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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목숨값 (141/153)


141. 목숨값
2022.12.08.



 


“언제든 돌아오세요, 아기씨.”

리시스가 공주로서 에드린 왕실에 불려갔든, 쉬란의 황후가 되었든, 델리안에서 리시스는 내내 아기씨였다.

변하지 않는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리시스는 이제 우는 대신 사람들을 한 번씩 꽉 끌어안았다.


“또 올게.”

이제 자신에게는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만큼의 자유가 생겼다.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떠나는 것이 크게 아쉽지 않았다.

리시스는 웃는 얼굴로 델리안을 등질 수 있었다.

***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키에르트와 함께 말을 타고 내려갔다.

올라갈 때와 다른, 말이 갈 수 있는 길로 일렬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산에서 다 내려온 후에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하듯 얼굴을 마주칠 수 있었다.


“긴 산행 고생하셨습니다.”

안내를 마친 상단주가 먼저 인사했다.

그가 끌고 온 말 등에는 델리안에서 챙겨 온 물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짐 보따리를 몇 개씩 얹어 내려왔다.


“우선 상단 건물 안으로 물건을 옮긴 다음에 마차를 내어드릴 테니 한 번에 옮기시지요.”

리시스 일행은 이번 짧은 여정의 목적도 깨알같이 잊지 않고 챙겼다.

델리안에는 로구안 군대 때문에 시장에 내어놓지 못했던 물건들이 꽤 많이 쟁여져 있었고, 그것들은 온전히 리시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분간은 문제없겠네.”

리시스는 쌓이는 상자들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무리 아기씨여도 델리안은 ‘거래는 확실히’를 외치며 똑바로 계산했다. 어차피 더 싼 값에 후려칠 생각도 없었지만 최소한 바가지를 쓸 일은 없어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마음먹은 일 하나는 잘 끝냈다. 그리고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참 많이 남아 있었다.


“장군님.”

리시스는 렉싱턴을 불렀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담판을 지어야 할 때가 왔다.

렉싱턴도 각오를 끝냈는지 허리를 곧추세우며 리시스를 마주보았다.


“예. 리시스 님.”

“장군님이 에드린 왕에게 목숨 버리러 간다고 하면 나는 지금 당장 렌데일에 주둔하고 있는 쉬란 군을 불러들여서라도 장군님을 납치할 거야.”

여기서 에드린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할 사람도 없다. 렉싱턴 장군의 납치, 실종 사건은 그대로 의문의 실종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리시스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렉싱턴의 의사를 물었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렉싱턴을 납치하게 되면 쉬란의 황궁에 잠시 구금해 두었던 것처럼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렉싱턴의 남은 평생을 흔들게 되는 인생의 분기점을 리시스가 만들어버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신중하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렉싱턴은 결심을 다시 한번 굳히는 듯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우선 이 주변 지역을 살펴보려 합니다.”

“……응? 에드린 왕은?”

“그 다음입니다.”

렉싱턴도 이렇게 마음을 먹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가장 큰 요인은 리시스의 모친이 남긴 편지였다.

에드린 왕이 아무리 악행을 쌓은 나쁜 왕이어도 자신에게는 왕이었다.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냥 따르기만 했다가는 리시스 같은 제2, 제3의 피해자가 또 생겨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과연 그것이 자신이 생각한 충정이 맞을까. 그 길이 옳은 길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직 분명하게 정하지 못했지만 이대로 에드린 왕에게 돌아가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개죽음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델리안 마을은 그나마 산속이라 영향이 적었지만……, 이 주변은 로구안 군의 약탈을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상단주의 건물만 보아도 웬만한 걸 털려 남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쉬란의 영토인 렌데일마저 황폐해졌는데, 지키는 이 없는 에드린은 오죽할까.


“저라도 도울 것이 없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뭐라도 할 일이 있겠지요.”

리시스는 상단 건물 앞 길거리로 눈을 돌렸다. 원래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활기찬 도시였다지만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폭력에 꺾인 거리는 시들했다.

뜨내기들은 진작 자리를 떴고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문을 닫은 채 조용히 숨죽였다.

로구안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꽤 오랫동안 치유되어야 할 것이다.

에드린 왕이 그 상처를 돌보지 않는다면 스스로 나아지는 날을 기다려야 할 뿐.

렉싱턴이 나서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렉싱턴이 몇 되지 않는 부하를 데리고 과연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럼 나도 같이 가.”

리시스가 나섰다.

렉싱턴은 놀라지도 않고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그래도 일개 장군보다는 공주가 할 일이 더 많겠지. ……이 분야의 전문가도 있고.”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곁눈질했다.

쉬란의 황제가 아닌, ‘리시스의 남편’은 기꺼이 따라가 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압박이었다.

키에르트는 압박을 줄 것까지도 없이, 떼어놓으면 몹시 서운해 하려 했다.


“그럼. 나보다 국가 운영을 잘 하는 전문가는 없지.”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하지만 적국의 황제인데……. 이건 우리 공주님의 행복한 인생과는 또 다른 문젠데…….

렉싱턴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키에르트를 떼어 놓을 방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이들은 주변의 상황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델리안 마을에서 그래도 행복한 기억을 쌓고 나왔기 때문에 아무리 빈곤해도 그곳보다 조금 더 안 좋은 상황 정도려니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



“먹을 거 주세요. 배고파요…….”

“나리, 아무거나 먹을 것 좀…….”

렉싱턴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리시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또다시 길안내를 맡은 상단주도 이렇게까지 다른 거리를 돌아다닐 일은 없었는지, 실상을 눈으로 보며 시종일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리시스는 달려드는 아이들의 쫄쫄 굶은 행색에 당황하며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뭐라도 가진 것 없어?”

가볍게 정찰을 나온 것이라 본격적으로 식량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럴 만큼의 여유분은 자신들에게도 없었다.

그나마 주머니를 털고 털어 겨우 찾아낸 육포 쪼가리 몇 개를 아이들 손에 쥐여 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말라비틀어진 육포 쪼가리에도 기뻐했다.

잘 씹히지도 않는 육포를 침으로 녹여가며 열심히 우물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행복한 황후로 살아가는 동안, 에드린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리시스는 말에서 내려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혹시 뭐라도 하나 더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빛내며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가진 게 없고……, 다음에 올 때 꼭 먹을 만한 걸 가져다줄게.”

아이들은 금방 실망한 눈빛으로 가라앉았다.

먹을 것 하나에 구름처럼 부풀었다 연기처럼 꺼져 들어가는 희망이라니. 전쟁터를 구르던 리시스도 이렇게까지 좌절에 범벅되어 살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아이들의 행색을 유심히 살폈다.


“하루 이틀 굶은 게 아닌 것 같아.”

알헨크의 수작은 길지 않았다.

이 근방에 터를 잡고 약탈을 시작한 기간을 다 합쳐도 이렇게까지 아이들이 피골이 상접해지기는 어려웠다.

아이들은 오랜 시간 굶주리고, 가난에 시달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은 넝마가 되어 너덜너덜했고 온몸은 삐쩍 마른 데다 영양실조로 인한 버짐이 잔뜩 피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렉싱턴도 로구안 군의 약탈 때문에 주변 마을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연락만 받았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것까지는 몰랐다.


“흉년이 길었습니다. 거기에 이쪽은 명의상으로 왕실의 땅이라 세수를 줄여 달라 할 수도 없어서…….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고질적인 기근으로 자리 잡은 지 몇 년이 되어갑니다.”

상단주는 한숨을 섞어 상황을 설명했다.

리시스는 ‘왕실의 땅’이라는 말에 폭발하듯 분노했다.


“그럼 결국 에드린 왕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야?”

“……불충한 말입니다만, 예.”

상단주는 에드린 왕의 충신이 아니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문제의 원인을 인정했다.

에드린 왕의 탓이다.

에드린 성에 처박혀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만 하는 그 사람 때문에 에드린의 애꿎은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리시스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자신의 인생과 엄마의 인생만 나락으로 떨어져 굴렀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단 한 사람의 문제로 온 세상이 이 모양이 될 수 있어?”

“그러니 지배자가 중요한 것이지.”

키에르트가 차분히 리시스를 위로했다.

그의 눈으로 보아도 에드린의 실상은 ‘좀’ 착취를 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쯤이면 국가를 운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수준이었다.

키에르트가 무아렌 강을 두고 싸우지 않고 아예 작정하고 에드린 본토를 노렸다면 오히려 전쟁이 빨리 끝났을 정도의 실정(失政)이었다.

리시스는 분노를 넘어 아연했다.


“이쪽 부근만 이런 것이 아니라, 에드린 전체가 이런 상태인 거 아냐?”

“……조금 나은 지역도 있겠지요.”

상단주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상인이니 그나마 다른 지역의 소식도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어디든 살 만하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리시스의 눈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직접 봐야겠어.”

그나마 이 근처만 이런 상황이라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몰래몰래 돕고 말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까지 이런 상태라면?

과연 그런 모습을 보고도 에드린 왕을 욕하기만 하면서 쉬란에 돌아가 배불리 먹고 편히 지낼 수 있을까?

살면서 한 번도 에드린의 공주로서 의무나 책임감을 느껴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야 하는 형벌이었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생존방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이 끔찍한 정황을 보며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저주스러운 ‘에드린’의 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본의였든 아니든, 자신이 배를 채우고 옷을 입고 살아간 것은 다 이들의 피땀을 쥐어 짠 결과물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목숨값을 내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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