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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엄마의 과거 (138/153)


138. 엄마의 과거
20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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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제가! 리시스의 남편입니다.”

키에르트는 목에 잔뜩 힘을 주어 말하며 일리나 아줌마의 바구니를 빼앗듯 받아들었다.

그리고 렉싱턴을 쳐다보며 경고하듯 말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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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쪽은! 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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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부하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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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힘든 시기에 리시스를 많이 도와 준……. ……가까운 사이입니다.”

죽어도 그 이상의 호칭을 붙여주기는 싫은 키에르트의 고집이 반영된 설명이었다.

렉싱턴은 욱했지만 스스로도 부하를 자처하고 있어서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이 리시스의 ‘무엇’이라고 말할 입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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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실제로 오빠 같이 잔소리도 엄청 하거든.”

그때 리시스가 끼어들어 쉽게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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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스 님……!”

렉싱턴은 왈칵 감동해 눈물을 글썽였다.

일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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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렇구나. 다들 ‘우리’ 아기씨 옆에 같이 있어 준 고마운 분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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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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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 끌어올렸던 키에르트의 미소도, 렉싱턴의 눈물도 일리나의 ‘우리’ 앞에 쨍하니 얼어붙었다.

일리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바구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빵 하나를 집어 리시스의 입가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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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씨가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빵을 오랜만에 구웠어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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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너흐 마히허!”

리시스는 빵을 우물거리며 찡한 표정으로 감동을 표현했다.

입을 꼭 다물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빵을 꼭꼭 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일리나는 바구니에서 주스도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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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침 시원한 물에 담가 두었던 란타가 있었지 뭐예요. ‘우리’ 아기씨, 그거 좋아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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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웅! 마히허……!”

주스도 꿀꺽꿀꺽.

일리나는 아예 리시스를 거실로 끌고 나가 아기한테 밥 먹이듯 식사를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키에르트와 렉싱턴에게는 ‘드세요.’ 한 마디가 다였다.

두 사람 다 인생에서 받아볼 일 없는 싸늘한 식사 대접이었다.

키에르트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걱우걱 빵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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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리시스를 아끼는 사람을 보니 내 마음도 같이 따뜻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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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우리’ 리시스 님이 좋아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두 남자는 필사적이었지만, 그래봤자 승패가 뒤집힐 것 같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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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일리나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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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뭔가요?”

식사를 마친 리시스는 통통하게 올라온 배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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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정체가 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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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때가 왔네요.”

일리나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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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셨고……, 알 것도 다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일리나 아줌마는 ‘알 것도 다 아는’을 말하며 키에르트를 흘끔 곁눈질했다. 별다른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키에르트는 어째서인지 위축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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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가 남겨 놓은 편지가 있습니다.”

일리나 아줌마는 서재로 들어갔다.

책꽂이의 두꺼운 책들 중 하나를 꺼내 책장 사이에 꽂혀 있던 편지를 리시스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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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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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리시스가 돌아오면, 그때 줘라.’라고 아가씨께서 부탁하셨던 겁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었던 보람이 있네요.”

엄마가 자신에게 남겨 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리시스는 긴장하며 봉투를 열었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단단히 밀봉해 놓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밀봉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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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편지는 흰 종이에 간단한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아니, 문장이 아니라 문제였다. 수학문제.
 

『이 정도도 못 풀면 진실을 알아봤자 감당도 못할 테니 평생 모르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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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자취에는 낭만이고 뭐고 없었다.

감회에 젖어들 뻔한 리시스의 얼굴에서 감정이 싹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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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나 문제가 이기나 해 보자고.”

리시스는 엄마의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키에르트와 도서관에서 수학 문제 풀기 데이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접근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문제에서 리시스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는지를 테스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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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답,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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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것 같군.”

옆에서 같이 문제를 풀어 준 키에르트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문제의 답은 기호였다.

혹시 책의 제목인가 해서 책장을 살폈지만 맞는 것이 없었다. 서류철에서 찾아내야 할 모양이다.

리시스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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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굉장한 이야기를 전해주려는 모양이에요.”

수학문제까지는 아무나 멋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좋은 장치였다. 단단한 쇠로 된 자물쇠보다 더 강한.

리시스는 무작정 서류더미에 달라붙어 기호와 똑같은 서류철의 제목이 있는지를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리시스의 옆에서 키에르트도 똑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작업에 착수했다.

렉싱턴도 마찬가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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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결국 서류를 찾아낸 것은 해가 진 후였다.

서류를 발견한 것은 리시스였다.

허리가 아프다 못해 꺾이기 직전이었지만 서류를 발견하자 씻은 듯 고통을 잊었다.

리시스는 급한 손길로 서류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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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서류철 안에는 엄마의 글씨로 또박또박 적힌 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리시스는 가슴을 크게 부풀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편지의 첫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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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스. 엄마야.』

리시스는 풉, 하고 작게 웃었다. 엄마다웠다.

그러나 밑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는 웃지 못했다.

엄마는 리시스가 성인이고, 에드린 왕의 손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키웠다는 전제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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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편지는 길었지만 읽어 내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무슨 보고서를 쓰듯이 사실 그대로를 건조한 문장으로 적어놓았다. 하지만 엄마의 평생에 걸쳐 일어난 일을 편지 한 장으로 받아들이게 된 리시스는 건조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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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나?”

편지를 든 손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파묻은 리시스를 바라보며 키에르트가 걱정했다.

웬만하면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진짜 괜찮지가 않았다.

리시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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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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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내용인지 물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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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끓어오르는 화가 목구멍을 막았다.

씨근덕거리며 숨을 고르는 리시스를, 키에르트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렉싱턴도 저편에서 응원하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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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안 자작의 딸이었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델리안 자작이었네요.”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냥’ 자작의 딸이 아니었다.

델리안 자작가의 유일한 후계였다. 그러나 아들이 아니라 자작가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양자를 들이거나 사위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델리안 자작은 딸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싶었다. 딸이야말로 영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델리안은 아주 적은 자원을 가진 영지였다. 이전까지 궁핍하던 영지를 어린 딸의 아이디어로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땅이었지만 델리안은 가공한 식품들의 생산으로 부유해져 갔다. 이렇게까지 델리안을 발전시킨 주인공이 땅의 주인이어야만 했다.

델리안 자작은 딸에게 작위를 물려줄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그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델리안 영지의 소유권은 붕 뜨게 되었다.

그러나 변방의 작은 영지에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영부영 델리안의 운영은 자연스럽게 엄마가 이어받아 유지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것에 이견이 없었으므로 당분간은 평화가 유지되었다.

문제는 너무 좋은 것을 가지면 탐내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나둘 델리안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결국 에드린 왕의 귀에까지 그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주인 없는 땅은 왕에게 복속된다. 에드린 왕은 친히 자신에게 돌아온 땅을 보러 델리안까지 행차했다. 문제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천재였지만 세상사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더러운 점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에드린 왕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을 모아 줄을 세우면 적어도 순위권에는 들 사람이었다.

엄마는 델리안을 지금까지처럼만 살게 해 달라고 에드린 왕에게 간청했다.

다행히 에드린 왕의 눈에 델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땅이었다. 하지만 막 피어나던 나이의 엄마는 에드린 왕의 구미를 당겼다.

에드린 왕은 악독한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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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혈육을 낳으면 델리안을 그 아이에게 주겠다. 그러면 그 어미에게 관리를 할 권리가 주어진다.’

협박이었다.

이대로 델리안을 빼앗길 것인지, 왕의 협박대로 움직여 줄 것인지의 선택밖에 엄마에게는 남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델리안을 위해 반강제로 그 관계에 동의했다.

리시스를 낳은 뒤, 엄마는 땅의 권리를 증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적법한 절차였다.

에드린 왕은 후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장 엄마와의 관계를 위한 협박의 빌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부정을 정면에서 알게 된 왕비는 분노했다. 왕비는 델리안 영주의 딸이 왕을 유혹해서 자신을 끌어내리려고 벌인 짓이라 믿었다.

분노한 왕비는 엄마에게 끝없이 암살자를 보내고, 주변 영주들을 다그쳐 공격하게 했다.

엄마는 끝없이 막아내고, 숨었다.

영주관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무래도 숨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 틈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 점점 깊은 산속으로 숨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서 리시스를 키우며, 델리안의 힘을 키우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한편 세상이 ‘델리안’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델리안 난제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하지만 어린 여성이 홀로 왕가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영구적으로 몸에 손상을 입히는 독에 당했다. 가까스로 즉사는 면했지만 차차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자신에게 앞으로 남은 삶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마는 리시스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리시스는 에드린의 유일한 공주였다. 언젠가 필요에 의해 끌려가게 될 운명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리시스의 앞날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은 에드린 왕가였다. 하지만 엄마는 알리지 않았다.

힘없는 자가 복수심을 품으면 그저 자신의 인생만 힘들어지니까.

당시의 힘없는 리시스가 복수심마저 품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까.

그나마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 홀대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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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눈물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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