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더 큰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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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더 큰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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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더 큰 욕심
2022.12.04.
“아, 해 지니까 좀 춥네.”
리시스는 뜬금없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산의 밤은 오랜만이시지요. 땔감을 좀 더 넣겠습니다.”
델리안 사람들은 익숙한 친절을 베풀었다. 이곳은 산속 깊은 곳이라 한여름에도 밤에는 불을 피워야 춥지 않았다.
리시스가 노린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으응, 아냐. 나만 추운 거잖아. 땔감 하는 것도 일인데.”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키에르트가 망토를 뜯어내 리시스의 어깨에 씌웠다.
리시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쾌재를 불렀다.
옳지, 그렇지. 우리 폐하 눈치가 있으셔.
거기까지는 딱 리시스가 원하던 만큼의 알콩달콩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손도 차갑지 않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을 끌어다 쥐었다.
차갑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살짝 식어 있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꼬옥 감싸 쥐었다가, 손 사이로 입김을 불어넣으며 비볐다.
싹싹싹싹…….
이 정도면 그냥 유별난 부부애 정도로 보였다.
리시스는 이것까지도 웃으며 넘겼다.
“발은 안 시렵나.”
“괜찮아요!”
그러나 발까지 쥐려고 들었을 때에는 기겁하고 말았다.
키에르트는 진심으로 씻지도 않은 발을 맨손으로 쥐려 들었다.
“하, 하지 마요. 하지 마!”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얼굴을 밀어 멀찍이 떨어뜨렸다. 발을 그냥 쥐는 것도 아니고, 발에까지 입김을 불며 덥혀주려 들 것 같아서였다.
본인은 기절할 것처럼 놀랐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흐뭇한 부부의 알콩달콩한 사랑싸움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새 ‘쉬란’의 황제라는 것은 잊히고 리시스에게 죽고 못하는 새신랑만 남았다.
“어이구, 참……. 체통 없이.”
“그렇게 좋으신가…….”
면박 주는 말을 한 마디씩 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여기서 부끄러운 건 리시스 혼자뿐인 모양이었다.
키에르트조차 당당하게 그 말을 받았다.
“리시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가만히 볼 수가 없어서. 체통 없어 보여도 이해해 줬으면 하는데…….”
“아유, 이해해 드려야지요, 암요.”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 때문에 리시스의 얼굴은 불 앞에 한참 앉아 있던 것보다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 이제 졸려. 슬슬 자러 갈까 봐.”
결국 리시스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를 선언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워 이기던 리시스도, 부끄러움 앞에서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예, 올라가십시오. 다른 분들께는 빈 방이 있는 집에 모시겠습니다.”
산길을 오르랴, 울랴, 엄마의 서재를 뒤지랴, 오늘 리시스는 정신없이 바빴다.
도망가려는 핑계 말고도 실제로도 피곤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지라, 사람들은 순순히 보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붙잡아 놓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허락될 시간은 길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키에르트 때문에.
키에르트는 얼른 보내주지 않으면 당장 이 마을을 엎어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쉬란의 황제가 그랬으면 죽자 살자 엎어놓고 한 대 때렸을 텐데, 리시스의 남편이 그러니 다들 웃으며 보내줄 마음이 들었다.
“그럼.”
“꺅?!”
키에르트는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리시스의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듯, 한시도 놓지 않고 손을 주무르더니 일어날 때엔 아예 안고 일어났다.
리시스가 놀라 비명을 지르며 키에르트의 등을 두드렸다.
“거, 걸어갈 수 있어요!”
“춥잖아.”
“걸으면 안 추워요!”
“발이 얼어서 깨지면 어떡해.”
잊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 살던 사람은 리시스고 당신이 외지인입니다…….
산속의 추위에 익숙한 사람은 리시스이지 키에르트가 아니었다. 더구나 리시스는 에드린 사람, 키에르트는 따뜻한 쉬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고이 망토에 싸들고 문을 나섰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리시스는 그냥 망토자락에 얼굴을 묻어 현실을 가려버렸다.
덕분에 얼굴이 있는 대로 썩어 들어가는 렉싱턴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아, 정말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리시스는 엄마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키에르트에게 투정을 하며 구시렁댔다.
“지지 않으려고.”
“져요? 뭐에서 져요?”
“그대를 소중히 하는 마음.”
키에르트는 어지간해서는 자신만큼 리시스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델리안에 와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리시스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리시스에게 고향과 소중한 사람들이 되돌아 와 다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사라지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더 티를 내고, 더 해야지.”
“폐하는 이미 충분히 할 만큼 하고 계세요.”
사람들 눈에 황후로서 대우해 줘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키에르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려 했다. 리시스가 원하는 대로 하려 했고, 조금도 고생하지 않게 배려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도 이 정도는 최대의 예우였다.
“모자라.”
리시스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도 키에르트는 만족하지 못했다.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새 엄마의 집에 도착했다.
키에르트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에도 리시스를 내려놓지 않고 안아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난로에 불을 붙여놓았는지 집 안은 훈훈했다.
“이제 내려주세요.”
키에르트는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리시스를 내려주었다.
불을 피우며 물도 준비해 놓은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간단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가벼운 복장이 되어 침대를 찾았다.
“제 침대는 이거예요.”
“……작군.”
어린 리시스가 쓰던 침대니 당연히 작았다. 리시스 혼자서라면 잘 수 있겠지만 키에르트까지 함께 눕기는 어려워 보였다.
“엄마가 쓰던 침대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엄마 침대는 서재에 있거든요.”
“……아, 그거.”
키에르트는 서재 한쪽에 서류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던 침대 모양의 가구를 떠올렸다.
“불 피워놓으며 정리해 놨을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볼까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을 잡고 서재로 갔다.
역시 누군가가 준비를 해 놓았다.
새로 마련한 시트와 베개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폐하는 여기서 주무시면 되겠네요.”
“……흠.”
그런데 키에르트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목을 울리며 침대를 노려보았다.
“어……, 맘에 안 드세요? 제 침대랑 바꿀까요?”
“그대의 침대가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일단 와 보겠나.”
“?”
키에르트는 다시 리시스의 침대로 갔다.
그리고 우선 자신이 누웠다.
발이 비죽이 튀어나왔지만 누울 수는 있었다. 리시스는 그 우스운 꼴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팔을 잡아당기는 키에르트의 손길에 곧 사라졌다.
“어.”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자신의 몸 위에 이불처럼 덮듯 얹었다.
“……음. 이제 마음에 드는데.”
“폐하……? 이러고 주무시게요?”
“잠이 아주 잘 올 것 같아.”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몸 위로 이불까지 끌어와 덮으며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키에르트의 몸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조금만.”
“무거워서 못 주무세요.”
“너무 가벼워서 덮은 것 같지도 않아.”
“진짜…….”
키에르트의 너스레에 리시스는 포기하고 가슴에 귀를 댔다.
불편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사람의 몸은 깔고 자기 꽤 괜찮았다. 하지만 이대로 밤새 자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조금만 이야기하다가 내려가야지.’
키에르트가 굳이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싶어하면 자신이 엄마의 침대에 가서 자면 된다.
리시스는 혼자 생각하며 몸에서 힘을 뺐다.
“무슨 생각하세요?”
“그대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
리시스는 푸스스 웃으며 기대고 있던 머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게요. 저도 몰랐는데 많았네요.”
“당연히 많을 줄 알았지.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테고.”
“제 인생에 이런 날도 오네요…….”
“지금까지 이상하게 좋지 않은 날이 길었던 거야.”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답에 다시 한번 웃었다.
웃음에 응하듯 등을 토닥이는 키에르트의 커다란 손바닥이 이불이 덮인 듯 따뜻했다.
위아래로 따뜻한 체온에 감싸인 채로 가만히 있어서 그럴까. 조금만 이러다 내려가야지 했는데 키에르트의 품안에서 의외로 잠이 솔솔 왔다.
‘안 되는데…….’
이러고 자면 폐하가 힘들 텐데. 내일 아침에 여기저기 배겨서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팔다리가 저려 말도 못 타게 되면 어쩌지…….
그러나 리시스는 더 깊은 고민을 하기도 전에 툭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리시스?”
“으응…….”
키에르트는 자신의 턱밑에서 울려오는 도롱도롱 낮은 숨소리에 밑을 내려다보았다.
리시스는 아기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난로의 일렁이는 불빛을 받은 잠든 얼굴을 한참 쳐다보던 키에르트가 이불을 끌어올려 리시스의 턱밑까지 꼭꼭 덮어주었다.
아무리 난로의 온기가 지켜주고 있어도 새벽의 한기가 새어들어올 수 있었다.
가능하면 이렇게 리시스를 꽁꽁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욕심이었다.
‘사실은 더 큰 욕심이 있지.’
리시스에게 말하지는 못하는 욕심.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자신이 리시스를 이만치도 소중하게 여기고, 뭐든 들어주고 싶은 그 마음의 이름을 키에르트는 이제야 알아버렸다.
사랑.
하지만 그걸 어떻게 꺼내놓아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행동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장모님의 편지에서 그 단어를 읽은 리시스는 그 단어의 진의부터 의심했다.
키에르트가 다짜고짜 이 단어를 입에 담으면 이번에는 돌았는지부터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리시스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조차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다. 키에르트의 순수한 호의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이 사랑이라고 쉽게 받아들일까?
아직은 더 시간과 공을 들일 때였다.
키에르트는 한숨을 푹 몰아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집의 천장에는 빗물이 샌 얼룩과 나무 무늬가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만약 저것이 생겨났던 순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키에르트는 당장 물어보았을 것이다.
‘장모님, 리시스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직접 만나본 사람은 아니지만 답변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깔깔깔! 알아서 해야지!’
역시 답은 스스로 찾는 것이 맞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잠든 숨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고민에 빠져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