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밀회 같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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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밀회 같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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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밀회 같은 재회
2022.11.13.
밤이 깊었지만 티티는 당장 호두를 향한 여정을 떠났다.
‘부디 황제 폐하의 주머니에 호두가 있기를.’
황궁 안이었으면 어디에 있든 당장 호두를 대령했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제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해도 모든 물자를 자유로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호두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간 티티가 배신당했을 때, 얼마나 크게 분노를 터뜨릴까…….
리시스는 부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먼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으, 추워.”
쉬란의 따스함에 너무 오래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에드린의 찬바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리시스는 창문으로 몰아붙이는 밤공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얼른 창문을 닫고 돌아서려던 차였다.
“……?”
창문을 닫기 전, 티티가 다시 뽀르륵 창문틀을 타고 넘었다.
“왜?”
“삣, 삐!”
티티는 평소보다 명랑하게 삑삑거리며 리시스의 어깨 위로 올라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길안내를 할 때 하는 짓이었다.
지금은 숲속도 아니고 길찾기를 시킨 적도 없는데, 얘가 왜 이러지?
리시스는 의아해 하면서도 티티가 시키는 대로 잡아당긴 쪽을 바라보았다.
“아얏, 기다려 봐. 창문에서 뛰어내리진 못해.”
“삐!”
창문 밖,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를 내려다보던 리시스의 어깨가 움찔 튀어올랐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리시스가 있는 방문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몸집이 익숙했다. 저렇게 크고 단단한 몸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리시스의 가슴이 순식간에 달리기를 한 것처럼 쿵쾅대기 시작했다.
“……폐하……?”
“삐!”
티티의 명랑한 대답과 함께 남자가 천천히 후드를 젖혔다.
달빛을 받아 평소보다 조금 더 푸르게 빛나는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폐하!”
리시스는 소리를 지르고, 혹시 누가 들었을까 봐 얼른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곤히 잠들었는지 내다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그보다 얼른 들어오세요!”
리시스는 얼른 숙소 입구로 뛰어내려가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키에르트가 움직였다.
키에르트는 창문 아래에 쌓여 있던 상자를 밟고, 벽을 걷어차며 창문을 향해 뛰어올랐다.
2층이었기 때문에 도움닫기까지 해서 뛰자 어렵지 않게 창틀을 잡을 수 있었다.
리시스가 허둥지둥 팔이라도 잡아 도와주려 했지만 키에르트는 팔 힘만으로 불쑥 몸을 끌어올렸다.
“아……!”
들어오기 편하게 리시스가 창가에서 물러나려는 순간, 키에르트는 놓치지 않고 리시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리시스가 놀라 짤막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내 틀어막혔다.
“흡……!”
키에르트가 돌풍이 들이닥치듯 리시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도둑처럼 창틀에 발을 올린 채, 한 손으로는 리시스의 허리를 꽉 끌어당겨 자신의 몸에 붙이면서.
리시스는 말릴 틈도 없이 입술을 내어주었다.
“으읍, 응……!”
리시스는 거칠게 파고드는 키에르트의 키스를 받아들이며 두 팔을 벌렸다.
이미 단단한 팔에 끌어안긴 상태였음에도 더 꽉 안기고 싶었다. 더 깊숙이 마주치고 싶었다.
키에르트는 화답하듯 창문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두 팔로 리시스의 몸을 힘주어 어루만졌다.
머리카락, 등, 어깨……. 천천히,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그의 손에서 성급함과 신중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저 여기 있어요……, 폐하.”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너른 등을 마주 안았다. 그제야 리시스도 키에르트의 심장이 거칠게 날뛰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이렇게 나타난 것일까. 언제부터 왔던 것일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키에르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리시스의 입을 막아 꺼낼 수가 없었다.
“리시스. ……리시스.”
키에르트는 갈증을 채우듯 리시스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신 뒤, 리시스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세 걸음 만에 침대에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들짐승처럼 날렵하게 올라탔다.
그 후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망토를 풀어내리고, 갑옷을 해체하는 과정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서로에게 매달려 본능만으로 움직였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뜨거운 맨살의 체온을 맞대고 있었다.
“폐하…….”
“키에르트.”
리시스는 호칭을 고쳐주는 키에르트를 올려다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키에르트.”
요청대로 이름을 부르자 몸에 닿아 있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부름에 활짝 웃었다.
“응.”
세상의 모든 꽃과 사랑을 받은 것보다, 이 웃음꽃 하나가 리시스의 가슴을 가장 크게 울렸다.
리시스는 자신의 품안에 들어온 이 뜨겁고 화려한 웃음꽃을 놓치고 싶지 않아 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
한바탕 방을 열기로 가득 채운 두 사람은 침대에 엉겨붙은 채 땀을 식혔다.
그 후에도 키에르트가 지분대는 손을 멈추지 않아 말랐던 땀이 다시 솟고, 차가운 공기에 마르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마지막으로 점령한 곳이 마침 이곳에서 가까웠어. 전서조의 연락을 받자마자 달리기 시작했지.”
미하엘이 렌데일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전서조를 날린 모양이다. 거리가 가까우니 전서조도 순식간에 연락을 물어날랐을 테고.
하지만 쉬란의 황제가 이렇게 제멋대로 에드린 땅에 나타나 버린 것은 문제가 크다. 그것도 무장을 한 채로.
대체 무엇이 이 남자를 그렇게 급하게 만들었는가.
문득 입이 삐죽 튀어나와 미심쩍게 대답하던 미하엘이 떠올랐다.
“……전서조에 뭐라고 써져 있었는데요?”
“로구안 놈의 처리 경과와…….”
“네에.”
그건 본론이니 있는 그대로 적었겠지.
그리고 거기서 리시스의 첨언이 어떻게 해석되었을지가 관건이다.
“‘황후 폐하는 어쩔 수 없이 에드린에 남으시겠답니다.’라고 쓰여 있었지.”
“…….”
리시스의 명령은 지켰다.
하지만 조금 더 길게, 자세히, 정황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을까?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리시스는 이 자리에 없는 미하엘의 멱살을 움켜쥐고 싶은 심정으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눌렀다.
“중간에 생략된 말이 너무 많은데요.”
“그걸 들으려고 직접 왔어. 그래, 어떻게 된 일이지?”
키에르트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닐 시에는 사형에 처할 것 같은 근엄한 자세였다.
리시스는 괜히 혼자 찔려 대역죄인이 된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니까…….”
리시스는 잔뜩 쪼그라들어서 쭈뼛쭈뼛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정말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흠.”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히 들었다.
이제 판결이 내려질 시간이다.
리시스는 조마조마하며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힘겨운 백성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바로 자신에게 달려오지 않은 것은 용서할 수 있었다.
“아, 역시 폐하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어요.”
리시스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키에르트가 혹시 자신을 우선순위에서 미뤄뒀다며 토라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하엘만 봐도 안 돌아오는 것 아니냐면서 불안해했지 않은가. 최측근이라는 그마저도 그랬다.
“그럼 저는 내일 그 찻잎을 생산하는 마을에 가서 수입 문제를 마무리 짓고, 되도록 빨리 돌아가도록 할게요. 폐하는 렌데일 영지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같이 가실래요?”
“아니.”
딱 자른 부정의 대답에 리시스는 잠시 당황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가는 길 정도는 같이 갈 줄 알았다.
“아……, 역시 폐하도 바쁘시죠……. 전선으로 돌아가 보셔야 하려나요?”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지.”
“바쁘셔서 같이 안 가시는 거 아니에요?”
리시스가 대답을 하면 할수록 키에르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대를 놓고 렌데일 영지로 돌아가야 하지?”
“……아? 폐하께서……, 저랑 같이……? 그치만 여기는 에드린인데요.”
“나도 황제가 아니면 되지.”
“?”
리시스는 멍하니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로구안 땅이랑 황제 자리를 바꿔 가져오신 건 아니겠지?
리시스의 멍한 눈빛을 받은 순간, 키에르트는 그 마음속에 뭐가 떠오르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내가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라는 남자로서 동행하는 건 문제가 없지 않은가.”
리시스는 그 말에 더욱 당황했다.
‘황제’와 ‘키에르트’를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되지를 않았다.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뭐, 다른 일을 해결하고 뒤늦게 합류한 부하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
리시스가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우선 해결방법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아직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부하’까지 나왔다. 리시스의 머릿속에 대혼란이 찾아왔다.
“……어떻게요?”
“편하게?”
“어떻게 편하게요?”
“말부터 일단 편하게 해 봐.”
“어떻게 말을 편하게 해요……?”
리시스의 머리는 너무 당황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키에르트는 재촉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이름부터 불러보면 어떻겠나.”
“키에르트.”
이건 리시스도 몇 번 불러봐서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리시스가 출발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상단주가 인사를 건넸다.
“응…….”
몸의 준비는 다 되었는데, 마음의 준비는 아직 조금 부족한 것 같아…….
리시스는 말꼬리를 흐리며 뒤따라 내려오고 있는 키에르트를 곁눈질했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상단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을 더듬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아주 예리했다.
“어! 남겨둔 일이 있어서 어젯밤에 복귀한 병사야. 나의, 가장 친밀하고, 가깝고, 어……, 믿을 수 있고, 소중한 존재지.”
리시스는 잔뜩 긴장해 외웠던 대사를 줄줄 읊었다.
“아, 그렇습니까. 밤에 오셨으면 피곤하시겠습니다. 그럼 출발할까요?”
그러나 상단주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신원이 분명한 사람만 데려갈 수 있다든가, 어젯밤에 인원이 확정되어서 한 사람은 남겨둬야 한다든가 하는 별의별 걱정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싱거운 해결이었다.
“…….”
그러나 상단주 말고 다른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렉싱턴의 따갑다 못해 아픈 시선에 리시스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상단주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델리안 마을은 마차가 들어가기 어려우니, 말을 타야 합니다. 말은 탈 수 있으시지요?”
“응?”
리시스는 말보다 그 앞에 나온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델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