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엄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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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엄마의 정체
2022.11.24.
상단주가 기절할 뻔한 작은 소동이 지나갔다.
훌쩍 큰 리시스에게 다가와 저마다 대견하다는 등 한 마디씩을 주고받자, 일리나 아줌마가 나섰다.
“밥은 먹었어요?”
어릴 때와 다르게 밤이 아니라 해가 한참 위에 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산길을 타느라 시간이 꽤 지났고, 마침 식사시간도 다 되었다.
“배고파요.”
그래, 이렇게 당당하게 먹을 걸 달라고 아무 집에나 쳐들어갔던 때도 있었다.
“그래요, 얼른 들어가서 밥부터 먹어요.”
일리나 아줌마는 리시스의 손을 잡아 자기 집으로 끌고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가 생각이 퍼뜩 난듯, 돌아보았다.
“아, 살던 집으로 가서 먹을래요? 우리가 늘 청소해 놔서 깨끗해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아기씨 집인데, 그래도 되지.”
엄마와 둘이 살던 집은 이곳보다 더 깊숙한 숲속에 있었다.
어째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엄마와 리시스를 아끼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엄마도 그 거리를 불편해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였다.
엄마는 아가씨, 리시스는 아기씨.
‘어?’
자신은 아기라서 아기씨였다.
그런데 엄마는 왜 아가씨였을까.
리시스는 기질적으로 세상을 깊이 파고드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엄마를 향한 호칭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이따 일리나 아줌마한테 물어봐야겠다.’
지금 리시스와 함께 숲속 옛집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키에르트와 리시스, 리시스의 군대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일이 바빠 짧은 환영을 마치고 해산했다. 상단주도 물건을 좀 보고 오겠다며 빠졌다.
산 속에 사는 것은 보통 한적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일의 연속이다. 산이라는 대자연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언제나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식물, 짐승, 날씨, 이런 것들이 언제나 사람을 들볶는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못 쓰게 되고 당장 밥을 먹고 살기조차 어려워진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덕분에 리시스도 어릴 때부터 땅파기 기술을 배워 전장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와, 여기에 이렇게 집이 있었습니까?”
“세상에, 진짜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엄마와 살던 집은 마을보다 더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나무와 바위가 교묘하게 시야를 가려, 길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야 집이 보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입구가 있는 마을과 같은 이치였다.
“……꼭 그대의 작전 같군.”
키에르트는 지형지물을 둘러보며 익숙한 느낌의 원인을 찾아냈다.
마을 자체는 처음 와 보는 곳이지만 위치의 의외성은 어딘가에서 많이 당해 본 것이었다.
“어……, 그런가요?”
리시스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키에르트의 입을 통해 듣고 뺨을 긁었다.
자신의 작전이 그랬던가……? 그저 그때그때 위치에 맞춰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할 방향을 찾아냈을 뿐인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는 생각보다 깊숙이, 그리고 더 많이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이거 봐요! 이거 제가 어릴 때 탔던 그네인데. 이게 아직도 있네?”
집 앞에서 그네를 발견한 리시스가 후다닥 달려가 앉아보았다.
그네까지도 관리를 해 주었는지 아직 튼튼하게 탈 만했다.
“그네 진짜 오랜만에 타 봐요. 마을 떠난 이후로 처음?”
리시스는 잔뜩 신이 나 발을 구르며 그네를 탔다.
키에르트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귀여우시죠?”
“음.”
“제 눈에도 귀여우셔서 미칠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더 귀여우셨죠. 사실 지금도 어릴 때나 크게 다를 것 없으시긴 합니다만, 그 귀여우신 분이, 벌써 결혼을 하고…….”
렉싱턴 장군은 잊을 만하면 울컥했다.
키에르트는 가린 손 밑으로 한없이 솟구쳐 올라가던 입꼬리를 정돈했다.
리시스가 너무 귀여워 입술이 제멋대로 휘어졌지만, 결국 리시스의 평생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니 렉싱턴 장군의 비극 앞에서는 참아야 했다.
“이제 들어가요!”
리시스는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도 속임수였다. 문처럼 보이는 것은 벽이었고, 문 옆의 벽이 문이었다.
“……이 집은 원래 있던 건가? 아니면 어머니께서?”
“어, 모르겠어요. 그냥 저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엄만가?”
리시스는 알쏭달쏭해 했지만 키에르트는 장모님의 설계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리시스 본인도 모르는 엉뚱한 면이 유전이었음을 키에르트는 델리안에 와서 깨달았다.
‘대체 뭐 하는 분이셨던 건가…….’
사람들의 ‘아가씨’란 칭호, 그리고 이 마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밀. 그 비밀스러운 마을에서 더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어 있는 집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은 분명했다.
“들어오세요!”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집은 덩치 큰 병사들 여럿이 우르르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리시스의 생가 방문은 키에르트와 렉싱턴이 대표로 하게 되었다.
벽이었던 문을 지나자 아담한 실내의 풍경이 들어왔다.
나무로 지어진 집 내부는 특이한 문과 달리 평범한 구조였다. 거실이 있고, 양 옆으로 방과 부엌, 서재로 보이는 공간이 차례로 있었다.
나무 틈새로 가느다란 햇빛이 들어와 집 전체는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집을 돌아보는 리시스의 숨소리가 선명히 들릴 만큼.
리시스는 천천히 거실을 한 바퀴 돌아보고, 조심스럽게 오래된 의자의 등받이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미 마을 입구에서 다 울었는지 눈물이 더 나지는 않았다.
“……다 기억이 나요.”
손때 묻은 테이블, 매일매일 조금씩 높아지는 손의 높이를 재려고 까치발을 들었던 책장.
너무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어 있었는지도 몰랐던 의자까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공간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는데, 눈앞에 두고 보니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게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사람이 이렇게 모조리 까먹고 살 수도 있었구나.
엄마가 당부했던 것처럼, 정말 모조리 다 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잊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것이 리시스가 이제까지 죽도록 고생해서 얻어낸, 값비싼 자유의 값어치였다.
“엄마는 언제나 서재에서 뭔가를 엄청 했는데……, 어릴 때라 그게 뭔지 봐도 몰랐거든요. 지금 보면 좀 알 수 있을까요?”
“보면 되지.”
어릴 때에도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은 알았다.
가끔 호기심에 몰래 들어가 보고는 했지만, 엄마의 서재는 애들이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온 사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 서류, 종이……. 그게 다였다.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 서재는 예전과 달리 사방에 널브러진 것들이 없었다. 책꽂이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꽂혀 있거나, 서류철에 넣어 정리함에 담겨 있었다.
리시스는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 들었다.
“음…….”
어릴 때와 달리 이게 수학공식이라는 건 알겠다.
얌전히 덮고, 제자리에 돌려놨다.
“지금도 재미없네요.”
엄마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서류를 쌓아놓고 살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책과 서류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은 키에르트같이 공무를 보는 사람이거나 연구원뿐이다.
“……?”
리시스는 자신의 생각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왜 엄마가 연구원이 아닐 거라 생각했을까. 숲속에 살아서?
리시스는 황급히 다른 서류를 들춰보았다. 여전히 영문 모를 글자들의 나열이지만, 쭉 읽어내려 가다보니 무슨 용도의 서류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강우량 예측 분석…….”
어딘가에서 연구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가시화된 연구결과를 본 적은 없다. 쉬란의 그 거대한 도서관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연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일조량과 식물 성장의 상관, 비료의 영양 분석과 효능, 토지 시공 공법까지. 연구 분야마저도 다양했다.
옆에서 리시스와 함께 서류함을 뒤져보던 키에르트조차 말을 잃었다.
한참을 읽어댄 뒤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엄마는……. 어쩌면…….”
리시스는 너무 엄청나서 차마 꺼내기 어려운 그 단어를 입에 담기 전, 마른침을 삼켰다.
키에르트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답을 내놓았다.
“천재 아니었을까요?”
“델리안 영주였던 것 아닌가.”
?
“예?”
“뭐?”
같은 서류를 봤는데 왜 답이 이렇게 제각각이지?
리시스는 서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키에르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키에르트도 당황한 시선을 잠시 다른 쪽으로 돌렸다가 돌아왔다.
“천재인 건 일단 맞고.”
키에르트는 일단 리시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리시스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대가 웬일로 너무 평범한 답을 말해서 놀란 거야.”
“……아.”
“가까울수록 오히려 진실이 안 보일 수도 있지.”
“그런데 엄마가 델리안 영주요?”
“적어도 영주 대행쯤은 되는 위치였을 것 같은데.”
키에르트는 서류를 훑어보며 자신의 의견을 확신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영지를 발전시키려는 야망 있는 영주들은 연구에 몰두한다. 장모님의 경우는 본인이 특출 난 경우라 스스로 연구를 진행했을 것이다.
“에이……, 영주가 무슨 이런 곳에 살아요.”
하지만 리시스는 아직도 엄마의 정체가 믿기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의 호칭이 떠올랐다.
‘아가씨.’
에이 설마.
엄마는 엄청나게 왈가닥이고, 늘 바지 차림에 머리도 대충 질끈 묶고 다녔다. 도저히 영주님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에드린에서는 여자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해요.”
그러니 엄마가 영주였을 리가 없다.
“혹시 장군도 들은 바가 있나?”
“저는 북쪽 출신이라 이쪽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공주님의 출신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분위기여서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렉싱턴도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일리나 아줌마가 한 바구니 가득 음식을 해 들고 들어왔다.
“아유, 오랜만에 집에 오니 어때요, 아기씨? 밥 먹고 마저 구경해요.”
키에르트와 렉싱턴이 동시에 바구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세 명의 시선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어, 음…….”
일리나 아줌마는 아주 조심스럽게, 키에르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쪽이 남편인 건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