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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핏줄 (142/153)


142. 핏줄
2022.12.11.


예상은 했지만 다른 곳도 크게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노하던 리시스도 점점 갈수록 처참한 기분에 화를 내지도 못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을 마도칠 때마다 자신이 몸에 걸치고 있는 값비싼 옷이 몸을 짓누를 정도로 무거워졌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끔은.

하지만 그 ‘어떻게’가 문제였다.

쉬란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가 뿌리면 당장의 굶주림은 해결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렇게 뿌린 먹을 것이 과연 며칠이나 갈까? 사흘? 나흘? 길어봐야 한 달이다.

리시스가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이미 살아가는 의지마저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 숨 쉰다. 하지만 이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절망하게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에드린 왕.’

에드린 왕.

그자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자를 ‘어떻게’ 하지?

리시스는 삼엄한 침묵 속에 자신을 가뒀다. 생각이 깊어지며 세상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리시스.”

“어? 네?”

리시스는 자신을 부르는 키에르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닥불이 눈앞에서 타닥타닥 불타고 있었다.

자신은 모닥불 앞에 놓은 나무토막 앞에 앉아 손에 수프가 든 컵을 들고 있었다.

언제 이동해서 수프를 손에 들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만큼 골몰했던 것이다.

엄마가 가끔 리시스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방치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이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을 하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엄마도 델리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했던 것이다.


“먹고 생각하지.”

“아, 네…….”

리시스는 손에 든 수프를 호록 목구멍으로 넘겼다.

하루 종일 거의 공복으로 버티고 있다가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굶주림이었다.

에드린의 마을은 돈이 있어도 살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장사를 해서 사는 것보다 우선 먹을 것을 찾아 산으로 강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여관을 찾지도 못하고 야영을 하게 되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만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이건 리시스가 단순히 물자를 풀어 구해 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에드린이란 나라가 굴러가는 방향 자체가 잘못되고 있었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있을 말이 아니라 망설임이 길어졌다.

리시스는 답을 구하듯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잘 먹는지 감시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도 얼른 드세요.”

“……그래야지.”

키에르트의 눈에는 리시스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쉬란의 황제니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에드린을 돌볼 이유가 없었다.

렉싱턴은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리시스처럼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든 수프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리시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렉싱턴의 머릿속에도 똑같이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어야 할 순간이었다.

리시스는 컵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렉싱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렉싱턴 장군님.”

“아, 예. 리시스 님.”

렉싱턴이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시선은 리시스를 향해 곧게 뻗어지지 못했다.

군인답게 곧은 자세만큼 시선도 늘 올곧았던 렉싱턴 장군이다.

지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든 생각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서일 것이다.

리시스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까지도 했던 장군이다. 그 용기에 대한 답변을, 리시스가 해 줄 차례였다.


“에드린 왕궁으로 나를 데리고 가.”

“……예?”

렉싱턴은 생각하던 것과 다른 리시스의 부탁에 눈을 크게 떴다.

리시스는 자신이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한 부담을 렉싱턴에게 나눠 줄 생각이 없었다.

불충을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살짝 눈속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렉싱턴의 불충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나를 데리고 에드린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장군님의 의무잖아? 그걸 해.”

“어…….”

렉싱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리시스가 얌전히 에드린 왕에게 돌아가 인생을 맡길 작정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키에르트도 리시스의 말에 놀라 돌아보았다.

리시스는 이미 결심을 마쳤다. 두 사람의 놀란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군님은 장군님에게 맡겨진 일만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정말 그거면 되는 겁니까?”

“응. 그리고 폐하. 부탁이 있는데요.”

“뭐든.”

키에르트는 기대된다는 듯 리시스의 부탁에 화답했다.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을 이제는 알게 된 리시스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모처럼 딸이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선물이라.”

“네, 아주아주 크고, 거대한 선물이요.”

리시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쉬란의 황후로 팔려가듯 보내졌던 리시스 공주가 돌아온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우선 에드린으로 돌아가겠다는 확답을 받은 에드린은 술렁였다.

협박으로 렉싱턴 장군을 보낸 것은 맞지만 그 협박이 진짜 먹힐 줄은 몰랐다.


“제깟 것이 나대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그 와중 에드린 왕만은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은 에드린의 왕이었다. 에드린의 공주는 당연히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마땅했다.

쉬란과의 전쟁으로 매번 흘러나가던 돈이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전쟁터에 보내 놨으면 얌전히 아군의 사기나 올리고 있을 것이지, 거기서도 참지 못하고 나대며 제 이름이나 알리려고 안간힘을 쓰던 쓸데없는 공주였다.


“그런데, 로구안 놈이 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알헨크가 패퇴했다는 소문은 에드린 왕궁에도 닿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린 왕으로서는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웬일인지 쉬란의 황제는 로구안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그쪽으로 신경이 쏠려 있으니 당분간 에드린과 다시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땅을 나누어 준다던 알헨크의 제안은 솔깃했지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돌아온 공주는 재활용할 수 있다.

알헨크가 아니라도 로구안 왕의 첩 정도로 보내 연합을 맺을 수도 있다.

의외인 건 쉬란의 황제가 리시스를 얌전히 보내줬다는 것이었다.


“그새 질린 모양이지.”

한동안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느니 뭐니 하는 소리가 잔뜩 들려왔다.

황후 자리에 좀 앉았다고 제가 뭐라도 된 것인 양 방자하게 굴더니. 감히 자신의 욕까지 대놓고 하고 다녔었겠다.

황제가 돌려보낼 정도면 이제 볼 장 다 보았다는 뜻.

이제 제 신세를 다시 한번 따끔히 알려줄 때였다.


“성문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들여.”

쉬란 물 좀 먹었다고 뻔뻔해진 그 낯짝, 미룰 것도 없이 당장 봐야겠다.

에드린 왕은 왕좌에 깊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성문에서 알현실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황후 자리에서 끌려 내려온 리시스의 좌절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에드린 왕은 들고 있는 잔을 옆으로 뻗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얼른 잔 가득 술을 따랐다.

대낮이지만 에드린 왕의 음주를 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현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한 잔을 다 비우고 두 잔이 넘어갈 때, 드디어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드린 왕은 손가락을 까딱여 문을 열라 신호했다.

알현실의 육중한 문이 양 옆으로 열렸다.

구구궁 무겁게 끌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로 가장 앞서 들어선 것은 렉싱턴 장군이었다.


“전하의 명을 받아 리시스 공주님을 모셔왔습니다.”

렉싱턴의 뒤에는 리시스가 따랐다.

리시스의 뒤에는 거대한 상자가 따라 들어왔다.

에드린 왕은 렉싱턴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리시스의 뒤에 따라오는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자는 거대했다. 작은 집 한 채를 통째로 옮겨 온 것 같은 크기였다.

밑에 바퀴를 달았음에도 인부 열이 매달려 땀을 뻘뻘 흘리며 밀고 들어왔다.


“그건 뭐지?”

“선물입니다.”

“나도 선물인 건 보고 있으니 알아. 그러니까 무슨 선물이냐고.”

에드린 왕이 짜증을 내며 재차 물었다.

리시스는 서두르지 않고 먼저 사뿐히 절을 올렸다.

절을 올리는 리시스의 눈이 바쁘게 알현실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에드린의 공주로 살았지만 알현실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방에 처박혀 살다가 필요할 때만 불려 나왔던 공주가 이런 공적인 자리에 나올 일은 없었다.

알현실에는 용무가 있는 여러 귀족들이 주변을 빙 둘러 서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의 단상 위, 왕좌에 에드린 왕이 삐딱하게 앉아 알현실 가운데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에드린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쉬란에서 선물을 챙겨 왔습니다.”

“팔자 좋군? 여행이라도 온 것 마냥.”

제가 협박하듯 불러놓고서, 에드린 왕은 다짜고짜 비아냥거렸다.

리시스는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왕의 부르심에 따랐을 뿐입니다.”

“오호. 쉬란의 그 지고하신 황후 폐하께서.”

“에드린의 공주이기도 하니까요.”

리시스의 목소리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운 대사를 읊어대는 듯한 대답에 에드린 왕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것보다 더 극적이기를 바랐다.

울며불며 끌려 들어와 목숨만 붙여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눈치라도 보더니 저 냉랭한 모습은 뭔가. 아직 황후로 산 뻣뻣함이 덜 빠진 모양이다.


“그래,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

에드린 왕은 일부러 리시스의 약점을 찔렀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지만 리시스는 자신이 왕비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에 언제나 죄책감을 느꼈다.

핏줄이라는 말만 들어도 리시스는 펄쩍 뛰어오르며 당황하고는 했다. 리시스를 움직이는 데 이만한 채찍이 없었다.

이번에도 리시스는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전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위축되어 움찔거린 것이 아니었다. 분노를 누르느라 튀어나온 움직임이었다.


“……예, 제 몸속에는 안타깝게도 에드린 왕실의 피가 흐르지요.”

“뭐라?”

에드린 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 자 한 자 으르렁거리듯 뱉은 리시스의 말은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예, 에드린 왕실의 피 따위, 뽑아낼 수 있다면 다 뽑아내 버리고 싶은데.”

“……네, 네가 지금 뭐라고…….”

에드린 왕은 어이가 없어 말까지 더듬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시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에드린 왕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끓어오르고 있던 분노가 터졌다.


“그럴 수 없으니, 아예 부숴버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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