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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그 마음, 겨우 그 정도였어? (131/153)


131. 그 마음, 겨우 그 정도였어?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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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헨크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본인이 저지르고 다닐 때에는 아무 생각 없어도, 남이 하는 것을 당하는 입장이 되니 웃음이 안 나오겠지.

리시스는 그 얼굴을 보고 즐겁게 웃었다. 이제 웃음을 짓는 건 이쪽의 차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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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 보니, 살면서 당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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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택으로 쉬란과 에드린은 지도에서 사라질 거야, 황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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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전쟁에는 명분이 중요하다.

절대자의 욕심으로 일으키는 침략 전쟁조차 명분은 있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명령대로 움직이는 병사라 하더라도 그렇다.

렌데일 영지를 휘젓고 다닌 알헨크는 그 명분을 쉬란에게 주었다.

쉬란이 힘이 없어 로구안을 지켜만 보고 있던 것이 아니다. 거슬리지만 분노할 만큼은 아니라 치밀하게 손익을 따져보며 기다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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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디 한 번 지켜보든가. 여기서 나랑 장난이나 치면서. 누가 이기든 그 사이 돌아갈 나라가 없어지는 것도 재미있겠네.”

리시스를 갖네 마네 하는 것도 다 장난이다.

당하는 사람은 재미없는 장난.

하지만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이 망가질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도 그 장난이 즐거울 수 있을까?

알헨크는 태연한 척 했지만 늘 얼굴에 덮고 있던 여유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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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구안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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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여기서 나랑 놀고 있는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고.”

알헨크가 로구안의 병력 전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병력의 중요한 일부인 것은 맞았다. 나라 전체가 전쟁에 돌입했을 때에는 아쉬울 만한 공백만큼의 병력일 것이다.

리시스는 빙글빙글 웃었다.

발이 묶이기는 리시스도 마찬가지지만, 쉬란에는 키에르트가 있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만큼 강했다.

알헨크가 빠진 로구안, 리시스가 빠진 쉬란.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면 로구안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리시스가 알헨크와 벌일 전투의 승패는 쉬란 대 로구안이라는 큰 전쟁 앞에서는 취미생활이나 매한가지였다.

전쟁은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 전쟁은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출발했지만, 지금은 리시스의 화풀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쓸데없이 휘말려야 했던 추문, 키에르트와의 결혼이 위태로워질까 쌓이던 불안, 상대하기도 싫었던 시간까지. 응축되었던 울분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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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성히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분노에 가득찬, 하지만 드디어 속풀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산뜻한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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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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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격합니까?”

키에르트는 눈앞의 성벽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쉬란에는 상비군이 있기 때문에 출병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리시스의 연락을 받은 즉시 키에르트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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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스가 원하니까.”

늘 주어진 것에 만족하던 리시스가 원했다.

알헨크 때문에 가장 속이 탔을 사람은 리시스였다. 그런데도 알헨크를 치러 직접 나서는 것조차 ‘키에르트와 쉬란을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냥 리시스가 스스로 화가 나서, 제 손으로 때려눕히고 싶어서, 그도 아니면 황궁이 답답해서 에드린에 놀러 갔다오고 싶어서.

이런 이유를 댔어도 키에르트는 잡지 못했을 것이다. 울며 같이 데려가 달라고 발밑을 뒹굴며 떼를 쓸지언정.

그러던 리시스가 로구안의 침략을 원했다. 명분이든 이득이든 계산할 필요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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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향이든 쉬란에 손해는 아니고.”

지금 키에르트가 군을 이끌고 나온 곳은 쉬란의 국경에서 가장 인접한 곳이었다.

한때 독립된 왕국이었지만 알헨크의 공격에 하루아침에 무너진 나라. 적통 서출 가리지 않고 왕족이란 왕족은 모조리 목이 베여 성벽에 걸렸다.

통치는 알헨크의 밑에 있던 신하 몇이 대충. 그러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쉬란의 군대가 성밖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방어태세조차 취하지 못했다.

거저 주워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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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무혈입성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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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지. 바로 다음 영지로 이동해도 되겠군.”

로구안을 치라는 리시스의 부탁은 알헨크를 곤란하게 하려는 작전의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 작전대로면 쉬란 내부에 위협을 주어 알헨크의 자유를 빼앗는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작전은 작전이고, 선물은 선물이다.

기왕이면 선물은 많이, 다양하게. 키에르트의 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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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나 주워 담을 수 있으려나.”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위한 선물을 차곡차곡 주워 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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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알헨크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신음했다.

처음에는 엇비슷한 전력이었다. 수적으로 우월했기에 유리하다고도 생각했다. 리시스는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 지휘관이 아니라 더 만만하게 봤다.

그러나 세상엔 다양한 지휘법이 있었고, 리시스는 알헨크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변칙적인 공격을 썼다.

무아렌 강의 전투에서 두 나라가 박빙이었던 것은 리시스도 막 배워가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쉬란 군도 리시스와 숱하게 부딪치며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파악을 했으니 상대가 되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지금의 리시스를 만났다면 무아렌 강은 이미 에드린이 차지했을 것이다.

리시스는 눈앞에서 피가 튀고 살이 굴러다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전을 잘 짜도 피는 못 보는 심약한 공주님일 수도 있다. 알헨크의 지레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시스는 오히려 알헨크의 피를 볼 때마다 대놓고 기뻐하며 까르르 웃었다. 마녀였다.

지금도 리시스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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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버티네.”

알헨크는 대답 대신 이를 갈았다.

전세가 기운 것도 문제지만 더 큰 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란의 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로구안으로 쳐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로구안을 침략할 거라는 리시스의 말은 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허세겠지, 교란작전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가 정말 움직였다면 그건 더 이상 가벼운 협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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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것들!’

가서 로구안 가져다 달라는 리시스나, 그러겠다고 정말 출발하는 키에르트나 똑같이 미쳤다.

세상에서 제일 미친 건 자신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미친 자들이 있었다.

알헨크는 이제 도망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시스가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을 즐기던 것도 초반뿐이다. 슬슬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리시스 군도 피로도가 올라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동하자마자 휴식도 없이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사기로 버텼지만 점점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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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슬슬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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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버텨.”

리시스의 명령에 렉싱턴이 돌아보았다.

이미 리시스가 이긴 싸움이었다. 알헨크의 병사는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리시스의 군대에도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다.

리시스는 자신의 사람이 다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키에르트와의 전투였다면 고지 하나쯤 포기하고 후퇴를 명령했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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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따라가서 잡아.”

리시스가 독하게 내뱉었다.

당장 싸우기 싫어 피하는 건 일을 키울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세니아도, 알헨크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마음 놓고 있다가 결국 큰 문제로 연결이 되었다.

이미 일은 커졌다. 그렇다면 마무리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착하고 무르게 군다고 그만큼 세상 일이 곱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톡톡히 배웠다. 독하게 물어뜯어야 자신을,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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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일어나지조차 못하게, 확실하게 밟아 놓을 거야.”

이전에는 살아 있는 이유조차 모르고 살았다. 살아 있으니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했을 뿐이다.

지금은 키에르트가 알려준 것처럼 스스로가 소중했다.

리시스는 그 소중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잔인해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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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와, 내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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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생전 욕심을 부린 적이 없는 리시스가 원했다.

리시스 군은 리시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키에르트와 마찬가지로 리시스 군 역시 기왕이면 많은 선물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

사냥은 머지않아 끝났다.

알헨크 군은 궤멸했다. 몇 남지 않은 병사와 알헨크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온몸이 꽁꽁 묶여 리시스의 앞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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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다들 미쳤나?! 나를 죽이면 로구안이 가만히 둘 것 같아?!”

꽁꽁 묶인 채로도 기세가 죽지 않은 알헨크는 흙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악을 썼다.

리시스는 나뭇등걸에 앉아 턱을 괴고 그 꼴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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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다고는 안 했어.”

리시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님 같았다. 누가 들어도 솔직히 군주로서의 위엄은 없었다.

그러나 저 입에서 나올 명령이 알헨크의 목숨을 쥐고 흔들 것이다. 언제나 휘둘리기만 했던 리시스는 이제 로구안의 왕자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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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 죽이지는 않으면서 나한테 했던 짓과 쉬란에 누를 끼쳤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면.”

리시스의 혼잣말에 알헨크는 뒷머리가 쭈뼛 섰다.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툭하면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인형처럼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던 이 조그만 여자가, 거꾸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알헨크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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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무슨 짓을 할 거야, 이 미친X아!”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알헨크가 악을 썼다.

리시스의 발밑에 나뒹굴고 있는 이 시야가 낯설어 참을 수 없었다. 언제나 자신은 머리 꼭대기에 군림해야 마땅했다.

사방이 적이고, 세상은 거칠었지만, 자신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 위험한 놀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현실이었다. 하필 시궁창에 처박힌 현실.

알헨크의 거친 고함에도 리시스는 얼어붙는 대신 픽 웃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는 자의 욕은 놀랍거나 상처가 되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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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자기한테 오라고 온갖 수작질을 부리더니. 그 마음, 겨우 그 정도였어?”

리시스는 알헨크의 가볍고도 하찮았던 유혹을 비웃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방에 혈흔과 찢겨나간 몸, 옷, 무기들이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나무토막 하나를 가져와 놓은 왕좌에 앉아 리시스는 냉엄한 판결을 내렸다.

알헨크는 처음부터 귀찮고 성가실 뿐인 날파리였다.

날파리가 얼굴 옆에서 깔짝댄다고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그저 귀찮을 뿐이다. 하지만 귀찮다고 방치했다가 일이 커져버렸다.

이제는 그 날파리가 번성하지 못하게 약을 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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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칼을 들고 싸우지 못하게 만들어. 로구안까지는……, 그래. 기어가는 게 좋겠네.”

리시스의 명에 리시스의 병사들이 칼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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