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잊고 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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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잊고 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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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잊고 있던 길
2022.11.20.
“이쪽입니다만…….”
상단주가 자신이 가려던 길을 가리켰다.
그가 그쪽이라고 하면 그쪽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리시스는 자꾸만 다른 쪽으로 시선이 갔다. 옷을 입을 때 소매에 팔을 넣는 순서처럼, 걸음을 내디딜 때 먼저 나가는 발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 같이.
길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쪽 같아.”
리시스는 다시 한번 다른 쪽 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상단주는 그런 리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쪽이 맞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자신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처음 와본 곳, 낯선 숲, 낯선 길에서 자신 있게 안내자가 가리키는 길이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상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에 홀린 듯 자꾸 그쪽 길이 맞다고 본능이 외쳤다.
그쪽 길로 가는 것이 맞다고.
“리시스?”
키에르트조차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리시스를 불렀다. 그러나 리시스의 귀에는 키에르트의 목소리조차 닿지 않았다.
“그쪽은 말을 타고 갈 수 없습니다.”
“걸어 갈 수는 있어?”
“정 가시겠다면요.”
리시스는 길을 쳐다보다가 말에서 내렸다.
키에르트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리시스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리시스가 가는 길을 막기 위해 따라온 것이 아니다. 리시스가 가고 싶어 한다면 길을 만들어라도 주기 위해 따라왔다.
“리시스 님. 낯선 숲길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렉싱턴은 만류했다.
최대한 안전한 길을 갈 수 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전투를 위해 작전상 이동을 하는 중이 아니고, 무역을 위해 마을을 방문하는 건데 굳이 불확실한 길로 가야 하나?
“위험하지 않아.”
그러나 리시스는 막무가내였다.
평소 절대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니 더욱 이상했다.
렉싱턴은 혹시 숲길을 오면서 무슨 버섯 향 같은 거라도 잘못 맡았나 싶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요한 숲은 그저 숲일 뿐이었다.
리시스는 렉싱턴을 설득하는 대신 다른 쪽 길을 향해 한 발 걸어갔다. 키에르트가 조용히 뒤따랐다.
키에르트가 따라가는데 렉싱턴이라고 안 가고 버틸 수는 없었다. 그도 결국 말에서 내려 리시스의 뒤를 따랐다.
“조심히, 천천히 가십시오. 리시스 님!”
처음에는 미지의 공간에 들어서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리시스의 걸음은, 몇 걸음 들어가자 점차 속도가 붙었다.
렉싱턴은 기겁해서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리시스는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거의 뛰는 것에 가깝게 달려갔다.
“이쪽 길, 함정은 없는 겁니까? 진짜 괜찮은 겁니까?”
“뭐어……, 어느 길이나 함정은 다 있긴 합니다만.”
“뭐라고?!”
상단주는 뛰다 말고 멱살을 잡으려는 렉싱턴의 손을 겨우 피해 달아났다.
군인과 상인의 체력은 비교대상이 아니었지만 익숙한 산길과 초행길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상단주는 렉싱턴의 고함에 대답하지 않고 리시스를 따라 부지런히 뛰었다.
리시스는 산양처럼 깡총깡총 뛰어 산길을 올라갔다.
이쪽 길에도 수 갈래의 갈림길이 나왔지만 리시스는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길을 골랐다. 길을 가는 동안 함정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산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 리시스의 체력으로는 숨이 차지 않는 정도였다.
“하아, 하아!”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리시스의 입에서는 가쁜 숨이 터졌다.
숨만 찬 것이 아니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리시스, 괜찮아?”
곁에서 키에르트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리시스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길이 보였다.
알고 있는 길.
잊고 있던 길.
‘나는…….’
격한 심장박동과 함께 눈물도 솟구쳤다.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삼켰지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앞이 뿌예졌다.
리시스는 소매로 눈물을 쓱쓱 훔쳐내어 닦고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산길은 때때로 바뀌기도 하지만 바위나 나무같이 굵직한 지형지물들은 오랜 세월 한자리를 유지한다.
낯익은 나무, 낯익은 바위.
운명이라는 것은 정말 있는 모양이다.
교육이라는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던 자신이 어떻게 델리안 난제를 접할 수 있었고, 에드린 왕가의 인질이던 신세가 쉬란의 황후가 되어 에드린을 구하러 왔다.
‘만날 인연이면 만나게 되겠지.’
오랜만에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사실 엄마를 생각할 일은 많지 않았다.
눈앞의 일들이 너무 산재해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마저 이제는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점점 선명해졌다.
완전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장소도 함께.
‘하지만 리시스. 만약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그 순간 잊어.’
그래, 엄마는 그런 말도 했었다.
언젠가 당연히 리시스가 떠날 날이 오게 될 것처럼.
그때는 너무 어렸고, 엄마의 말에서 많은 것을 상상하기에는 보아 온 세계가 너무 좁았다.
마을 밖 세계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그때.
‘기억하지 마. 그리워하지도 마. 당장 눈앞의 현실을 살아. 과거는 네 인생이 아니고, 그저 과거일 뿐이야. 없는 것처럼 지워버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자신과 리시스에게 닥쳐 올 시련을 예견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했던 것이다.
일부러 마을의 위치도, 이름도,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마을은 ‘마을’일 뿐이라고만 말했다. 지도를 보면서 그리워할 곳을 찾지 못하게.
엄마의 판단은 맞았다.
돌이킬 시간조차 없었던 것도 맞지만, 돌이킬 곳이 어디인지도 몰라 잊었다.
갈 곳이 어디인지 모르니 각박한 현실 앞에 도망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이렇게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몰라도, 매일 뛰어놀던 산길은 몸이 기억했다.
리시스는 다시 그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정신없이 달렸다.
이렇게 달리고 달려 결국 저 모퉁이 너머의 바위, 작은 틈으로 들어서면……!
“어머!”
불쑥 나타난 리시스의 모습에 마을 사람 하나가 놀라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아니, 어떻게, 여길, 아니, 그, 누구…….”
너무 놀라 마을 사람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문장이 흘러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리시스도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지붕의 색도 바뀌고, 못 보던 건물도 많이 생겼다. 담벼락의 높이도, 마을 중앙에 있던 커다란 나무도 바뀌었다.
리시스의 훌쩍 커진 눈높이만큼이나 마을의 이곳저곳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도 있었다.
“……아기씨?”
리시스의 등장에 놀라 당황하던 사람의 입에서 익숙한 호칭이 흘러나왔다.
리시스는 그제야 마을의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입을 틀어막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에서 경악과 환희가 동시에 흘러내렸다.
리시스는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과 같은 눈빛이 되었다.
사람은 세월의 물살에 한없이 휘둘리는 존재였다.
“일리나 아줌마?”
“아, 아기씨 맞아요……?”
“일리나 아줌마 맞죠……, 맞아요? 진짜야?”
“아기씨!”
서로 확신하지 못해 주춤주춤 다가서던 두 사람은 이윽고 현재의 모습에서 먼 과거를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알아보기가 무섭게 둘은 서로에게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리시스는 순식간에 눈물범벅이 되었다.
어릴 때와 똑같이 치마폭을 한껏 벌려 리시스를 감싸듯 안아준 일리나 아줌마도 흐느껴 울었다.
“어떻게……, 어떻게 돌아왔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도……, 나도 못 돌아올 줄 알았어요.”
조용한 마을 한구석에서 일어난 떠들석한 소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일리나와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는 리시스를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리거나 달려들어 한 뭉치가 되어 같이 울었다.
“아이고, 어떻게 돌아왔어요!”
“아기씨!”
이것도 잊고 있었다.
리시스는 공주님이 되기 전에는 아기씨였다. 오랜 호칭에 마음까지 어려진 것 같았다.
한참을 엉엉 울던 리시스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둘러서 있었다.
리시스는 멋쩍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눈물을 훔쳐냈다.
“나, 돌아왔어요.”
어른들을 골탕 먹이려고 숨바꼭질을 하다가 해가 다 저물어서야 돌아왔을 때처럼 웃으며 말했다.
일리나 아줌마는 다시 한번 성대하게 울음을 터뜨리고는 리시스의 등짝을 꽤나 세게 두들겼다.
“그런데, 이쪽 분들은 누구……?”
“아, 한 분은 상단주이시네.”
“나머지는?”
한바탕 리시스 환영식이 끝나자 사람들의 호기심은 외지인들로 향했다.
구석에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던 키에르트도 그제야 리시스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모셔 와 봤습니다.”
상단주가 나서서 해명하듯 말했다.
“제가 알기로 에드린의 공주님은 리시스 님 한 명밖에 없는데, 이 마을에서 빼앗겼다는 아기씨의 이름도 리시스였던 것 같아서요. 영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중간에 사람이 바꿔치기를 당한 건가 싶기도 해서 직접 모셔와 봤습니다.”
그래서 리시스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었다.
만약에 그를 따라 끝까지 말을 타고 갔다면, 그냥 좋은 거래처로 끝났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리시스는 자신의 과거를 찾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에 조건을 좀 좋게 쳐 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쪽은 다 내 부하들.”
“아아…….”
‘부하’라는 존재에 익숙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렉싱턴과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공주님의 옛 아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돌려주었다.
다음으로 리시스는 가장 기대되는 선물을 개봉하듯 키에르트를 두 손으로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여기는, 내 남편!”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리시스의 나이에 적응하지 못했다.
“우, 우리 아기씨가 나, 나, 남편을…….”
기저귀 차고 뛰어다니다 자빠지고, 나무 타다가 떨어져서 혹 나고, 이상한 열매를 주워먹었다가 배탈 나서 울던 그 아기씨가 남편을 데리고 왔다.
사람들의 얼어붙은 반응에 렉싱턴은 진한 공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음 이해했다.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잘생기고 몸 좋고 능력 있어 보이는 잘난 남자여도! 그게 내 핏덩이 같은 어리고 작은, 여린 공주님의 남편이라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잠깐, 아까는 부하라면서요?”
상단주가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쉬란의 황후의 남편이면, 쉬란의 황제…….
상단주의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직업상 그렇게 됐다.”
키에르트는 짧게 변명하며 이해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리시스 아기씨, 아니, 공주님, 아니, 황후 폐하만으로도 굉장한 손님을 모셨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손님이 무임승차 중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