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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새장과 족쇄 (139/153)


139. 새장과 족쇄
2022.12.01.


리시스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소리를 내어 울지 않아도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엄마가 남겨준 편지는 온전히 리시스를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겪었던 일들은 끔찍했지만 편지에서 한탄하는 듯한 어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복수를 부탁하는 말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는 분명히 적어놓았다.

『네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면, 에드린 왕의 곁에서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무기력한 채 미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힘드니까.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고해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어. 네게 필요 없다면.

당장 중요한 일이 있고, 지금이 행복하다면 복수 같은 것에 삶을 투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뭐, 이건 엄마 생각이고. 네 마음대로 하렴.』

마음대로 하란다.

그 말이 너무 엄마다웠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엄마, 나가서 놀아도 돼?’

‘맘대로 해.’

‘엄마, 나 이거 가지고 놀아도 돼?’

‘맘대로 해.’

엄마는 리시스를 자유롭게 키웠다. 뭘 하든 리시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면서.

엄마의 성격인 것도 있었겠지만 앞으로 에드린의 공주로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갈 것을 생각한 배려였던 것 같기도 했다.


“리시스?”

한참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리시스가 걱정이 되었는지, 키에르트가 가만히 어깨를 쥐며 불렀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나?”

키에르트도 같은 말을 해 주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해.’

자신에게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준 두 번째 사람.

그리고 엄마가 없는 이 세상에서는, 유일한 사람.

리시스는 멎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네, 괜찮아요.”

키에르트가 곁에 있으면 괜찮았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리시스는 옆에 앉은 키에르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엄마의 어깨는 이보다 훨씬 가늘고 여렸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작은 어깨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괜찮은데 왜 계속 울어.”

“감동의 눈물이에요.”

“장모님이 문장에도 재능이 있으셨던 모양이군.”

“그건 아닌데요.”

리시스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엄마는 결단코 언어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언어능력이 이 모양이 되었지.

엄마도 제멋대로 중구난방 말하는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다보니 떠오르는 대로 막 말을 하다 보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뒤죽박죽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이 편지는 정말 열심히 썼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다시 울컥했다.

정말 마음 써서 남긴 편지구나.


“사실은 엄마를 원망했어요.”

왜 에드린 왕이랑 그런 짓을 벌였을까. 심지어 왕비도 있던 에드린 왕이랑.

기왕 그런 짓을 해서 자신을 낳았으면, 둘이서 잘 살기라도 하든가. 왜 아빠 같지도 않은 사람의 자식인 자신을 낳았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비밀이야.’, ‘크면 알게 돼.’ 같은 말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정말 크니까 알게 되기는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보니 자신이 공주고, 심지어 왕이 외도해서 낳은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궁에서 처음 본 왕비의 싸늘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눈빛에 산 채로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생겼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음에도.

자연히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 분노의 화살이 돌아갔다.


“그런데 엄마를 미워할 필요도 없었고, 제가 저 스스로를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던 거였어요.”

리시스는 코를 훌쩍이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무죄였다.

죄가 있다면 에드린 왕. 그 악랄하고 욕심 많은, 책임감마저 없는 자 하나뿐이었다.

자신은 부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범죄의 희생자였다.

더는 자신으로 인해 한 가족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로 인한 부채감으로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키며 이리저리 끌려다닐 이유도 사라졌다.

엄마는 리시스가 자신의 손으로 자유를 얻어낼 수 있을 때, 마지막 족쇄를 풀어주었다.

새장 안에 갇힌 새에게는 족쇄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족쇄가 없으면 새장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족쇄와 새장, 둘 다가 있으니 그냥 포기가 되었다. 자신의 인생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체념하고 받아들이니 오히려 덜 괴로웠다.

그리고 이제는 새장 밖으로 나와, 족쇄까지 풀어냈다.

진정한 자유였다.


 


“그대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야.”

키에르트는 리시스에게 확신을 심어주듯 힘주어 말했다.

리시스가 스스로 벗어나기 이전에도 키에르트는 늘 그렇게 말해주었다. 멋진 사람, 소중한 사람.


“맞아요. 저는 진짜 멋진 사람이었어요.”

“그래. 그대는 정말 멋지지.”

키에르트의 확고한 동의에 리시스가 헤헤 웃었다.

웃다보니 펑펑 쏟아지던 눈물도 멈췄다.

리시스는 코를 훌쩍이며 엄마의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응?”

쭉 읽느라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낯선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은 적 없고, 말해 본 적도 없는 문장. 엄마의 입에서도 나온 적 없던 문장이었다.

리시스는 눈을 의심하며 편지에 코를 박고 글씨를 노려보았다.


“이거요. 제가 제대로 읽은 거 맞아요?”

“어떤 거?”

“여기, 마지막에. <사랑한다.> 이거.”

“맞는데. 사랑한다.”

키에르트가 확인까지 해 주었는데도 리시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보고, 또 보았다.


“위조문서인가……?”

“응?”

“엄마가 이런 말을 쓸 리가 없는데……?”

다른 글자에 비해서 매우 조그맣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쓰면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것을 펴느라 고생했던 모양이다.

진위 여부가 살짝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엄마가 상당히 애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레 이런 말은 왜 붙였는지, 참.”

리시스는 혀를 차며 편지를 소중히 서류철 안에 다시 넣었다.

그 모습에 키에르트가 움찔했다.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버린 것이다.

손도 잡고, 입술도 마주치고, 결혼도 하고, 소중하다는 고백까지 했는데 중요한 단어를 전달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이제 와서? 지금 이 분위기에?

키에르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 한참 울었더니 배고프네요. 저녁은 마을 사람들이랑 같이 먹을까 봐요.”

“…….”

“폐하?”

“…….”

키에르트는 생각에 잠겨 리시스가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기지개를 켜며 문을 나서려던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키에르트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고민 중이었다.


“키에르트?”

“응?”

폐하까지는 못 들어도 이름은 놓칠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리시스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리시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아니야.”

“……?”

리시스는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타들어가는 속을 터놓지도 못하고 혼자 자글자글 끓였다.

* * *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셨다니…….”

“그 조그맣던 아기씨가…….”

“지금도 조그마시긴 하지만…….”

아까도 만났지만 다시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 만난 마을 사람들은 리시스의 성장한 모습에 저마다 감동했다.

리시스도 어릴 적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영지 분위기는 영주의 성격을 따라가는지, 델리안 사람들은 바깥소식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리시스는 그간 밀린 이야기들을 전해주느라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래도 상단주님은 장사하는 분인데 이런 소식도 모르셨어요?”

“여기가 얼마나 굉장한 시골인지 아직 리시스 님이 감을 못 잡으신 모양입니다.”

상단주는 억울해했다.

리시스는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끝났고, 국혼이 오갔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지 못한 것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이 닿는 데는 시간이 걸린단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들이 오고가는 시간이 있다. 자연스럽게 소식이 전해지는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짧으면 몇 달, 길면 일 년이 지나서 소식이 닿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델리안 사람들에게 직접 자신의 신변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다행이었다.


“그럼, 지금은 황후 폐하가 되신 겁니까? ……쉬란의?”

“응, 그렇지.”

“쉬란의…….”

“……아.”

말을 하다 보니 키에르트가 남편이고, 그 남편의 직업이 쉬란의 황제라는 것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쉬란에 몸을 담은 지 한참 된 리시스는 자신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에드린과 쉬란의 관계를 떠올렸다.

두 나라의 악감정은 역사와 함께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 쉬란부터 까고 보자!’가 에드린 국민의 정서였다.

리시스는 슬그머니 키에르트의 앞을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쉬란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알고 보면 쉬란도 나쁜 나라는 아니라…….”

“그래요…….”

사람들은 차마 쉬란의 황제 앞에서 대놓고 쉬란 욕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빛이 곱지도 않았다.

키에르트는 쉬란이 에드린에서 욕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지 나서서 해명해보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리시스 님을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닙니까?’ 같은 말 한 마디라도 했다면 당장 나서겠지만.


“괜찮아, 나 잘 지내…….”

“네에……. 꼭입니다. 꼭 잘 지내셔야 해요.”

리시스가 아무리 말로 설명해보려 해도 감정은 한 번에 뒤집어지지 않는다. 렉싱턴도 리시스의 행복을 믿을 때까지 한참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렉싱턴 사람들에게 그 오랜 시간을 들여 설득을 할 수는 없다. 리시스는 곧 다시 떠나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찜찜한 불안감을 남겨놓고 떠나는 것도 싫었다.

리시스는 극단처방을 떠올렸다.

이럴 땐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화끈하다.

리시스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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