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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빨리 때려잡고 편히 쉬자 (130/153)


130. 빨리 때려잡고 편히 쉬자
2022.10.30.



 
리시스는 경고와 함께 몸을 돌려 성벽을 떠났다.

알헨크의 병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리시스가 전열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밀고 들어올 작정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세니아를 데리러 온 것이었는데, 리시스까지 함께 가져갈 수 있으면 더 좋다고 계산한 모양이다.


“전투 준비에 들어갑니까?”

“응.”

생각보다 이르지만 어차피 다들 싸우러 왔다. 이르다고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시스와 동행한 이들은 전투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전투를 앞두고 시간만 질질 끄는 것이 더 진 빠진다.

리시스는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전략을 이리저리 수정하며 머리를 올려 묶었다.


“다들 이동하느라 지쳤겠지만…….”

“안 지쳤습니다!”

리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이 기세가 언제 생겼냐면……, 다 함께 연병장에서 구르며 생겼다.

그렇게 개처럼 고생하며 훈련을 했는데 싸워보지도 못했으면 더 억울했을 것이다.


“……그래, 그리고 성을 끼고 싸우게 되었으니 너무 급하게들 생각하지 말고.”

어차피 이 싸움은 길어질 수가 없다.

약탈로 보급을 채우고 있는 알헨크 군과, 여차하면 달려올 수 있는 키에르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리시스 군.

길어질수록 알헨크가 불리했다. 그러니 급하게 상대를 꺾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리시스가 가지고 있는, 숨겨놓은 강력한 패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알헨크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기왕이면 빨리 때려잡고 편히 쉬자.”

“예!”

리시스는 긴장감 없이 웃으며 성의 구조를 눈으로 훑었다.

알헨크는 오늘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아 밤에 머리를 대고 잘 수가 없을 것이다.

***



“이런 젠장!”

벌써 몇 번째 뒤를 당했다.

알헨크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말머리를 급히 돌렸다.


“저기다!”

아무리 도망쳐도 어디에나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성 안에 남은 렌데일 병사들은 병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결국 병력은 리시스가 데리고 온 부대가 끝. 그럴 경우는 성을 이용해 싸우는 편이 유리했다.

그러나 성문은 금방 열렸다.

함정이든 아니든 알헨크는 신경쓰지 않았다. 함정이어도 밟고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성 안의 전투는 렌데일 군으로 이미 경험이 있었다. 이제 막 성에 도착한 리시스 군이 불리했다.

……그래야 했는데.


“저기!”

리시스는 그 짧은 사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성 안 곳곳을 장악했다.

전투요원이 아닌, 성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헨크는 몰리면서 깨달았다.

전투력이 없는 사람은 아군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기에 전선에서 분리시킨다.

그런데 그들을 이렇게 활용하며 전투를 진행하는 것은 상식도 아니었다. 알헨크는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성을 벗어난다!”

성은 복잡했고, 좁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에 제약이 많았다.

렌데일 병사를 상대할 때는 아무래도 좋을 만큼 손 쉬워서 신경쓰지 않았지만 극도로 훈련된 리시스 군을 상대하려니 벅찼다.

알헨크는 일단 후퇴를 선택했다.

그러나 리시스 군은 성을 벗어나면서까지 따라붙었다.


“뭐 하는 거지?!”

리시스 군은 막 도착했다. 진지를 구축하지도 않았고, 주변의 지형을 파악하지도 않았다. 저렇게 대책 없이 따라와서 뭘 어쩌자는 건가. 알헨크는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황당했다.

그러나 돌아서서 정면대결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성 안의 전투에서 희생이 적지 않았다.

리시스 군과 마찬가지로 알헨크의 병사들도 유기적으로 묶여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런데 성의 전투로 공백이 생긴 것이다.

아직도 수적으로는 우세했다. 하지만 리시스가 펼친 ‘뜻밖의’ 전술에서 그 ‘뜻밖’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모의전투에서 보여주었던 리시스의 의외성은 고양이의 앞니 정도에 불과한 애교였다.

예측할 수 없는 상대는 공포다.

알헨크는 그 공포에 밀려 도망가고, 또 도망갔다.

리시스 군도 쫓고, 또 쫓았다.

그러던 중간에 몇 번이고 무력충돌이 있었다.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활용할 틈도 없어서 무식하게 싸웠다. 결국 힘 대 힘의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밀렸다. 알헨크는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국경입니다!”

결국 렌데일 영지의 끝, 에드린 국경까지 왔다.


“……젠장, 에드린 땅으로 가든 말든 의미가 없잖아.”

렌데일 병사들은 에드린 땅을 밟을 수가 없다. 애초에 이쪽까지 몰릴 만큼 밀린 전투도 없었지만, 도망갈 곳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두고 싸우는 쪽이 훨씬 마음 가볍다.

그러나 리시스는 에드린의 공주였다. 에드린 땅으로 자유롭게 넘어갈 권리가 있었다.

이대로 에드린에서 싸움이 길어지면 알헨크에게 불리했다.

렌데일은 같이 리시스를 공격하는 입장이기라도 했지, 에드린은 여차하면 뒤집힐 수 있었다.

알헨크는 결국 말머리를 로구안 쪽으로 향했다.

세 나라의 국경이 비슷하게 맞물린 곳이라 로구안 국경도 머지않았다.

리시스는 쉬란과 에드린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로구안은 아니었다. 개인이면 모를까, 병력을 대동한 채로는 안 된다.

모양새가 좋지는 않지만, 이렇게 리시스를 약 올려서라도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결국 알헨크는 로구안 국경을 넘었다.


“휴……, 제법이야. 아주 진땀 뺐어.”

알헨크는 말을 멈추고 돌아서며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국경을 넘지 못해 약이 잔뜩 오른 리시스의 얼굴을 볼 수 있겠지, 기대가 컸다.


“……응?”

그런데 뒤따라온 리시스 군에 리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알헨크가 눈썹을 모았다.

혹시 뒤에 숨었나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없었다.


“리시스는?”

국경 때문에 멈춰서 있던 렉싱턴이 무표정하게 칼을 들어올렸다.


“어딜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존귀한 이름을 함부로 담느냐!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로 황후 폐하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것, 반드시 처벌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렉싱턴의 쌓인 원한은 알헨크 쪽에도 많았다.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바로 저자였다. 곱게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넘어가 싸우겠습니다!”

“진정하시지요. 저도 넘어가고 싶습니다.”

미하엘도 자신이 충성하는 황후 폐하의 악적을 눈앞에 두고 얌전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렉싱턴과 손 붙잡고 나란히 국경을 넘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작전에 저희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황후 폐하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미하엘의 만류에 렉싱턴도 한풀 꺾였다.

그러는 동안 알헨크의 질문은 깨끗이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시스는 왜 안 보이냐고? 설마 안 온 거야?”

“뒤에서 오고 계신다.”

“?”

알헨크는 두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남은 것도 아니고, 같이 이동한 것도 아니고, 뒤에서 오고 있다고? 대체 왜?

그때 저 멀리서 마차가 다가왔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살벌함이 감돌던 국경지대가 갑자기 웬 영애의 나들이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다.

마차는 국경 앞에 멈춰섰다.

리시스는 사뿐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려 매서운 눈으로 알헨크를 노려보았다.


“꼭 이렇게 비열한 수 말고는 쓸 게 없나보네.”

“아니, 잠깐. 그 전에, 왜 마차야?”

“승마를 잘 못해. 괜히 무리하다가 낙마하느니 안전하게 마차로 따라오는 게 낫잖아?”

리시스는 아주 당당하게 밝혔다.

승마 좀 못해도 작전 지휘에는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그’ 전쟁터의 공주님이 승마를 못한다는 것이 알헨크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리시스를 놀려주려던 작은 계획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은 이쯤 하지?”

오늘만 날이 아니다. 알헨크는 되도록 오랫동안 리시스를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정말 잡기라도 하면 좋고, 그러지 못해도 얼굴을 마주치면서 노는 재미도 쏠쏠할 테니까.

오늘처럼 뒤통수를 연달아 맞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리시스는 알헨크의 제안에 대꾸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국경석을 쳐다보았다.

외진 곳이라 국경초소 같은 것은 없고 국경을 알리는 돌만 덩그러니 세워 놓았다.


“어쩔까…….”

리시스의 고민이 길어졌다.


“리시스 님.”

“황후 폐하.”

렉싱턴과 미하엘이 몸을 착 세우며 대답했다.

여차하면 다 같이 목이 날아갈 수 있지만, 리시스가 명한다면 기꺼이 넘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비장한 두 사람의 대답에 리시스는 픽 웃고 말았다.

사실 알헨크를 상대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비장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저 자식을 더 잘근잘근 밟아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역시 오늘 그냥 돌아가는 건 좀 아쉽지.”

“우오오오!”

“그렇습니다!”

리시스의 말에 리시스 군은 일제히 괴성을 질렀다.

이미 이들은 추격전에 피가 달아오른 상태였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기세가 같을 수 없었다.


“이봐, 황후님. 로구안 국경을 넘으려고?”

당신들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어.

알헨크가 끼어들어 일러주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놀란 척도 해 주지 않았다.


“응.”

지그시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로구안 국경이라니까? 당신이 쉬란의 황후든, 에드린의 공주든, 어느 쪽이 돼도 전쟁 도발이야.”

“잡자. 빨리 잡아버리고 돌아가자.”

그러나 리시스는 알헨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늘 저녁은 닭을 잡자.’ 같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헨크는 더욱 리시스의 속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아예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셔도 상관없으시다?”

“응. 상관없어. 그런데 그쪽이야말로 이런데서 시간 질질 끌어도 괜찮을까?”

“뭐?”

“이러는 동안 로구안이 홀랑 사라져버릴 수도 있거든.”

이건 또 협박이라기엔 너무 맥락이 없다. 그냥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린가?

알헨크가 가만히 있자 리시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붙여주었다.


“쉬란은 공식적으로 로구안과 전쟁을 시작할 거야.”

리시스가 키에르트에게 보냈던 쪽지에 덧붙인 말은 그것이었다.

『빈틈을 노려 본국을 치세요.』

전서조의 연락을 받은 키에르트는 쉬란의 전군을 이끌고 로구안으로 향할 것이다. 그가 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알헨크는 이곳에서 소꿉놀이 같은 전투를 이어가다가 로구안이라는 나라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명분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전쟁을 일으킨다고?”

알헨크는 기가 막혀 물었다.


“응, 갑자기 로구안이 갖고 싶어졌어.”

리시스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왜? 너도 그랬잖아.”

이젠 너도 당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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