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뒷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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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뒷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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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뒷정리
2022.11.10.
“미하엘은 일단 렌데일로 가서 정리하고 대기해. 나는 이쪽 일이 끝나는 대로 합류할게.”
세니아의 처분은 리시스가 단독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황도로 보내 키에르트와 함께 결정할 일이었다.
세니아와 렌데일 백작의 일만 빼면 나머지는 렌데일 공작령의 안정이었다.
미하엘은 귀족가의 자제였다. 그러니 영지를 보살피는 일 정도는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꼭 저를 떼놓으셔야겠습니까.”
일의 경중 문제가 아니었다. 리시스가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 문제였다.
미하엘은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서 시종일관 구시렁구시렁, 처음으로 명령에 불복하며 개겼다.
“렌데일 영지의 일을 맡길 수 있는 건 미하엘뿐이잖아.”
이제부터는 전투가 일어날 상황은 없다.
리시스는 에드린 내부에 쉬란의 병력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어 미하엘과 쉬란 쪽 병사들을 모두 렌데일로 보내 놓을 생각이었다.
“아, 그래도요.”
“그래도 뭐?”
혼자만 보낸다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불만이지?
리시스가 얼른 이유를 털어놓으라고 눈을 마주쳤다.
결국 이기지 못한 미하엘이 꿍얼꿍얼 이실직고했다.
“쉬란 사람들만 빠지고 렉싱턴 장군네랑만 가시는 거잖습니까…….”
“어……. 아니, 이건 렉싱턴 장군님을 더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투 중에는 신기할 정도로 죽이 잘 맞기는 했지만 둘의 앙숙관계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리시스의 곁에 누가 남느냐로 경쟁심을 불태울 만도 했다.
“그것도 있긴 합니다만!”
역시나, 미하엘은 그건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가 또 있던 모양이다.
그것까지는 리시스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또 뭔데?”
“……이대로, 쉬란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지요?”
“엥?”
리시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미하엘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언제나 다부지고 냉정한 눈동자가 물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리시스는 당황해서 두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아냐! 아냐 정말, 에드린 쪽 상황 살펴보고, 정리만 되면 바로 돌아갈 거야.”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못내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쉬란과 황제 폐하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버리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리시스는 미하엘의 얼토당토않는 불안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하엘의 불퉁한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일만 끝내고 금방 돌아갈게.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럼 황제 폐하께는 뭐라고 연락을 드리면 됩니까.”
키에르트에게 연락을 줄 수 있는 전서조는 렌데일에 있다. 하필 쪽지를 쓸 수 있는 종이와 잉크가 똑 떨어졌다.
쪽지 하나 쓰자고 렌데일 영지까지 갔다가 다시 에드린으로 돌아오는 건 번거롭다.
간 김에 미하엘이 연락을 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폐하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바로 돌아가지 못한 걸로 해 줘. 꼭이야.”
미하엘의 염려는 웃으며 넘긴 리시스지만 키에르트의 이름 앞에서는 웃지 못했다.
짧은 순간, 리시스의 머릿속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확률이 몹시 높은 일련의 상황이 촤라락 스쳐지나갔다.
리시스가 ‘자의로’ 에드린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키에르트가 얼마나 서운해 할까.
실망으로 가라앉은 눈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미하엘은 미심쩍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리시스의 명령대로 따르기는 할 거다. 하지만 거기에 자신도 모르게 사감이 조금 섞일 수도 있고…….
리시스도 ‘의도하지 않게’ 에드린에 남기로 했으니, 쪽지에 ‘의도하지 않은 내용’이 적힐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에드린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은, 마을과 도시의 중간 정도 되는 꽤 번성한 곳이었다.
촌장이 있기는 하지만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상단주였다.
상단주는 로구안 군을 무찌르고 등장한 리시스 무리를, 맨발로 달려 나와 맞이했다.
“저희를 구해주신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
감격해서 외치던 상단주가 맨 앞에 선 자그마한 리시스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이 우락부락하고 강인해 보이는 남자들 앞에 대표로 선 리시스가 이질적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시스도 자신이 어찌 보일지 알았다.
“환대해 줘서 고마워. 이제 그 망할 놈들이 다시 몰려와서 괴롭힐 일은 없을 거야.”
리시스는 상단주의 흔들리는 시선을 모르는 척 인사말을 던졌다.
“아, 아아, 예에……, 저 그런데, 로구안을 물리쳐 주신 이……, 분께서는 누구신지…….”
“나는.”
리시스는 자기소개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자신은 누구라고 먼저 소개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리시스라고 해.”
“……리시스 님. 리시스 님이요.”
상단주는 리시스의 이름을 쓴 약을 삼키듯 무겁게 되뇌었다.
사실 이름만으로는 뭐가 없었다.
리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개를 덧붙였다.
여기는 그저 ‘리시스’로서 왔을 뿐이지만 이름을 말한 시점에 이미 정체를 대충 까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드린의 공주였었는데, 지금은 쉬란의 황후가 되었어.”
“에드린의 공주……, 쉬란의 황후……. 리시스 님.”
상단주는 멍하니 리시스의 소개를 입 안으로 반복했다.
차라리 엄청 놀라줬으면 괜찮다고 말리기라도 하겠는데,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니 리시스도 반응하기가 멋쩍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드린을 돕고 싶은 리시스로서 와 있어. 그러니까 다른 신분은 너무 신경쓰지 말고.”
“아, 예! 리시스 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단주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큰 소리로 예를 표시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환대해 줘서 고마워.”
“일단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로구안 놈들이 다 털어가서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상단주는 리시스와 렉싱턴을 건물 안쪽으로 모셨다.
상단주의 말대로 건물 안은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웅장한 건물의 자취는 그대로였으나 사방에 깨지고 부서진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로구안 놈들은 얌전히 숙식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렇게 만들었어.”
리시스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단주는 그나마 부서지지 않은 의자를 권하며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저희를 이렇게 또 지켜주셨으니,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알헨크를 물리친 것은 필요해서, 그리고 화가 나서였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듣고자 했던 마음은 전혀 없었다.
상단주의 진심어린 감사를 들으니 멋쩍어 괜히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일단 약탈해 가는 놈들이 사라졌으니 빨리 회복할 수 있겠지?”
“예에, 물건만 다시 팔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한 번 전쟁이 있던 지역에 상인들이 다시 찾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다.
그때 방 한쪽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약탈을 안 해갔나 보네?”
“아, 네. 로구안 놈들은 차 문화가 없어 찻잎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아 털려도 상관없는 양이었습니다만……, 저건 거들떠보지도 않더군요.”
찻잎.
리시스의 머릿속이 확 밝아졌다.
“혹시 렌데일과 거래를 하고 있었나?”
“아, 예. 주요 고객이셨죠.”
역시나.
세니아가 들여오던 에드린의 차는 이쪽에서 공급받고 있던 모양이다.
이제 세니아가 사업을 계속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쉬란의 차 사업에는 큰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 사업을 황실이 가져간다면……?
“그럼 그 물량, 쉬란 황실과 직접 거래해 볼 생각은 없나?”
“예?! 화, 황실과 직접……, 말씀이십니까?”
상단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거래처를 새로 뚫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 동안 손실은 계속 나고 있을 테고.
황실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거래처다.
“응. 렌데일과 거래할 때에 비해 섭섭하지 않게 쳐 줄게.”
말 나온 김에 물건 확인부터 해 볼까?
리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석의 상자들을 살폈다.
상단주의 말처럼 양이 많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개인이 소장할 정도지 대량으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의 재건을 도우려면 이것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했다.
“이게 다야? 창고에라도 더 없어?”
“아, 그게 말입니다……. 차를 들여오는 길이 막혀 당장 가진 재고분이 똑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런. 그럼 새로 들여오는 건 얼마나 걸리는데?”
“그건 금방입니다! 가까운 마을에서 들여오는데, 로구안 놈들 때문에 출입을 막아버렸거든요. 이제 다시 무사하다는 걸 알리면 금방일 겁니다.”
“잘됐네!”
리시스는 방긋 웃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아예 같이 가서 물건도 보고……, 아, 직거래를 트겠다는 말은 아니야.”
직거래가 편하고 싸기는 하지만 중간에 품질관리 및 유통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나라와 나라를 넘나드는 장거리 무역인 만큼 중간 거래상을 끼는 쪽이 편했다.
“어차피 처음 보는 이는 마을에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왜?”
“그건 가 보시면 알 겁니다.”
상단주는 뭔가가 있는 느낌만 풀풀 내며 정확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잠깐 고민하던 리시스는 바로 정답을 찾아냈다.
“출장료는 톡톡히 쳐 줄게!”
그제야 상단주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뭘 아시는 분이군요!”
“내가 뭘 모르진 않지!”
극적인 협상을 타결한 두 사람은 계약 성립을 축하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쪽 마을에 연락을 취해야 하기도 하니, 오늘은 우선 쉬시고 내일이나 모레쯤 이동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상단주는 리시스와 일행들 전부가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오랜만에 깨끗하게 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편한 잠자리에 몸을 뉘일 수 있게 되자 그곳이 바로 황궁이나 마찬가지였다.
‘폐하는 잘 계실까.’
자리에 눕자 이제야 밀렸던 생각들이 몰려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키에르트였다.
자신이 전쟁터로 떠밀어 보냈으면서, 막상 잘 지낼지 걱정이 되었다.
오독오독 오독오독…….
리시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티는 침대 곁 협탁에서 씨앗을 먹어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너어는, 호두가 그립지도 않니?”
“삐?”
티티의 코끝을 톡 건드리던 리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서조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단이 있었다.
“자, 우리 호두 먹으러 갈까?”
“삐!”
호두라는 말에 티티가 득달같이 반응하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