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갈림길의 함정
(135/153)
135. 갈림길의 함정
(135/153)
135. 갈림길의 함정
2022.11.17.
리시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에 고개를 기울였다.
답은 곧 나왔다.
‘델리안 난제.’
키에르트와 함께 풀었던 그 수학 문제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쓰고 있는 마을이 이 근처에 있다고?
키에르트를 돌아보자, 그도 놀랐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델리안 난제의 그 델리안이랑 똑같네.”
“오, 델리안 난제를 아시는군요. 그 델리안이 맞습니다.”
“어?”
“그 마을에서 만들어 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문제거든요.”
그 델리안이 이 델리안이라니!
수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상단주마저도 알 정도면 이 주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문제를 만드신 분은 문제를 통해 세상이 델리안 마을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는데……, 문제만 유명해진 모양입니다.”
“아……, 그런 뒷얘기가 있었구나.”
문제를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델리안’이라는 이름은 꽤 유명해졌다.
델 리안 난제를 아는 누군가가 지나가다 우연히 표지판에서 발견하면 반가워할 정도로. 델리안 난제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뭔가 운명적인 느낌인데.’
식당에서 마주친 사람을 찻집에서 다시 마주쳐도 운명처럼 느낀다.
쉬란의 수학책에서 읽은 델리안을 에드린의 국경마을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뭔가 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느낌이 좋은 마을이네.”
“가 보시면 더 좋으실 겁니다. 자, 다 모였으면 이제 나가시지요.”
상단주는 자신의 마을을 자랑하듯 흐뭇하게 장담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제각기 자신이 타고 온 말의 고삐를 잡았지만 리시스는 비장하게 말들을 돌아보았다.
델리안 마을은 마차로는 들어가기 힘든 깊숙한 곳에 있어 말을 타거나 걸어야 한다고 했다.
리시스만 큼직한 말 앞에서 쭈뼛거렸다.
황후로 지내면서 짬짬이 승마를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자신 있게 고삐를 잡을 실력은 아니었다.
“리시스는 내 말에 같이 타지……, 요.”
그때 키에르트가 자신의 말을 끌고 와 앞에 세웠다.
리시스는 호위를 자처하는 키에르트의 행동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연기까지는 뻔뻔스러웠는데 존댓말이 영 어설펐다.
“어, 아니, 그…….”
리시스는 반사적으로 렉싱턴 장군의 눈치를 보았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향한 눈빛이 이만저만 따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에드린이다. 감히 쉬란의 황제가 당당하게 밟고 서서, 에드린 공주 곁에서 찝적거리는 꼴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봐야 한다니!
……라고 렉싱턴의 흉흉한 눈빛이 외쳤다.
“가는 길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같은 말에 탄 쪽이 호위하기 편하니까. 자. 어서.”
키에르트는 초월적인 뻔뻔함으로 렉싱턴의 시선을 싹 무시했다.
리시스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키에르트의 손을 울상을 지으며 바라보다가, 결국 잡고 말았다.
혼자 말을 타고 산길을 가는 것보다는 렉싱턴의 눈치를 보는 게 나았다.
“그럼, 출발.”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뒤에 훌쩍 올라타고는, 습관적으로 출발신호를 보냈다.
“……? 뭔데?”
상단주가 멍하니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무리 리시스 님의 최측근이고, 키도 크고, 잘생기고, 몸도 좋고,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풍기는 분위기까지 가졌다지만, 대장처럼 나서서 명령까지 한다고?
“뭔가.”
명을 듣고 바로 출발하는 대신 자신을 쳐다보는 상단주의 시선에 키에르트도 인상을 쓰며 마주보았다.
아주 짧은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키에르트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을 하시지.”
“…….”
수습이랍시고 열심히 한 수습이긴 했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수습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리시스의 본심이 입안에 메아리쳤다.
“……출발.”
에드린과의 무역 재개보다, 델리안 마을로 향하는 험한 산길보다, 로구안과의 전쟁 경과보다, 에드린 왕의 행패보다, 렌데일의 후처리보다, 지금 당장 키에르트의 어설픈 연기가 더 걱정이 되었다.
‘설마 여기서 쉬란의 황제라는 것이 밝혀지고, 사로잡혀서 에드린 왕에게 넘겨지고……, 그런 끔찍한 일은 안 벌어지겠지?’
리시스가 에드린 땅을 떠나 쉬란으로 넘어갈 때, 그만큼 불안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 그나마 신변을 보호하는 쥐꼬랑지만 한 신분조차도 없다는 것.
언제 어디에서 무슨 짓을 당해도 저항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포.
그러나 키에르트는 쉬란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차분하고 당당해 보였다.
“왜?”
키에르트가 문득 리시스의 시선을 느끼고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델리안 마을로 향하는 산길로 이미 접어들었다. 아직은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길이 좁아 일렬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덤불이나 쓰러진 나무기둥 같은 것들이 있어 일행의 거리는 목소리를 높여야 대화가 될 만큼 띄엄띄엄 멀어졌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여기, 에드린인데. 주변에 호위를 심어두신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지.”
키에르트는 놀랍게도 정말 홀몸으로 달려왔다.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는 호위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저도 잘 모르는 낯선 마을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해요.”
“무슨 일이라…….”
키에르트는 말끝을 늘이며 우거진 숲을 바라보았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저녁처럼 어두워져갔다. 어딘가에 뭐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짙은 어둠이었다.
“일어나면 해결하면 되지.”
그러나 키에르트는 내내 태평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세요? 저는 폐하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돼 죽겠는데.”
“나를? 무슨 일?”
“암살자가 나타날 수도 있고……, 에드린 왕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든가, 이런저런.”
“아, 그럴 수도 있겠군.”
“?”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걱정들이다. 그런데 리시스의 말을 듣고서도 키에르트는 완전히 남 일처럼 심드렁했다.
리시스는 도저히 키에르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대가 내 품안에 있으니 아무 걱정도 안 들어.”
“……예?”
키에르트는 고삐를 고쳐 잡는 척 은근슬쩍 리시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리시스의 작은 몸이 키에르트의 품에 폭 파묻히듯 들어갔다.
“내내 그대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잘 있을까. 무사할까. 그 걱정뿐이었거든.”
키에르트의 낮춘 목소리가 리시스의 귓가에 나직이 닿았다. 귓가를 진동시키는 낮은 목소리에 몸까지 같이 떨렸다.
그래서일까, 심장소리도 평소보다 더 크게 울려퍼졌다. 숲속의 다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심장소리만 시끄럽게 들릴 정도로.
“그대만 내 품에 있으면 더 이상 걱정할 건 없는 것 같아.”
“……나라 걱정도 하셔야죠…….”
로구안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국가 대 국가로서 협상할 것, 정리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조차 돌 하나를 놓고 치열한 토론공방이 벌어진다. 하물며 수많은 나라들이 얽힌 이해관계는 단순히 무력 하나만으로 정리해 버릴 수 없다.
알헨크가 제멋대로 침략해 흡수해버린 나라들의 통치권부터 시작해, 그 나라들과 쉬란과의 관계, 로구안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다.
리시스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만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대가 나와 같이 쉬란에 있으면 그것도 잘 해결해 낼 수 있을 거야.”
“……저도 같이 일하라는 말씀……, 이신 거죠?”
“…….”
이 순간에는 아니라고 해야 멋질 수 있다.
키에르트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마지막의 마지막 애원이 입을 막았다. 늘 격무에 시달리는 황제의 속마음이었다.
‘제발 함께해 줘…….’
아무리 멋진 사람이어도 깔려죽을 만큼 쌓여 있는 서류더미 앞에서는 체면보다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키에르트의 침묵에 리시스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제가 필요해서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기분도 들고……, 그렇네요.”
“그대가 아니면 안 돼.”
“그렇겠죠. 저는 매 전투 때마다 징그럽게 보고서를 몇십 장씩 써서 올렸던, 전쟁 경력직 황후니까요.”
“아니, 꼭 그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한 것도 맞아서 키에르트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흥.”
리시스는 소리 내어 삐치고는 팔꿈치로 키에르트의 가슴을 밀어냈다.
죄인 키에르트는 버텨보지도 못하고 밀려났다.
“이 마을은 어쩌다 이런 깊숙한 숲까지 들어오게 된 거야?”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상단주에게 말을 걸었다.
상단주는 말의 속도를 늦추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원래는 숲 바깥쪽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었는데 이런저런 핍박을 받아 숨고 숨다보니 이런 깊숙한 곳까지 숨게 되었다고 합니다.”
“핍박?”
“예, 좋은 것이 나는 곳이니 탐내는 사람도 많았지요. 하지만 단지 식물만 뽑아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델리안에만 내려오는 가공법이 또 중요한 것이라……, 아예 사람까지 통째로 납치해 가려는 놈들까지 있었다 합니다.”
“와……. 에드린 왕이나 할 법한 짓이네.”
세상에 그런 놈이 또 있다니. 이 세상이 어찌 되려고.
“델리안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신의 뜻이었지 않겠습니까?”
신의 뜻.
초인적인 존재의 개입이라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리시스는 숲을 멀리 둘러보았다.
숲길은 꼬불꼬불했고, 갈림길도 많았다. 상단주는 길을 외워서 슥슥 나아갔지만 초행이라면 이 갈림길을 하나씩 가 보다가 일찌감치 조난당할 모양새였다.
“깊지요.”
“응.”
“안내인이 없으면 길을 잃다 헤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곳곳에 함정도 있어서 타지인은 절대 몸 성히 마을을 찾아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상단주는 겁주듯 말했다. 하지만 마냥 겁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외부의 공격을 숱하게 견뎌 온 곳이면 방어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쪽입니다.”
또 마주친 갈림길에서 상단주는 역시나 망설임 없이 길을 택했다.
지금까지는 아무 의심 없이 상단주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리시스는 뭔가 다른 느낌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리시스의 미심쩍은 행동에 키에르트가 말을 멈췄다.
리시스가 멈춰서자 행렬이 모두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상단주가 돌아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리시스는 상단주가 향하는 길을 쳐다보다가, 다른 쪽 길을 돌아보았다.
“이쪽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