말은 거르면서 다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되겠네!”

렉싱턴의 조언에 리시스가 반색하며 큰 종이를 꺼내들었다.

……뭉치로.


“장군님 천재였어!”

세기의 천재를 보는 눈으로 칭찬을 해 줘봤자……. 렉싱턴의 마음은 착잡한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그래도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는 것보다는 보기 좋았다.

편지에 온 마음을 쏟아붓기 시작한 리시스는 장닭처럼 활기로 가득찼다.

……그러나 활기가 넘치는 것도 문제였다.


“저……, 오늘까지는 이 서류를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만…….”

“이것까지만 쓰고.”

편지 쓰기에 홀랑 빠져버린 리시스가 다른 일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잠깐 일에 눈을 돌렸다가도 금세 편지로 손이 가 버렸다. 이건 리시스 스스로가 제어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군대 운용에 관련된 건 없습니까.”

결국 보다 못한 렉싱턴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군대에 관한 일이면 그래도 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어! 있어! 많아!”

리시스가 반색하며 렉싱턴의 앞에 서류를 골라 쌓기 시작했다.


“……저기.”

“응! 잠깐만. 이것도.”

“……리시스 님?”

“어어! 아, 이것도다. 다 확인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것들이니까, 보고 간단히 요약해서 말로 해 주면 되겠다.”

긴 문장으로 된 보고서는 쓰는 것도 일이지만 읽는 것도 일이다.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서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특히 군에서 올리는 보고서는 펜을 잡는 직종이 아니니 문장이 해괴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리시스가 전선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것인가.’

렉싱턴은 좋게 마음을 먹고 서류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역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쓴 것이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난해한 문장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렉싱턴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서류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문장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할린 지방에 늑대가 늘어나 사병 숫자를 늘려도 되겠냐는 말 같습니다.”

영주가 사병 숫자를 늘리려면 왕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왕이 일일이 수를 세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 웬만해서는 알아서 한다.

이렇게 대놓고 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리시스는 편지에 파고 들던 고개를 들고 펜 끝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할린이 그렇게 늑대가 많은 지방인가?”

“산맥이 있어 들짐승이 많지요. 할린이 막고 있어 더 안쪽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

렉싱턴의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전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뭐라도 좀 내놓아서 도와달라는 징징거림이었다.


“일단 허락하고, 노고에 수고한다는 말이랑, 지원이 필요하면 요청하라고 적어 줘.”

“……제가요?”

렉싱턴이 정색하고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리시스도 정색하며 렉싱턴을 마주보았다.


“그럼 누가?”

“이건 리시스 님의 일 아닙니까?”

“정확히는 에드린 ‘왕’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고.”

“…….”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전선에서는 내가 장군님 대신 맨날 써줬잖아. 사인은 내가 할게.”

“…….”

은혜 갚기다, 은혜 갚기…….

렉싱턴은 주먹으로 펜을 가루를 낼 것처럼 한 자 한 자 힘주어 대리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일은 이렇게 은근히 앞에 놓이기 시작해서 점점 ‘당연한’ 것처럼 늘어난다.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

렉싱턴은 삼일 내내 리시스의 곁에 붙어 대리 업무를 보며 다짐했다.

참고로 그 삼일 동안 리시스는 쪽지 한 줄을 완성하지 못했다. 대신 편지가 수북이 쌓였다. 그걸 다시 줄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당할 것이다.

쌓여 있는 서류 중에는 군사 관련 건도 엄청나게 많았다. 에드린 왕이 긴 시간 읽지도 않고 내팽개친 서류까지 발굴해서 올라온 덕분이었다.

렉싱턴은 마음속에 이 사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한 문장을 갈고닦았다.


“됐다!”

드디어 리시스가 쪽지를 완성해 냈을 때, 렉싱턴에게 기회가 왔다.


“제가 보내고 오겠습니다.”

“응, 부탁해.”

렉싱턴은 리시스의 쪽지를 들고 전서 조를 키우는 곳으로 직접 걸음했다.

이런 중요한 쪽지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렉싱턴은 직접 제일 튼튼하고 또릿해보이는 새를 골랐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한 마리를 더 골랐다.


“두 마리입니까?”

전서조 관리인이 묻자 렉싱턴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낼 것도 있어서.”

렉싱턴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쪽지를 꺼내 둘 중 더 튼튼해 보이는 쪽의 발목 쪽지통에 밀어넣었다.

리시스가 쓴 구구절절 애틋한 쪽지와 다르게 렉싱턴의 쪽지는 간단명료했다.

『리시스 님이 다 죽어감.』

이러면 달려오든 날아오든 어떻게든 하겠지.

제 손으로 쉬란의 황제를 불러들이는 이딴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모두를 위해서다.

리시스의 마음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렉싱턴도 사람이었다.

***



“보고 싶다…….”

렉싱턴이 전서조를 날릴 때까지만 해도 ‘리시스가 다 죽어간다.’는 말은 과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예언이 될 줄이야.

렉싱턴은 시름시름 앓는 리시스를 보며 전직을 고려하게 되었다.


‘나 혹시 예언가에 소질 있나?’

더 이상 군인으로 일하기도 어려운 몸이니,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리시스가 반쯤은 꾀병이라서였다.

‘반쯤은’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나머지 반은 진짜라는 소리였다.


“식사는 하셔야지요.”

“입맛이 없어.”

“일도 하셔야 하고요.”

“……제일 하기 싫어.”

“허허.”

렉싱턴은 헛웃음을 흘렸다.

살면서 본 리시스의 모습 중에 지금이 가장 태만했다.

리시스가 살기 위해 부지런했었다는 건 렉싱턴도 잘 알았다. 리시스에게 역할이란 살아남기 위한 수단, 보통 사람들에게는 직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쉬란에서도 황후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일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어지니 비로소 게을러졌다.

하지만 게으른 시간에 황제만 찾아대는 건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먹는 것까지 대충대충 해결해서 실제로도 건강상태가 나빠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저, 전하! 전하!”

시종 하나가 호들갑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도 리시스는 책상 위에 엎드린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왜. 뭐.”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뭐.”

하루에도 큰일이 열다섯 번씩은 나고 있다.

기존의 왕이 끌려 내려왔으니 여기저기서 터지는 크고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무리 게을러도 보고는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리시스의 머릿속에 ‘큰일’이라는 것은 별로 크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는 또, 뭐. 아직 남아 있던 에드린 왕의 끄나풀이 쳐들어왔다든가 자신이 진정한 왕이라는 놈이 대로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행패를 부리고 있다든가.


“쉬란의 황제가 쳐들어왔습니다!”

“!”

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시종의 호들갑을 들으려던 렉싱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동시에 리시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쉬란의 황제?”

“예! 그렇습니다!”

시종은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창백해져서 외쳤다.

그러나 리시스는 다른 부분에서 놀랐다.


“근데 쳐들어온 게 뭐야? 방문이 아니고?”

“국경에서 절차고 뭐고 없이 무작정 들이닥쳤다 합니다. 신분을 확인하려는 병사들마저 밀어젖히고……! 조금 전 국경에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전서조가 국경에서 왕성까지 날아오는 시간이 있다. 그렇다는 건 지금쯤이면…….

쾅!

리시스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터지듯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들이닥친 것은 키에르트였다.


“리시스!”

“으아아! 전하! 전하! 피하십시오!”

시종이 이 한 몸 불살라 왕실의 주인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키에르트의 허리에 매달렸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어떻게 키에르트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을 수 있지?

새만큼 빨리 달려온 키에르트는 온몸에서 땀을 뿜어내며 들썩였다.

전서조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달려오다니.

나라가 혼란스러워 병사들이 굼뜨게 움직였다 하더라도 가히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그리고 리시스가 보낸 연락에 대한 답장이라 쳐도 지나치게 일렀다.

어떻게 계산해 보아도 도저히 시간이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은데…….


“네 이놈! 쉬란의 황제 놈! 안 된다!”

시종의 필사적인 고함이 메아리쳤다.

아내가 다 죽게 생겼다는 말에 만사 젖히고 달려 온 남자였지만, 일단은 ‘쉬란의 황제’가 국경이고 뭐고 무시하고 에드린의 왕성에 들이닥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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